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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44/500)

44화

우리는 돗자리에 누워 푸른 잎사귀를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가 우리를 감싸 기분이 좋았다.

“시하야. 어때? 시원하지?”

“아아.”

“그런데 배 안 고파?”

“아아.”

끄덕끄덕.

나는 그런 시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싸온 도시락은 볶음밥.

김치볶음밥을 하고 싶었지만, 아직 시하가 매워할 거 같아서 그냥 볶음밥을 했다.

“짜잔!”

“아아!”

내가 도시락을 보여주자 시하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내가 이걸 보려고 오늘 열심히 요리했지.

옆에 있던 승준과 하나도 군침을 흘렸다.

“맛있겠다!”

“시혀기 오빠. 하나도 먹고 싶어.”

“그래. 같이 먹자.”

승준 엄마가 구석에서 쓸쓸하게 도시락을 꺼냈다.

“나도 오늘 열심히 김밥 쌌는데…….”

“하하. 같이 먹어요. 와! 김밥 엄청 맛있겠는걸요?!”

“아직 도시락 뚜껑도 안 열었어요.”

“안 봐도 다 보이는 법이죠. 하하.”

우리는 그렇게 도시락을 먹었다.

오물오물.

시하가 숟가락으로 열심히 밥을 먹었다.

나는 승준 어머니가 싸 온 김밥을 먹었다.

애들의 관심은 노란 오믈렛에 싸인 볶음밥에 관심이 집중되었으니까.

“시하야. 맛있어?”

“아아. 마시써.”

“시혀기 형아가 우리 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시혀기 오빠. 우리 지베 사라?”

나는 그 말에 볼을 긁적였다.

“가족이 아니라서 그건 좀 힘들겠는데?”

하나가 눈을 반짝였다.

“시혀기 오빠. 하나랑 결혼하면 돼. 신혼지비야.”

옆에 있던 승준 엄마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는 조금 곤란해하며 대답을 피했다.

너랑 결혼하면 큰일 나요.

도둑놈보다 쓰레기 소리를 듣게 되겠지.

옆에서 김밥을 먹던 송택수가 말했다.

“요즘 애들은 굉장히 뭐랄까? 다 알고 말하나?”

“글쎄요? 선생님도 자식들이 있으시잖아요.”

“다 자기들 살림 꾸렸어. 뭐 어릴 때 귀여운 면이 있기는 했지. 근데 요즘 애들하고 좀 달랐어. 물론 비슷한 점도 많지만.”

“그런가요? 저희 시하 정도?”

“시하는 너무 느린 것 같아서…….”

“아하하. 그래도 귀엽잖아요.”

“귀여우면 다 용서가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귀엽긴 하지.”

역시 시하의 귀여움을 알아주실 줄 알았다.

“대충 먹고 나는 산책이나 하려 하는데 같이 가겠나?”

“아. 애들도 같이요?”

“여기가 놀기 좋기는 하겠지만 같이 돌아다니며 보는 것도 재밌거든. 사실 집에 들를 생각이야.”

“와. 송택수 선생님 집에 가보고 싶네요.”

“내 집 마당에 그네도 있지. 애들도 좋아할걸?”

“그네요?”

왜 집에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마당도 있고 부자셨다.

하긴 무협이라는 작품만 해도 그 당시에 엄청 벌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이것만 먹고 같이 가시죠.”

“그래. 차도 마시고 좋지. 뭐.”

우리는 밥을 다 먹고 정리하며 송택수 선생님 자택으로 향했다.

정말 마당이 있는 집에 그네가 있었다.

나무로 되어 있고 성인 세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크기였다.

세 아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형아.”

“응. 그네는 처음 보지? 자. 타 보자.”

세 아이가 조르르 그네에 앉았다.

나는 뒤에서 밀어주었다.

흔들흔들.

휴식용으로 돼서 그런지 놀이터에 배치된 그네처럼 막 높이 올라갈 수 없었지만, 애들은 이거라도 재밌나 보다.

“와아! 난다!”

“하나가 떠 있어!”

“아아. 형아!”

그런 애들의 소란스러움 때문인지 마당으로 나오는 여성이 계셨다.

송택수가 말했다.

“여보. 나왔어.”

“왜 왔어? 아예 밖에서 살림을 차리지…….”

“하하. 손님도 있는데.”

“그렇게 눈치 볼 거면 나가지 말던가? 엉?”

“하하.”

아주 잡혀 사시는구나?

그래도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정다워 보여서 좋았다.

“안녕하세요. 얘들아. 인사해야지.”

다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그녀가 애들을 힐끗 보더니 살며시 웃었다.

“잘 왔어요. 밥은 먹었어요?”

“네. 맛있는 도시락을 먹고 왔거든요.”

“그럼 차나 한잔 들어요. 딱 보니 차 한잔하러 온 거 같으니.”

눈치가 귀신이었다.

승준 어머니는 택수 선생님의 아내분을 도와주러 자리를 떠났다.

차는 금세 나왔고 우리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시하와 애들은 옆에서 주스를 꼴깍꼴깍 마셨다.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하야.”

“아?”

“할머니야. 할머니.”

“하머니?”

“할머니.”

“하머니.”

“응. 할머니라고 하면 돼.”

“아아. 하머니.”

시하가 할머니를 보았다.

“하머니~”

“응? 왜 그러니?”

“아아.”

“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구나.”

“아아.”

“그래. 몇 살이니?”

시하가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아직 숫자를 모르네? 할미가 가르쳐 주꾸마. 자, 따라 해 봐라.”

“아아.”

할머니가 손가락 한 개를 폈다.

“하나.”

“하나.”

“둘.”

“두울.”

“서이~”

“서이~”

“너이~”

“너이~”

그걸 듣고 있던 나는 입에 머금은 차가 목에 걸렸다.

캑캑.

옆에 있던 송택수가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보. 서이, 너이는 표준어가 아니야.”

“아. 맞다! 나도 모르게 사투리가.”

하지만 이미 시하에게 입력이 다 됐는지 시하가 손가락을 세 개를 보여주며 말했다.

“형아.”

“응.”

“시하. 서이~”

“아…. 셋이라고 하는 거야. 셋.”

“서이~”

시하가 서이를 습득했다.

아, 안 돼. 이러다 사투리랑 표준어랑 섞이겠어!

그런데 손가락으로 ‘서이~’라고 발음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정신 차리자.

이때야말로 교육의 중요성을 발휘할 때다.

“자. 셋이야. 시하는 세 살이야.”

“서이~ 살~”

“응용이 좋구나! 시하는 천재야!”

옆에 있던 송택수가 말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

실컷 놀아서 그런지 애들이 손을 잡고 자고 있었다.

나는 그런 시하를 살며시 보다가 방을 빠져나왔다.

마당에 있던 송택수가 말했다.

“한창 뛰어놀더니 또 자는 게 애들이지.”

“그러게요. 또 일어나서 놀려고 하겠죠.”

“다 어릴 때는 그런 거지. 그런데 번역은 잘되나? 전에 유학생들의 반응이 괜찮기는 했는데.”

“아. 그건 원작을 살리는 방향으로 잘 적고 있어요. 뭐 인기가 있을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요.”

“인기가 있어야 할 텐데…….”

“팔리면 좋은 거고 안 팔리면 어쩔 수 없죠. 일단 5권까지 번역이 다 되면 풀린다고 하니까요.”

“그래?”

“선생님은 모르셨나요?”

“나야. 뭐. 신작을 쓰고 있으니 구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심이 적긴 하지.”

“그러시구나…….”

이야기하면서 나는 뭔가 궁금한 게 생겼다.

“어째서 신작을 쓰기로 갑자기 마음을 먹으신 건가요?”

“궁금하나?”

“네. 듣기로는 뭔가 좋은 게 떠올라서 그렇다는데 제가 봤을 때는 그게 아닌 거 같아서요.”

“하하하. 그래? 그렇게 보였단 말이지?”

“네.”

가만 보면 아이들을 위한 체험농장이라던가 철쭉이 예쁜 장소라던가 집 마당에 있는 그네라던가.

이런 사소한 것들에 송택수의 손길이 묻어 있는단 걸 알 수 있었다.

이미 장성한 자식들이 있을 텐데 왜 이런 일을 하는 건지도 궁금했다.

혹시 신작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송택수가 그네를 지긋이 보았다.

“내 자식들이 어릴 때 그네 타는 것을 참 좋아했지. 지금은 커서 자주 오지도 않아. 자기 살림 차렸단 거겠지.”

“뭐,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자식은 부모의 품을 벗어나는 게 당연한 거니까.”

나는 시하를 생각했다.

시하도 언젠가 내 품에서 벗어나겠지.

아니. 그 전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로 시하를 품에 안고 있는 걸까?

제대로 된 울타리를 만들어주고 있는 걸까?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마라.”

“네?”

“시혁이 너를 처음 봤을 때 참 묘했어.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거든.”

“제 얼굴에 그늘이 있는 건 알고 있었어요.”

“관상은 과학이지. 살아온 세월에 따라 얼굴이 달라진단다. 너는 아직 늦지 않았어. 시하를 소중히 여기고 함께 웃으며 살아.”

“네. 감사합니다.”

“크흠. 이야기가 빠졌네. 왜 신작을 쓰냐고 했지?”

“네.”

“이 늙은 나이에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증명이요?”

송택수가 마당을 보며 턱을 괴었다.

“자식들을 만나면 애들이 날 뒷방 늙은이 취급한단 말이지. 이제 농사는 그만둬라. 용돈도 많이 주겠다. 뭐 그런 거.”

“좋은 거 아닌가요?”

“뭐. 아내는 좋아하지. 하지만 난 아니야.”

송택수의 눈이 맑게 보였다.

“난 아직 늙지 않았어. 농사도 내가 좋아서 하는 거고 글도 내가 좋아서 하는 거지.”

“그러시구나.”

사실 잘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송택수 선생님의 가슴에는 뜨거운 열정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나중에 양로원에도 데려갈 기세더라.”

“아, 요즘 좋지 않아요?”

“좋기는. 그리고 나 아직 안 늙었어! 팔팔하다고!”

“제가 봐도 그래요.”

나는 살며시 웃었다.

송택수도 피식 웃음을 보였다.

“웃기는. 아무튼, 이번 글을 써서 아비가 아직 안 죽었다는 걸 보여주려고. 아직도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거겠지. 내가 너무 추한가?”

“아니요. 전혀요.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래?”

“네. 저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라서 잘 알고 있어요. 아버지는 일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어요. 그게 저를 위한 일이라는 걸 저는 5살 때부터 알고 있었죠.”

“너무 일찍 알았네. 그 나이 때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하는데.”

“그런가요? 하하. 아무튼, 저는 아버지가 저랑 놀아주는 시간이 적어도 좋았어요.”

“좋은 아버지구나.”

“네. 전 어머니의 품보다 아버지의 품이 더 따뜻하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

송택수가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번역 말고 다른 일도 하니?”

“네! 이번에 통역 일을 맡게 됐는데 정말 재밌을 거 같아요.”

“그래? 아버지가 원래 통역사라고 듣기는 했지.”

“그래서 더 기대되는 것도 있어요. 하하. 드라마에서 나오는 거랑은 다르죠?”

“응? 뭐가?”

“드라마에서는 자주 나오잖아요. 의사 집안이면 의사가 되어야 한다. 막 강요하고. 저는 자발적으로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있잖아요.”

“하하. 뭐 구도만 보면 그렇지. 하지만 네가 선택했다는 점에서 다른 거지.”

“그럴까요?”

“그렇지. 아마 아버지도 좋아할 거다.”

나는 하늘을 보았다.

오후에 따뜻한 햇볕이 나를 감싸는 느낌이었다.

“저는 선생님처럼 시하를 잘 키울 수 있을까요?”

“내가 농사를 해봐서 아는데 힘들어. 자식 농사는 더 힘들지.”

“농사 많이 힘들어요?”

“힘들지. 어디 농사가 잘되는 것만 신경 쓸 수가 없거든. 이번 시장은 농업에 관련해 어떤 정책을 내놓았는지도 일일이 확인해야 하고, 납품은 어디다 할지 발로 뛰어야 하지.”

“그렇구나.”

“농사가 편하다고 하는 놈들은 머리가 꽃밭인 놈들일 거다.”

“그런데 그게 좋으세요?”

송택수가 피식 웃었다.

“좋지. 거래처 따내고 내가 키운 농산물들이 팔려 나가면 성취감이 장난 아니거든.”

“영업직이네요.”

“내가 봤을 때 영업이 필요하지 않은 일은 없어. 소설도 플랫폼과 출판사 간의 영업력이지.”

“그렇긴 하죠. 거기에 관한 트러블도 생길 거고.”

“은근히 마음이 좁아서 사이가 안 좋아지는 경우도 많지. 트러블은 인생에 필수야. 그런데 넌 잘 헤쳐나갈 거다. 시하가 웃는 모습을 보면 알아.”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하가 웃는 모습 못 보셨을 텐데요?”

“정정하지. 밝은 모습. 그것만 봐도 잘하고 있는지 나오지.”

정말 그런 걸까?

그런 말을 들으니 나는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시하를 밝게 만들어주자.

“시하 깨면 갈게요. 시간도 늦으면 돌아가기 힘드니까요.”

“이왕이면 자고 가. 방 많아.”

“아하하.”

그때 전화가 왔다.

[니콜드]

나는 전화를 받았다.

“Hello.”

「시혁 씨…. 하아…. 큰일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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