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500)

43화

알리사가 진짜 지갑에서 달러를 꺼냈다.

나는 어이없어하며 알리사를 말렸다.

“알리사. 시하가 무슨 뜻인지 모르고 말한 거예요.”

“저도 농담이었어요.”

알리사가 싱긋 웃으며 지갑에 달러를 넣었다.

설마 지갑에 달러가 있을 줄이야.

“아아. 형아. 리사.”

“응. 그래. 알리사 누나네.”

“아아.”

“그런데 알리사. 어디를 데려다 달라고요?”

“시혁이 말했잖아요. 이번에 패션 페어&섬유박람회가 있어서 기본적인 용어를 알아야겠다고.”

“그랬죠.”

“저도 거기 가고 싶어요.”

알리사의 눈이 반짝였다.

하긴 패션디자인과 학생이라면 한 번쯤 가볼 만하지 않나 싶었다.

“패션디자인과 학생들은 이런 데 많이 가지 않아요?”

“잘 몰라요.”

“뭐, 모를 수도 있죠. 별로 어렵지 않아요. 신청만 하면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는 거로 알고 있으니까요.”

“일반인도 바이어의 세미나나 그런 걸 볼 수 있어요?”

“으음…. 제가 기억하고 있기로는 기업체 관계자가 아니면…….”

“그러니까요.”

역시 이런 걸 보고 싶었나 보다.

“그럼 제가 부탁해 볼게요. 대신에 저 공부할 때 많이 도와줘야 해요?”

“좋아요.”

시하가 눈을 비비며 달을 가리켰다.

“형아.”

“응?”

“예브다.”

“어. 달이 예쁘네.”

그때 알리사가 자신을 가리켰다.

“시하. 알리사는?”

“리사. 예버.”

“흐흥~”

나는 콧노래를 부르는 알리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좋을까?

아무리 그래도 시하는 줄 수 없다.

“알리사. 이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혁. 우리 집에서 맥주 한 캔 할까요? 아직 밤은 길잖아요.”

“응. 아니야. 달밤에 체조하지 말고 돌아가요.”

“Yes라는 거예요? No라는 거예요?”

잊어 버리고 있었네.

알리사가 외국인이었지.

“No!”

알리사가 활짝 웃었다.

“나 알아! 이거 한국말로 단호박이라는 거죠?”

“형아. 호박 아냐.”

시하가 그 말을 하고 내 다리를 잡았다.

알리사가 그 말에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아하하. 맞아. 시혁은 호박이 아니지. 미안해. 시하야.”

“아아.”

“그럼 형아는 어떤 거야?”

“아아.”

시하가 하늘을 가리켰다.

“달?”

도리도리.

“별?”

“아아.”

나는 감동했다.

시하가 나를 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형아의 마음을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한다.

정말 귀엽다.

“시하야~”

“아아. 형아.”

우리는 그렇게 잠시 수다를 떨다가 헤어졌다.

***

싱그러운 봄.

꽃들이 만개하며 다들 밖에서 휴식을 취하는 계절이었다.

이 좋은 날에 나는 번역과 패션 공부, 그리고 니콜드가 보내준 자료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봄바람은 나와 시하를 비껴가지 않았다.

택수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지금 농장 근처에 철쭉꽃이 멋들어지게 피었으니 구경 오지 않겠냐는 권유였다.

시하에게 좋은 추억이 될 거 같아서 나는 곧바로 가겠다고 했다.

“시하야. 오늘 꽃구경 가는 거야. 형아가 벚꽃 축제 같은 데를 데려가고 싶었는데 다음에 데려다줄게.”

요즘 너무 바빠서 벚꽃 구경 갈 생각을 못 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철쭉이라도 보러 갈 생각이었다.

철쭉 역시 벚꽃에 밀리지 않고 예쁘다.

특히 시하의 사진을 찍을 때 좋은 장면이 나올 것 같아 벌써 흐뭇한 마음이었다.

“준비 끝났어?”

“아아.”

시하는 자신의 펭귄 가방을 메었다.

여전히 펭귄을 사랑하고 있었다.

“오늘은 승준이와 하나도 같이 가니까 재밌을 거야.”

“아아.”

시하도 기대되는지 벌써 신발을 신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아가 빨리 준비할게.”

나는 싸놓은 도시락과 돗자리를 챙기며 신발장으로 갔다.

“시하야. 이제 가자.”

“아아.”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택수 선생님 댁으로 출발했다.

이렇게 신세 져도 되나 싶지만 먼저 초대를 해 줬으니 감사히 이 기회를 즐기자.

어느새 농장에 도착한 나는 승준과 하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승준 어머님.”

“안녕하세요. 시혁 씨.”

“오늘 날씨가 좋네요. 애들이 좋아하겠어요.”

“그러네요. 이렇게 같이 놀러 갈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애들이 시혁 씨를 많이 좋아하잖아요.”

“하하. 그러게요. 왜지?”

“아무래도 시하랑 찰싹 붙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따뜻해 보이니까요.”

“그런가요?”

나는 그런 거 못 느끼겠는데 다른 사람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보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나는 언제나 시하에게 따뜻한 느낌을 주는구나.

“그럼 갈까요?”

“그래요.”

“시하야. 가자.”

시하는 이미 승준, 하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승준이 말했다.

“여기 딸기 맛있었는데!”

“아아.”

“하나도. 하나도 마시섯써!”

“아아.”

딸기 얘기로 꽃피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때 그 딸기가 안 잊히는 거겠지.

조금 걷자 택수 선생님이 마중 나오셨다.

“어서 오세요. 시혁이도 어서 와라.”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은 무슨. 그냥 할아버지지.”

“아하하. 저한테 할아버지는 아니잖아요. 시하라면 몰라도.”

“그건 그렇지. 자, 가자. 여기에 명당이 있거든.”

조금 자리를 옮기자 정말 철쭉이 멋들어지게 핀 것이 보였다.

붉디붉은 철쭉을 보며 송택수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멋지지?”

“네. 정말 예뻐요. 시하야. 너도 그렇지?”

“아아!”

시하도 꽃이 예쁜지 눈을 떼지 못했다.

옆에 있던 승준과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승준이 말했다.

“와! 빨간색!”

“예뻐! 엄마. 엄마. 하나 사진 찍고 시퍼!”

그 말에 시하도 사진을 찍고 싶은지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형아.”

“응? 시하도 사진 찍고 싶어?”

“아아.”

“그래? 그럼 저 앞에 서 볼까?”

“아아.”

시하가 철쭉 앞에서 섰다.

“시하야. 앉아봐. 그래야 더 예쁘게 나와.”

“아아.”

그때 승준이 시하 옆에 철썩 붙었다.

“나도 시하랑 같이 찍을래!”

“아아!”

역시 승준을 데리고 오길 잘했다.

“하나도. 하나도!”

“그래. 너희 셋 다 앉아봐. 자, 이렇게 꽃받침 포즈를 하는 거야. 꽃받침.”

하나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며 턱을 손에 얹었다.

승준은 혀를 내밀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고, 시하는 꽃받침을 했는데 손은 브이 자를 그리고 있었다.

이시하. 브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과연 지조 있는 남자.

옆에 있던 승준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어휴. 승준이는 맨날 사진 찍을 때 헤! 하는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니까요. 그게 재밌나 봐요.”

“하하. 어린 남자애들이 다 그렇죠. 뭐.”

“시하는 안 그러잖아요.”

“시하도 맨날 저렇게 브이 자만 해요.”

진짜 사진만 보면 브이 자를 안 한 게 없다.

역시 사진은 브이지!

제일 무난한 포즈라는 건 인정한다.

아무튼, 귀엽다.

“시혀기 형아! 빨리 찍어! 힘들어!”

“하나도 힘들어!”

“아아!”

아, 맞다.

귀여움에 빠져 사진을 안 찍었네.

“아, 미안. 미안.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김치~”

찰칵. 찰칵. 찰칵.

“그럼 다른 포즈로 한 번 더 찍을까?”

나는 다른 포즈로 한 번 더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다 찍고 나니 애들이 본격적으로 꽃구경이 시작했다.

나는 가지고 온 돗자리를 나무 밑에 깔았다.

그늘이 있고 조금 서늘한 곳이어서 앉아 있을 만했다.

“여기 앉으세요.”

“고마워요.”

“고맙네.”

승준 엄마와 송택수가 앉았다.

“선생님은 계속 여기 계실 건가요?”

“나도 조금 쉴 때가 있어야지. 집에 가봤자 아내에게 잔소리만 들어.”

“아하하. 선생님도 잔소리를 들으시나 보네요.”

“나도 사람이고 남편이라는 거지.”

옆에 있던 승준 엄마가 그 말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평화롭게 애들이 노는 걸 지켜보았다.

***

시하는 승준과 하나를 번갈아 보았다.

“승준.”

“어. 시하야.”

“하나.”

“응. 왜?”

시하가 손으로 철쭉 하나를 가리켰다.

살랑살랑.

나비가 꽃에 앉아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이들이 눈을 크게 뜨며 좋아했다.

“와! 나비다!”

“하나도 나비 본 적 이써!”

“아아. 나비!”

시하는 나비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흰 날개가 날갯짓하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따라가자!”

“하나도 따라갈래.”

“아아.”

그때 뒤에 있던 형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 가면 안 돼!”

승준이 혀를 찼다.

“쳇. 그럼 할 수 없지. 오늘은 꽃이랑 놀자.”

“오빠. 머 하고?”

“아아?”

승준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꽃을 모아서 꽃가루를 만들 거야. 이렇게.”

승준이 두 손으로 하늘을 향해 던지는 시늉을 했다.

“하나는 가수고 시하와 나는 꾸며주는 사람이야.”

승준이 생각한 것은 티비에서 본 아이돌의 영상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꽃가루를 생각해서 나온 발상이었다.

하나가 눈을 빛냈다.

“하나 아이돌이야?”

“응.”

“아아.”

아이들의 꽃을 툭툭 꺾어서 두 손에 모았다.

시하도 다섯 개. 승준도 다섯 개.

“다 됐다!”

조그마한 손이라서 다섯 개도 많았다.

“그럼 하나 노래한다?”

“어!”

“아아.”

하나가 노래를 시작했다.

“시가늘 지나서 시대를 너머서. 그대를 디켜주 테니~”

아주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는 하나의 머리 위로 철쭉이 뿌려졌다.

시하도 열심히 철쭉을 뿌렸다.

떨어지는 붉은 꽃잎을 보며 시하는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때 송택수가 애들을 불렀다.

“꽃 함부로 꺾으면 안 돼요. 얘들아. 할아버지에게 와 봐라. 내가 철쭉에 대해 재미난 이야기를 해 줄게.”

시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손을 털고 다가갔다.

승준과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승준이 말했다.

“할배. 무슨 이야기.”

승준 엄마가 머리를 쥐어박았다.

“할아버지에게 할배가 뭐야. 할배가.”

“악! 어제 삼촌이 할배라고 했는데!”

승준 엄마가 중얼거렸다.

“어휴. 이모하고 삼촌이 애들 말을…. 문디자슥하고 지지배도 애들이 따라 하던데…….”

승준 엄마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아무튼, 할아버지라고 해야 하는 거야. 알겠지?”

“응. 할아버지. 무슨 이야기해줄 거예요?”

송택수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 철쭉이라는 꽃에 관해서 이야기해 줄게.”

“에이. 재미없어.”

“꽤 재밌을걸?”

시하가 송택수의 바지춤을 잡았다.

“아아.”

“그래. 시하는 궁금한가 보구나. 그럼 이야기해 줄게요. 흠흠.”

송택수가 하나의 옷에 붙어있는 철쭉을 잡았다.

“옛날에 어여쁜 달님과 잘생긴 별님이 있었어요. 둘은 서로 너무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근처에 사는 악당이 달님을 가지고 싶어서 별님을 헤칠 계획을 하죠.”

“흐흐흐. 이제 달님은 내 것이다!”

“악당은 별님을 칼로 공격했습니다.”

하나가 소리쳤다.

“안 돼!”

송택수가 살며시 웃었다.

“하지만 별님은 입을 크게 벌리고 칼을 꿀꺽 삼켰어요. 그리고 칼을 가진 무사로 변신해서 악당을 물리쳤습니다.”

“내 칼을 받아라.”

“크헉!”

“그렇게 별님과 달님은 예쁜 사랑을 하며 결혼을 했습니다. 그걸 본 색 없는 꽃이 얼굴이 빨개지며 붉은 철쭉이 되었답니다. 그래서 철쭉은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죠.”

송택수가 붉은 철쭉을 흔들었다.

다행히 해피엔딩이었다.

시하는 반짝이는 눈으로 철쭉을 바라보았다.

“사랑.”

“그래. 시하야. 사랑이란다. 자. 소중히 해야지.”

“아아.”

“그러니까 이렇게 꺾으면 빨간색이 없어져요. 봐봐. 벌써 힘이 없지?”

“아아.”

시하가 철쭉을 살며시 손으로 잡았다.

꽃의 소중함을 아는 듯이 쓰다듬었다.

“아파. 미안.”

옆에 있는 승준과 하나도 꽃을 쓰다듬었다.

“미안해.”

“하나도 미안해.”

어른 세 명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봤다.

그때 시혁이 송택수 귀에 작게 말했다.

“원래 그런 내용 아니잖아요.”

“오. 이 이야기를 알고 있나?”

“하하. 전설 쪽도 몇 개 알고 있죠.”

실제로 별님은 죽고, 달님은 슬퍼서 칼로 자결한다는 내용이었다.

별님과 달님이 죽으며 흘린 피가 철쭉꽃으로 변했다는 전설.

그런 슬픈 이야기였다.

하지만 송택수가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바꾼 것이다.

그걸 본래 색 없는 철쭉이 발그레해지며 색을 찾았다는 내용으로.

“원래 이야기는 변해가는 거지.”

“저도 해피엔딩이 좋아요.”

시혁은 시하를 보았다.

세 명의 아이는 꽃이 많이 있는 곳에서 떨어진 꽃을 한데 모아 같이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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