50화
오랜만에 상쾌한 아침을 맞이했다.
늘 피곤했는데 꿀잠을 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아침을 하고 있자 시하가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시하야. 잘 잤어?”
“아아.”
“오늘은 왠지 푹 잔 거 같아.”
“아아.”
“역시 돈이 많이 들어오면 여유가 생기네. 이게 행복일까?”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지만, 여유는 가져다주는 것 같다.
번역 일을 하는데도 급하지 않고 여유롭게 되는 것을 보니 역시 돈은 있고 볼 일이었다.
그렇다고 막 엄청나게 번 건 아니었다.
통역사 일은 그저 수입이 불안정한 프리랜서로 일한 것뿐이니까.
“형아.”
“응? 왜 그래?”
“승준. 하나.”
“응?”
시하가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내게 준 초대장을 보였다.
그래. 저 초대장. 영상이 엄청나서 뭐라 말 못 했지.
딴 건 몰라도 시하가 나오는 부분을 몇 번이나 편집해 놨다.
반복 재생이 되도록 이미 3시간짜리로 만들어 두었단 말씀.
시하가 너무 귀여웠다.
“형아~ 초대~”
“응. 초대장이지.”
“승준, 하나. 집.”
“응. 승준이하고 하나의 집이…. 응?”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승준이와 하나 집에 가자고?”
“아아. 초대장.”
“그래. 초대했으니까 가야 한다는 말이야?”
“아아.”
끄덕끄덕.
시하는 내 바지를 잡고 흔들었다.
그렇구나. 가야 하는구나. 설마 승준과 하나도 그런 식으로 준 건 아닐 것이다.
영상은 누구에게나 다 주는데 설마 이게 집으로 초대하는 초대장으로 줬을 리가…….
그때 폰에 톡이 하나 왔다.
[승준 엄마 : 시혁 씨. 시하랑 저희 집에 놀러 오실래요? 하나와 승준이 초대했다던데요?]
줬을 리가 있네?
아무래도 그 의미가 맞았나 보다.
일단 간다는 답장을 보냈다.
“시하야. 그럼 준비해서 승준이와 하나 집에 가자.”
“아아!”
시하가 신나서 만세를 했다.
도도도 어딘가로 달려가더니 펭귄 가방을 질질 끌며 거실에 떡하니 자리를 잡는다.
여기저기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펭귄 자동차, 각티슈, 리모컨, 볼펜 등등.
아니, 리모컨이랑 볼펜은 왜 챙기는 거지?
나는 그냥 귀여워서 일단 지켜보았다.
다 챙긴 시하는 가방을 메고 신발장 앞에 털썩 앉았다.
“형아~”
“일단 씻는 것부터가 먼저 아닐까?”
“아?”
“밥 먹고 씻고 좀 있다가 나가자. 알았지?”
“시하. 가~”
“아니야. 가지 말고. 큭큭.”
“시하. 가~”
“아니야. 가지 말라니까. 아하하. 못 말려.”
나는 신발 신으려고 하는 시하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친구 집에 처음 놀러 가는 거라 흥분했나 보다.
우리는 일단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
승준과 하나의 집은 처음 가봐서 두근거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32평쯤 되어 보이는 집이 드러났다.
승준 엄마가 나를 반겼다.
“어서 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이건 별거 아니지만, 애들이 좋아할 거 같아서 사 왔어요.”
“어머. 빈손으로 오셔도 되는데.”
“에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오늘을 위해 좋은 걸 배우는데.”
“그러면 더 열심히 가르쳐야겠는데요?”
오기 전에 문자를 나누면서 오늘 요리를 조금 배우기로 했다.
정확히는 케이크 만들기를 배운다.
5월 5일, 어린이날 때 시하에게 줄 선물이었다.
일러스트 기법 케이크.
케이크 빵 위에 펭귄을 그려내는 게 오늘의 목표였다.
식탁 위에서 할 거라서 시하가 볼 수 없겠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애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떡 만들기도 같이 진행할 생각이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
“네.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승준과 하나가 현관 쪽에서 반겼다.
“시하야~!”
“시혀기 오빠!”
“아아. 승준. 하나.”
방금 하나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나?
시하는 상관없다는 듯이 두 사람을 끌어안았다.
친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예전을 생각하면 이런 친구들이 생길지 몰랐다.
어린이집에 보내기 잘한 것 같다.
아마 그때 문도환이 나에게 조언을 하지 않았으면 나는 이상한 길로 갔을지도 모르겠다.
승준 엄마가 말했다.
“자. 오늘 떡카롱을 만들 거예요. 다들 손부터 씻어요.”
“네!”
아이들이 쪼르르 화장실로 갔다.
신기한 게 샤워기가 세 군데로 물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샤워를 위해 머리에 위에서 나오는 부분.
호스가 달린 보통의 샤워기 부분.
그 아래로 아이들도 손을 씻을 수 있게 물이 나오는 곳이 있었다.
“신기하네요?”
“신기하죠? 저 샤워기 설치하는 데 돈 좀 들었다니까요. 저거 보고 나중에 애완동물 씻길 때도 편할 것 같아서 주문했어요.”
“우와.”
나도 시하가 혼자 씻을 수 있게 저런 거 하나 설치해야 할까 싶었다.
굳이 저런 거 말고 조그맣게 말이다.
뭐 얼굴을 혼자 씻으면 상의가 다 젖긴 하겠지만.
그것도 나름 귀여우니까.
그때 애들이 나오며 말했다.
“다 했다!”
“하나도. 하나도.”
“아아. 형아.”
저마다 손 닦는 게 달라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승준은 대충 수건에 손을 문질렀고, 하나는 꼼꼼하게 닦았으며, 시하는 상남자처럼 푹찍 찍고 끝이었다.
역시 시하가 최고다.
이게 아니지.
“다들 잘했어.”
“그럼 얘들아. 여기 거실 책상 위에 앉아보자.”
“네에~”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우리는 조르르 앉았다.
승준 엄마가 미리 해둔 반죽을 가지고 왔다.
천연분말을 이용해서 색깔이 다양했다.
단호박, 코코아, 브로콜리, 비트.
노란색, 갈색, 연두색, 분홍색, 흰색.
반죽이지만 벌써부터 맛있어 보였다.
“자. 그럼 원하는 색깔로 여러 떡을 만드는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나도 시하랑 같이 떡 하나를 가지고 주물럭거렸다.
흰색떡을 납작하게 만들고 그 위에 다른 색 떡으로 데코레이션을 하는 것이다.
나는 분홍떡을 길게 만들어 하트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하트 떡카롱.
“시하야. 봐봐. 하트야.”
“아아!”
시하도 열심히 무언가 만들기 시작했다.
역시 그림이 아니라 그런지 뭔가 엉성한 모양이다.
이게 뭘까?
“형아. 이거.”
“응? 무슨 모양이지?”
괴상하게 일그러진 모양에 검은색 동그라미가 붙어 있었다.
얼핏 보면 사람 얼굴 같은데 그건 아니겠지.
“문도~”
“어…. 문도환 삼촌 얼굴이야?”
“아아.”
시하 눈에는 문도환이 이렇게 못생겨 보였구만!
이건 문도환에게 선물하도록 하자.
아마 시하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것이다.
“잘 만드네~”
옆에 있던 승준이 자기 것도 다 만들었는지 자랑을 했다.
“시하야. 봐봐. 사커 공이야!”
“아아.”
의외로 잘 만들어졌다.
찰흙 좀 가지고 논 솜씨가 보였다.
옆에 있던 하나가 말했다.
“하나는 알리사 언니야.”
노란 떡으로 머리카락의 디테일을 살렸다.
둥근 모양 때문에 레게머리가 된 알리사였지만 아마 좋아할 것이다.
정말 아마도?
“하나야. 정말 잘했어.”
“헤헤.”
세 명이 신나게 다음 작품을 위해 손을 뻗었다.
거기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나는 일어났다.
승준 엄마도 일어나 부엌에 있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통 이렇게 그림을 뽑아서 도마에 붙여요.”
투명한 도마에 끼우더니 그대로 그림이 보였다.
천 같은 거로 감싸서 테이프로 고정한 뒤에 짤 수 있는 검은색 크림을 들었다.
“이제 색에 맞춰서 크림으로 그림을 그리시고 색칠을 하면 돼요. 펭귄은 쉬우니까 푸른색하고 눈에 검은색, 그리고 배에 흰색 크림을 쓰면 되겠네요.”
“그렇네요. 여러 색깔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나는 그림에 그려진 선을 따라서 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이렇게 칠해서 얼리면 돼요. 그렇게 빵 시트에 찍으면 완성돼요.”
“오! 그러면 지금 보이는 면의 반대편에 그림이 나오겠네요.”
“네. 다른 색 크림을 과감하게 덮어도 되죠.”
“그렇네요.”
생각보다 정말 쉬운 작업이었구나?
근데 연습은 조금 해야겠다.
선이 삐뚤삐뚤하네.
그림을 그릴 때 선 긋는 연습을 먼저 하는 것처럼 나 역시도 크림으로 그리는 걸 조금 연습해야겠다.
“그런데 승준이와 하나에게도 이렇게 케이크를 만들어 주세요?”
“생일 때만요. 가끔? 애들이 좋아하니까요.”
“와. 진짜. 대단하세요.”
“제가 좋아서 하는 것도 있어요. 저 이래 봬도 제과제빵 자격증도 있다니까요.”
“진짜요?”
“네. 한식, 일식, 중식까지.”
“헉. 요리사세요?”
“아니요. 그냥 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그게 어쩔 수 없이 따지는 거였나?
승준 엄마가 살며시 웃었다.
“사실 나중에 반찬 가게나 한번 해 볼까 싶어서 딴 거예요. 그러다 보니 재밌어서 여러 가지 따게 된 거고.”
“대단하시네요.”
알고 보니 승준 엄마는 능력자였다.
“남편 위장을 꽉 잡고 있으니 저에게 못 벗어나죠. 후후.”
“으음. 팁인가요?”
“시혁 씨도 이렇게 배워서 아내 위장을 꽉 잡으세요.”
“네? 하하.”
글쎄요.
저는 결혼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지금은 그냥 시하에 집중하고 싶을 뿐이다.
시하 위장이나 꽉 잡아야겠다.
혹시 모를 사춘기 때 밥에 대한 감사함을 알도록.
“다 됐네요.”
어느새 멋진 펭귄이 완성되었다.
이제 이걸 얼리면 되는 거겠지?
“시하도 많이 좋아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어린이날에 선물을 챙겨주지 이렇게 정성 들여 케이크 만드는 사람은 시혁 씨밖에 없을걸요?”
“네? 하하.”
나는 펭귄을 보며 말했다.
“그냥 시하에게는 어린이날이 정말 좋은 하루가 되었으면 하거든요.”
“네? 그게 무슨…….”
“아, 아니에요. 하하.”
어린이날에 좋은 기억과 아픈 기억이 항상 존재했다.
늘 생각나고 생각나는 그 시간이.
시하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행복한 기억만 간직하길.
아픔보다는 행복했던 시간이 더 많기를.
나는 바라고 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이죠?”
“네. 나중에 좀 더 연습하셔서 만드시면 될 거예요.”
“감사해요. 어린이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좀 더 연습하면 더 좋게 되겠죠.”
승준 엄마가 잠시 고민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럼 우리 어린이날에 행사 갈래요? 거기 엄청 재밌는 거 하던데.”
“어린이날 행사요?”
“네. 한강공원 선착장 앞에서 어린이날에 행사한다고 하더라고요. 그것도 이틀간.”
“와. 재밌겠네요.”
“저희 애들도 그때 데리고 가려고요. 공원도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렇네요. 저도 좋아요. 휴일이기도 하고.”
“그럼 어린이날에 놀기도 하고 마지막에 집에서 케이크도 주면 완벽한 하루겠죠?”
“정말 재밌겠어요.”
그때 시하가 나를 불렀다.
“형아~”
“응? 왜 그래 시하야.”
“이거. 이거.”
시하는 자신이 만든 것들을 보여 주었다.
승준과 하나가 말했다.
“시혀기 형아. 내 꺼도 봐~”
“시혀기 오빠. 하나도~”
다들 개성 있게 잘 만든 떡이 있었다.
“다들 잘 만들었네. 그럼 이제 포장할까?”
“아아.”
“응!”
“응!”
우리는 선물할 수 있게 포장을 하고 카드를 넣었다.
카드 밑에 내가 이렇게 썼다.
[반품은 불가합니다.]
***
-떡 증정.
[백동환]
백동환은 하얀 바탕에 노란 팔이 있는 알통 그림 떡을 받았다.
“와! 내 근육이랑 똑같은데? 시하야 고마워!”
백동환이 팔을 들어 근육을 보여 주었다.
“아아!”
여전히 근육근육한 모습.
[문도환]
문도환은 자신의 얼굴 떡을 받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기대에 찬 시하의 표정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나랑 닮았네. 딱 나야. 현실 반영 엄청나네!”
자신을 디스하는 문도환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알리사]
알리사는 하나에게 자신의 얼굴 모양 떡을 받고 기뻐했다.
“흐흥~”
여전한 콧노래를 부르며.
[황기준]
로랭스 의료 번역업체 대표 황기준은 청진기 모양 떡을 받으며 좋아했다.
“다음에 가지고 놀 수 있는 주사기를 줄게. 고맙다.”
[홍진수]
홍진수는 떡을 보며 나에게 말했다.
“시혁 씨. 그거 알아요?”
“뭘요?”
“시혁 씨가 편집자 일이랑 찰‘떡’궁합이래요. 이번에 좋은 일이 들어왔는데 같이 한번…….”
“아! 저는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떠나가는 나를 보며 홍진수가 외쳤다.
“책상 좋은 거로 주문해 둘게~ 의자도! 허먼 밀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