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우글거리는 사람들이 한순간에 빠지면 조금은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텅텅 빈 부스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니콜드가 다가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수고하셨습니다.」
「네.」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원활하게 계약을 딸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역시…….」
「줍니다. 줘요!」
「하하. 감사해요. 이렇게 큼지막한 건 다 됐으니 저는 좀 쉬어도 되죠?」
「네. 아니지. 오늘은 이만하고 들어가시죠.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 온 목표는 거의 다 이루었거든요.」
「한국에는 이제 관심 없어진 건 아니고요?」
「하하. 그건 아닙니다.」
「그럼 저 갈게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시하에게 갔다.
“시하야~”
“형아!”
“알리사 누나랑 잘 놀고 있었어?”
“아아.”
“그래? 그럼 이제 형아랑 놀까? 알리사. 알리사는 어떻게 할래요?”
“저는 패션쇼 구경을 하려고요.”
“그래요? 그럼 저도 갈게요. 시하랑 잠시 패션쇼 보고 나와야겠어요.”
“기대하셔도 좋을걸요? 이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아서.”
이번 기회에 패션에 대한 안목을 넓혀야겠다.
시하도 보는 재료들이 많아지면 좋을 것이다.
“시하야. 혹시 지루하면 나가자고 해야 한다?”
“아아.”
우리는 패션쇼를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통역사를 하는 건 굉장히 뜻깊은 시간이었다.
아직 한 번의 경험이지만 오늘 일을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시하야. 재밌었지?”
“아아.”
오늘 왔던 경험이 시하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혹시 시하를 외롭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런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시하는 내 손을 가만히 꼬옥 잡을 뿐이었다.
지루해하지도 않은 건지 아니면 지루한데 참은 건지 모르겠다.
시하는 솔직한 아이니까 지루했으면 말했겠지?
“형아.”
“응?”
“검. 검.”
“응? 갑자기 검?”
“아아.”
옆에 있던 알리사가 말했다.
“패션쇼에서 한복 입고 검을 차고 나온 사람을 생각한 거 아니에요?”
“아하. 혹시 검 갖고 싶어?”
“아아.”
오늘 일당은 아직 받지 않았지만, 꽤 많은 돈이 들어올 것 같다.
그래서 검은 얼마든지 사줄 수 있다.
두 개든, 세 개든.
“그래. 기분이다. 어서 검 사러 가자.”
“아아!”
알리사가 손을 들었다.
“저는요? 저는요?”
“오늘따라 되게 애 같은 면이 보이시네. 좋아요. 시하 돌봐준 거에 감사한 마음도 있으니까요.”
“내일도 또 와야 할 건데 저기 좋은 원단이 있어서요. 막 창작 욕구가 솟아나더라고요.”
“어떤 거요?”
“한복을 팔았던 곳 있잖아요. 비단같이 예쁜 원단이요.”
“아아. 그걸로 뭐 만들 거예요?”
“당연하죠. 애들에게 마법을 걸어준다고 약속도 했었고.”
“그 원단으로 만들 생각이시구나?”
“네. 많이 사줄 거죠?”
“으음. 비싸지만 않다면?”
“흥정은 저에게만 맡겨주세요. 흐흥흥~”
알리사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뭐, 같은 업종인데 원가로 싸게 해주겠지.
돈도 많이 벌었는데 이 정도 선물은 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애들을 위해 옷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도 좋아 보였고.
오지 못한 승준과 하나에게 좋은 선물을 하는 느낌도 들었다.
“형아~ 검~”
“그래. 검 사러 가자.”
역시 남자애라 그런지 검에 꽂힌 것 같았다.
우리는 가는 길에 장난감 가게에 들러 검을 보았다.
요즘 검은 잘 나오는 것 같았다.
옛날 무사들이 쓰는 검도 다양하게 있었다.
‘칠룡이 나르샤’라는 사극 드라마에 나온 검들도 보였다.
고려말을 배경으로 이성계를 포함한 7명의 역사적 인물들로 꾸민 사극 드라마.
칠룡이 나르샤.
그중 고려제일검 이방지라는 배역에 나오는 검을 시하가 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아아. 형아.”
“그래. 이거 사자.”
“이거 승준. 이거 하나.”
“응? 아니. 아니. 시하 꺼만 사야지.”
“형아. 시하. 돈.”
“어? 네 돈으로 산다고?”
“아아.”
끄덕끄덕.
사실 시하가 만든 패턴 무늬의 돈을 내가 받기는 했다.
나중에 시하가 번 돈이라고 보여줄 생각이었지만 벌써 자기가 번 돈인 걸 알았구나!
“시하 돈으로 산다면 형아는 말리지 않겠어!”
전에 사람들에게 딸기를 선물한 것이 생각났다.
시하는 역시 아주 착한 아이다.
이렇게 선물도 고를 줄 알고.
우리는 검을 사서 돌아갔다.
“그럼 여기서 헤어져요. 내일 봐요. 알리사.”
“잘 가요.”
집에 도착한 나는 먼저 시하를 씻겼다.
시하는 눈을 반짝이며 검을 뽑았다.
스르륵.
“아아. 형아.”
“그래. 그래. 그렇게 좋아?”
“아아.”
시하가 검을 마구마구 휘둘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릴 때의 나도 저렇게 놀았을까 싶어서.
“시하야. 검 쓰는 법을 보여줄까?”
나는 칠룡이 나르샤의 전투신을 보여주었다.
정말 멋있는지 시하가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참고로 피가 나올 것 같은 장면은 재빨리 못 보게 했다.
***
-패션 페어&섬유박람회가 끝난 다음 날.
시하는 선물할 검을 들고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다들 시하가 가지고 있는 검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아아. 승준 선물.”
시하가 승준에게 검을 내밀었다.
“우와! 시하야. 고마워! 이 검 진짜 멋지다!”
“아아. 하나 선물.”
하나에게는 쌍검을 선물해 주었다.
“우와! 두 개다! 하나는 두 개다!”
하나가 승준에게 자랑했다.
승준은 별로 부럽지 않았다.
자신의 검이 훨씬 멋있게 생겼으니까.
그리고 이건 칠룡이 나르샤에 나오는 조선제일검 무율의 검인 걸 알고 있었다.
하나의 검은 척준경의 자손이 쓰던 쌍검이었다.
시하는 애들에게 자신이 산 검을 나눠주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그런 시하를 보며 어리둥절했다.
“시하야. 웬 검 선물이니?”
“아아.”
뒤에 있던 시혁이 머리를 긁적이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시하가 이번에 번 돈으로 애들에게 선물한 거예요.”
“그래요? 이야. 시하. 착하네. 처음 번 돈으로 애들에게 선물해준 거야?”
“아아.”
끄덕끄덕.
시하도 애들이 좋아하는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선생님은 시하의 마음이 예뻐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여기서 검으로 놀면 위험하니까 뽑지 마세요. 알겠죠?”
“네!”
“여기 한쪽에 놓으세요.”
아이들이 말을 참 잘 들었다.
하지만 갖고 놀고 싶은지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시혁이 말했다.
“그럼 저는 가볼게요. 시하 잘 부탁드려요. 시하야. 형아 갈게.”
“아아. 형아. 바이바이.”
“바이바이.”
시하는 오늘도 씩씩하게 형아에게 인사를 했다.
형아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다가 시무룩해졌다.
“시하야. 놀자~”
“하나도. 하나도. 놀자!”
승준과 하나는 시하의 마음을 잘 아는지 양손을 꼬옥 잡았다.
“아아!”
시하는 친구들의 힘을 받아 기운을 차렸다.
오늘도 친구들과 힘차게 놀 생각이었다.
선생님이 그런 애들을 보다가 ‘훗훗.’ 하고 웃음소리를 내었다.
오늘도 뭔가 준비한 것이다.
“여러분!”
“네에!”
“선생님이 오늘 ‘아기 돼지 삼 형제’라는 연극을 준비해 왔어요!”
연극!
애들의 협동심을 키우고 그 배역에 한 번쯤 생각해 보게 하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바로 아기 돼지 삼 형제.
특별히 어레인지해서 만든 이 이야기는 평범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다.
“어때요! 하고 싶죠?”
“아니요!”
“아~ 왜요~ 하고 싶다고 말해 주세요~”
하지만 아이들은 만만치 않았다.
하나가 말했다.
“돼지 안 예뻐!”
탁월한 주장이었다.
승준이 거기에 말을 덧붙였다.
“유치해~ 할 거면 역시 드라마! 칠룡이 나르샤! 선생님. 칠룡이 나르샤!”
승준이 검을 힐끗힐끗 보았다.
선생님은 당황해서 어버버했다.
칠룡이 나르샤라니.
애들이 언제 그런 것을 봤단 말인가?
다른 애들도 알고 있을뿐더러 시하 역시도 알고 있는 게 충격적이었다.
뭔가 선생님의 동심이 파괴된 느낌이었다.
실제로 애들이 내용은 모르지만 검을 쓰는 장면은 알고 있기에 나온 것이었다.
“그래! 칠룡이 나르샤 하자. 선생님이 사실 드라마 작가가 꿈이었어.”
그 모습을 원장 선생님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봤다.
대체 언제 드라마 작가였니?
동화 작가가 꿈이었잖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했다.
“이번 연극은 촬영해서 부모님께 보여줄 거예요. 저 이만큼 잘했어요! 하고 말이죠. 알겠죠?”
“네.”
“그럼 무대 만들기부터 해 볼까요? 이거 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이야기를 만들어 볼게요.”
“네!”
대답은 잘하는 아이들이었다.
선생님이 미리 준비한 아기 돼지 삼 형제의 소품을 꺼냈다.
인쇄한 잔디 그림과 집 그림들.
“자. 여기에 색칠하거나 그림을 그리면 돼요. 이게 연극을 할 때 배경이 될 거예요. 알았죠?”
“네!”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애들에게 뿌듯한 성취감을 줄 수 있다.
선생님이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애들이 크레파스로 열심히 색칠했다.
지루할지도 몰라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라고 했으니 아마 잘할 것이다.
이제 재빠르게 대본을 생각해 봤다.
칠룡이 나르샤 애들 버전.
대사는 간단히 만들고 전투신은 조금 많이 넣을 생각이었다.
이건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조금 각색을 하면 완벽한 이야기가 탄생할 것 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무언가 만들고 있을 때 알리사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응? 어쩐 일이에요?”
“하나랑 승준이 변신시켜 주고 싶어서 샘플을 만들었거든요. 일단 입혀보려고요.”
그 말을 들은 승준과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나 오늘 마법 걸려줄 수 있는데!”
“하나도. 하나도! 마법!”
그 뒤로 시하도 참여했다.
“아아. 시하도.”
알리사가 살며시 웃었다.
가지고 온 종이가방을 뒤적거리며 옷을 공개했다.
“짜잔!”
펄럭.
멋들어진 한복이 펼쳐졌다.
전통적인 한복이 아니고 개량한 모습이었는데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았다.
승준이 흥분해서 말했다.
“와! 무사 옷이다. 무사 옷!”
“하나는? 하나는?”
“아아. 시하도!”
선생님은 그 옷을 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상도 갖춰졌네요!”
그 말에 알리사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네?”
“알리사. 하나 옷도 만들고 시하 옷도 만들 건가요?”
“네. 시하는 만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에 그냥 만들어보려고요.”
“그래요? 그럼 저희가 사극 드라마를 연극을 할 건데 다른 애들 옷은 만들기 좀 그렇죠? 혹시 빌리는 데 있어요?”
“아하하. 일곱이면 금방 같은 거로 만들어드릴게요. 어차피 이 옷은 제출용하고 판매용으로 만들어 보려고요. 반응 좋으면 또 제작하고요.”
“정말요! 잘됐네요!”
선생님은 머리가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각색할 때 좋은 윤활유가 될 것 같았으니까.
시하는 그런 선생님을 보았다.
왠지 몸에서 열기가 뿜뿜 나오는 것 같았다.
“아아.”
시하가 선생님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응? 시하야. 왜에?”
“아아. 시하. 고래제이검.”
“으응?”
“시하. 고래제이검.”
선생님은 한참 생각하더니 무언가 번쩍 생각이 났다.
“고려제일검 이방지가 하고 싶다고?”
“아아.”
“음. 알겠어요. 선생님이 참고할게요.”
“아아.”
승준이도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나, 나! 무사 무율~~”
“응. 참고할게.”
“하나도. 하나도. 척, 척, 척!”
“응. 하나도 참고할게요. 선생님이.”
다른 애들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말해서 정신이 없었다.
선생님은 울고 싶어졌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정말 연극은 성공할 수 있을까?
“자! 자! 선생님이 잘해 줄게요. 그러니 색칠마저 하세요!”
“네에!”
애들이 다시 그림에 색칠을 칠하기 시작했다.
시하도 노란 크레파스를 들고 풀 위에 나비를 그렸다.
철쭉을 봤던 그 예쁜 나비.
색칠은 하지 않고 열심히 나비를 그리며 배경 소품을 꾸몄다.
검 선물로 생긴 풍파가 이렇게 나비효과가 되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