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49/500)

49화

어린이집에서는 연극 준비가 한창이었다.

선생님은 오늘 티켓을 만들 생각이었다.

“자. 오늘은 연극에 초대할 티켓을 만들 생각이에요. 다들 아셨죠?”

“네에!”

“여기 카드에 엄마, 아빠의 초대장을 만들 거예요. 오늘은 이름 쓰기도 도전해 봐요!”

“네에!”

이번 기회에 아이들에게 이름 쓰기를 가르치려는 선생님의 노림수였다.

“선생님이 먼저 이름을 써줄게요. 이대로 적으면 돼요. 보세요.”

원장 선생님과 함께 붙어서 애들에게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시하야. 이렇게 적는 거야. 이시하.”

“아아. 시하.”

“시하는 그래도 이름을 적기가 쉽네!”

“아아.”

시하는 글자를 적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형아. 형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형아 이름.”

시하는 형아의 이름도 적고 싶었다.

선생님이 알겠다는 듯 손뼉을 쳤다.

짝.

“형아 이름도 같이 알려줄게. 자, 봐봐. 이시혁. 이시하. 어때? 이렇게 쓰는 거야. 할 수 있겠니?”

“아아.”

시하는 이름 쓰기가 그림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따라 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글자는 처음 쓰는 거라서 글씨가 삐뚤삐뚤했다.

그림 그리는 것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ㅇㅅㅎ]

시하는 만족스러웠다.

형아의 이름과 시하의 이름의 공통점을 발견했으니까!

선생님이 그걸 보며 칭찬했다.

“와. 시하야. 글자 잘 적네? 여기 나머지도 적어 보자.”

“아아.”

도리도리.

이 뒤는 적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어필했다.

선생님은 시하의 의견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 시하 하고 싶은 거 다 해. 대신에 초대장 그림은 잘 그려야 한다?”

“아아.”

시하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역시 초대장 하면 펭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연극에 검을 쓰기로 했으니 검도 그렸다.

완성된 모습을 보니 만족스러웠다.

그때 옆에 있던 승준이 말했다.

“우와. 역시 시하는 그림을 잘 그려.”

“하나도! 하나도 잘 그려!”

“아닌데. 별로.”

“오빠 미워!”

승준의 팩폭에 하나가 삐져서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이 승준에게 주의를 줬다.

“승준아. 하나도 잘 그린 거야.”

“아닌데. 시하가 잘 그린 건데.”

하나가 울먹였다.

선생님이 이대로면 안 되겠다 싶어서 하나를 안았다.

“히잉.”

“하나야. 정말 잘 그렸어. 세상에 이런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는걸~”

선생님이 폰으로 그림을 보여줬다.

정말 이상하게 생긴 그림이었다.

승준도 뒤에서 힐끗 보더니 웃었다.

“와하하. 못생겼어!”

“하나는 이거보다 잘 그려.”

시하도 슬쩍 보다가 하나의 손을 잡았다.

“아아. 하나.”

하나를 끌고 가 초대장 앞에 앉혔다.

시하가 하나의 손을 잡고 그림을 그려 주었다.

선생님이 입가를 가리며 그 장면을 보았다.

“어머. 어머. 이 애들 봐.”

스윽. 스윽.

하나의 초대장에 쌍검이 그려졌다.

하나가 반짝이는 눈으로 초대장을 보았다.

“아아. 하나.”

“시하야. 고마어.”

“아아. 하나. 잘해.”

“나중에 시혀기 오빠에게 시집가면 잘해 줄게.”

“아아?”

시하는 여기서 형아가 왜 나오는지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끄덕.

선생님은 정말 이럴 때마다 어떻게 감정이 이런 식으로 휙휙 바뀌는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이 아이들로 연극을 할 생각을 왜 했을까?

갑자기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

***

영상 찍는 당일.

영상은 대사 때문에 짧게 짧게 찍어서 편집하기로 했다.

제목은 칠룡이 나르샤(ver.어린이)로 정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아이들이 꾸민 숲속 세트장.

집, 나무, 나비, 강아지, 알 수 없는 의문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 속에 먼저 나온 것은 이방원과 정몽주였다.

새로운 나라에 함께 만들자고 제안하는 이방원.

기존의 나라를 사랑한다고 거절하는 정몽주의 장면이다.

선생님은 이걸 그저 알기 쉽게 풀어냈다.

한마디로 어린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자. 이방원 역과 정몽주 역 준비해 주세요.”

“네!”

두 배역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이방원 역을 맡은 아이가 말했다.

“이렇게 놀고. 저렇게 놀고. 아무 상관 없지.”

그러다가 대사를 깜빡했다.

넝쿨이라는 말이 생각났지만 어떤 문장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위를 자연스럽게 둘러보다가 장난감이 쌓여 있는 상자를 발견했다.

“저기 장난감 상자에 중국산도 있고, 한국 것도 있어. 아무런 상관도 없지.”

원래라면 ‘하여가’의 일부분인 ‘만수산 드렁칡이 얽힌 것을 누가 탓하리’라는 의미였지만 뜻은 대충 비슷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입술을 꽉 깨물고 웃음을 참느라 고생이었다.

“우리 같이 장난감 갖고 놀자.”

어린이 버전으로 변형된 ‘하여가’가 영상에 담겼다.

이번에는 이를 거절하는 정몽주의 역의 단심가였다.

‘고려’라는 나라를 사랑하는 붉은 마음을 나타낸 시.

단심가.

[이 몸이 죽고 또 죽어 백번이나 다시 죽어, 

백골(白骨)이 흙과 먼지가 되어 넋이야 있건 없건, 

임금님께 바치는 충성심이 변할 리가 있으랴?]

이 시에 맞춰서 대사를 변형시켰다.

하지만 정몽주 역을 한 아이도 기억이 안 나서 대충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떠올린 것은 중국산이었다.

“나는 국산이 좋아.”

그야말로 절묘한 애국심의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내 몸이 초미세먼지가 되어도.”

“나는 국산이 좋아!”

당당하게 배를 쭈욱 내밀며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은 이 절묘한 대사에 웃겨 죽을 것 같았지만 영상을 위해 꾸욱 참았다.

마지막으로 이방원 역을 맡은 아이가 마무리를 지었다.

“그럼 대나무가 돼라. 얍!”

“으아악!”

정몽주 역을 맡은 아이가 차렷 자세로 자세를 꼿꼿이 했다.

정몽주가 피살되던 밤.

다리 옆에 참대가 솟아 나왔다고 해서 선죽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참고해 만든 대사였다.

뒤에서 지켜보던 원장 선생님은 이 황당한 연극에 입만 뻥긋거렸다.

정말 이대로 괜찮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방원이 마법사가 됐는데? 이거 역사 왜곡 아니야?’

무척 현대적이면서 판타지적인 각색이었지만 애들이 재밌어해서 별말은 안 했다.

교수와 교직원들이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괜찮겠지?’

괜히 걱정되는 원장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지켜보고 있던 와중에 드디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무사 승준과 고려제일검 이시하가 만나는 장면이었다.

이방원이 무사 승준에게 말했다.

“나는 선생님을 볼 거야. 넌 여기서 지켜. 알았지?”

“네!”

이방원이 떠나고 시하가 등장했다.

시하가 말했다.

“비켜.”

“안 돼. 여기를 지켜야 해.”

시하가 검을 뽑았다.

스르륵.

승준 역시도 검을 뽑았다.

서로가 견제하며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계속 돌았다. 빙글빙글. 계속, 계속 돌았다. 빙글빙글.

선생님이 참다못해 말했다.

“언제까지 돌 거니?”

“아아.”

“아, 맞다.”

“자, 얘들아. 다시 검을 부딪쳐야 한다?”

“아아.”

“네에~”

드디어 서로의 검이 부딪쳤다.

땅. 땅.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서로 부딪치고 제자리를 빙그르르 돌고 또 검을 부딪쳤다.

땅. 땅.

그때 척준경의 자손인 척하나가 튀어나와 쌍검을 휘둘렀다.

시하와 승준이 그걸 막았다.

땅.

뒤로 밀려나는 시하와 승준.

하나가 말했다.

“어. 어. 음.”

대사가 기억 안 나는지 잠시 망설이다가.

“날 두고 싸우지 마!”

“아?”

“엥?”

갑자기 로맨스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하나는 조아하는 사람 이써!”

시하는 배웠던 대사를 말했다.

“쓰러드려.”

다시 세 아이가 검을 휘둘렀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서로 싸우는 장면이 되었지만, 선생님은 이미 예전에 만든 대본을 포기했기 때문에 계속 영상을 찍었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 들어왔다.

드르륵.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시혁이 등장했다.

뭐가 뭔지 몰라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이 참 순박했다.

그때 하나가 싸우다 말고 시혁에게 달려갔다.

“시혀기 오빠!”

“응? 그래.”

시혁은 그런 하나를 안았다.

시하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으며 형아의 다리에 찰싹 붙었다.

“형아~”

“그래. 그래. 시하야.”

“앗! 시혀기 형아. 치사하게 하나하고 시하만 안고! 나도!”

“응. 그래. 그래.”

졸지에 세 아이를 안게 된 시혁이 곤란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시하는 품에서 자랑스럽게 초대장을 꺼냈다.

“형아. 초대.”

“응? 이거 뭐야?”

“아아. 형아. 시하.”

“어? 여기 ‘ㅇㅅㅎ’가 형아 이름이야?”

“아아. 형아. 시하.”

시하는 자신과 형아를 가리켰다.

“응?”

“가타.”

“와~ 형아랑 시하가 같네?”

“아아.”

“여기 이시하, 이시혁이네. 벌써 초성을 알다니 우리 시하 천재네.”

“아아.”

“이건 이응, 시옷, 히읗이라고 하는 거야.”

“아아. 형아. 시하.”

“하하. 맞아. 형아랑 시하 맞아.”

시혁은 기쁘다는 듯이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부러웠는지 하나랑 승준도 자신의 초대장을 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했다.

시혁이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영상으로 찍고 있던 선생님이 내레이션을 넣었다.

[이렇게 세종대왕이 세 사람에게 한글을 가르쳐 줬답니다. 끄읕~]

***

-승준과 하나네 집.

오상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생들을 가르친 뒤 개인 연구를 끝내고 집으로 왔다.

집에 있던 아내와 귀요미 쌍둥이들은 오상환을 반갑게 맞이했다.

“다녀오셨어요.”

“아빠~ 다녀오~뎠더요!”

“아빠~ 다녀와써!”

오상환에게 쌍둥이들은 언제나 삶의 활력소다.

처음 둘이 생겼을 때는 허리가 휘청일까 걱정이 들었다.

물론 지금도 휘청하지만.

그래도 애들을 보면 열심히 일한 보람이 느껴진다.

“그래~ 아빠 왔다!”

오상환이 승준과 하나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애들이 오늘따라 활발하게 손을 잡아 왔다.

“아빠. 아빠. 어서 드라마 봐야 해!”

“아빠. 아빠. 빨리!”

쌍둥이 손에 이끌린 오상환은 소파에 앉았다.

“일단 아빠 씻으면 안 될까?”

“안 돼! 안 돼!”

“하나가 열심히 해써! 안 돼!”

그때 아내가 말했다.

“그래도 아빠 손은 씻고 봐야지.”

“응!”

“응!”

아내 말은 이상하게 잘 듣는 게 조금 슬펐다.

오상환은 손을 씻은 뒤에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래. 뭘 보여준다고?”

“연극!”

“연극! 연극!”

“오~ 연극을 했어? 우리 쌍둥이들 기대되네.”

“나 멋있어!”

“하나도 머시써!”

두 아이가 재잘재잘 말하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는 동안 아내가 영상을 틀었다.

[칠룡이 나르샤(ver.어린이)]

자막과 함께 잘 만들어진 영상이었다.

뭔가 굉장히 많이 봤던 장면이라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어린이들의 예측 불가능한 대사에 빵빵 터졌다.

‘음. 그런데 하나랑 승준이는 언제 나오는 거지? 우리 애들의 비중이 컸으면 좋겠는데…….’

오상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아내와 영상을 계속 보았다.

드디어 승준이 나왔다.

“아. 저 애가 시하지?”

“어머. 승준이랑 시하랑 너무 귀엽다!”

“하나가 더 귀여워.”

“네네. 알았어요.”

그때 하나가 나오더니 황당한 대사를 한다.

[하나는 조아하는 사람 이써!]

오상환도 알고 있었다.

이시혁이라는 놈. 강인대학교 학생인 이시혁이라는 놈.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다.

“커험.”

“호호. 이거 그냥 연극이에요.”

“그래. 다른 애가 나오겠지.”

“네. 시혁 씨는 안 나올 거예요.”

하지만 오상환의 기대는 배신을 당했다.

이시혁이 나오고 하나가 조르르 시혁에게 안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혁에게 초대장을 주는 장면까지.

선생님의 내레이션으로 영상이 끝이 났다.

오상환이 말했다.

“어? 어? 초대장이 있었어?!”

“어머. 그러네요?”

“승준아. 하나야. 초대장은 어디 있니?”

승준과 하나가 말했다.

“시혀기 형아 져써!”

“시혀기 오빠 져써!”

오상환이 황당해하며 말했다.

“아니. 그걸 왜…. 아빠랑 엄마 건?”

“업써.”

“업써.”

아내는 그저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애들을 쓰다듬었다.

하여간 예측할 수 없는 말썽꾸러기들이었다.

반면에 오상환은 시무룩해졌다.

“으으. 이시혁…….”

“애들이 그럴 수도 있죠. 뭘 그래요.”

“그래도 나도 초대장 갖고 싶었는데…….”

아내가 오상환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신 오늘 제가 초대해 드릴게요.”

“어어?!”

아내의 말에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오상환이었다.

뭘 초대해 준다는 걸까?

그때 승준과 하나가 말했다.

“초대했으니 시혀기 형아가 오겠지? 시하도 오겠지?”

“시혀기 오빠가 빨리 와쓰면!”

오상환이 말했다.

“안 돼!”

“아, 왜에~”

“히잉~”

오늘도 평화로운 집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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