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처음 들어왔을 때 니콜드의 인상은 조금 날카로웠다.
눈매 때문인 거 같았다.
웃는 모습을 보니 인상이 또 다르다.
날카로움은 벗겨지고 반달처럼 눈이 휘었다.
아마도 거래할 때 이런 인상이 좋은 이득으로 돌아왔지 않을까?
뭐 느낌일 뿐이지만.
‘뭔가 시험해 보는 것 같네…….’
나는 니콜드의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계획을 세웠을 때부터 조금씩 섬유와 패션에 관해서 기본적인 공부는 해 왔다.
정확히는 도서실에서 자료들을 빌려서 속독했다.
문제는 전문 영어 단어.
그걸 위해서 따로 영어사전은 찾아보지 않았다.
미리 정보를 입력해서 영문으로 된 문서를 찾아봤으니까.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기본적인 거라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기초적인 것을요.」
「그렇습니까?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 대화는 통하겠군요.」
「네. 전문용어는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통역사의 능력은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하하. 그렇겠죠. 그래도 어느 정도 상식은 있어야 통하지 않겠습니까?」
「그거야말로 걱정하지 마세요. 패션 용어들은 이미 영어나 일어가 대부분이더라고요.」
「한국은 일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지도 모르겠군요. 바로 옆에 있으니.」
아마도 뼈아픈 역사가 있어서 영향이 많지 않을까 싶지만.
나는 먼저 궁금한 것을 던졌다.
일단 대화는 통해야 하는 것을 증명해야 하니까.
「이번 패션 페어에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대략적인 거라도 좋습니다.」
「그렇네요. 저희 하비니스는 총 4가지 소재로 옷을 준비했습니다. 그에 맞는 섬유 기술도요. 패션 페어와 함께하는 섬유박람회도 참가할 겁니다. 거기 세미나 역시도.」
「4가지 소재라…….」
생각보다 많은 준비를 해서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역으로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말씀하세요.」
「옷은 패턴을 짜는 게 중요하죠. 실제로 패턴을 짜는 방법에 대해서 사진을 찍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보통 패턴이라고 하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옷에 들어가는 그림.
예를 들면 줄무늬인 스프라이트, 호피 무늬 같은 레오파드, 플라워 패턴 등이 있다.
두 번째, 옷의 모양.
봉제하는 방식과 순서라든가 평범한 티셔츠가 아니라 다양하게 꾸민 옷의 디자인을 말한다.
여기서 니콜드가 말한 건 두 번째를 말한다.
아직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대충 어떤 말을 원하는지 알 거 같았다.
「원단의 구분 같은 건 알고 있습니다. 환편기로 짠 직물, 직기로 짠 우븐 같은 걸 말하려고 하시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 안에 소재가 중요하죠. 우리는 이번에 독일의 기술을 라이센스해서 섬유에 적용했습니다.」
니콜드가 패드에 자료 하나를 들이밀었다.
「이건 저희가 세미나 때 쓸 자료입니다. 혹시 알아보시겠습니까?」
화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신 나노바이퍼 기술]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어떤 기술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른 말로 돌려야 할까?
아니다. 이건 이해의 영역이었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그걸로 바이어들에게 설명이 가능하냐?
그걸 물어보는 것이다.
공부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럴 거면 다른 통역사를 구하지 굳이 나를 고용하지 않을 것이다.
‘재밌네.’
재밌었다.
왠지 서로가 서로를 시험해 보는 이 교류와 대화가 조금 신비하게 다가왔다.
그때 시하가 내 품으로 파고들어 왔다.
“형아.”
“응? 아. 시하야. 다 먹었어?”
“아아.”
시하가 내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뭔가 신기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쳐다볼까?
「잠시만요.」
「네. 편하게 하세요.」
“시하야. 왜?”
“아아. 형아.”
시하가 내 눈동자를 가리켰다.
‘뭐지?’
시하는 뭘 말하는 것일까?
“많이 피곤해? 형아 품에서 좀 잘래?”
“아아.”
도리도리.
시하가 다시 패드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PPT에 첨부된 옷 패턴이 신기해 보이나 보다.
“이거 보고 싶어?”
“아아.”
나는 살며시 웃으며 그림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무언가 번쩍이며 머리를 강타했다.
번역 자료들이 머리에 범람하며 부상했다.
그중 떠오른 것은 의료기기 장비에 추가되어있는 기술들이었다.
[무기질 초박막 코팅]
여기 적혀 있는 나노웨이퍼를 이용한 기술과 하등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독일의 기술 중에 하나.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번 대화는 아주 훌륭하게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잠시 멈춘 대화에서 회를 집어 먹는 니콜드를 보았다.
「니콜드.」
「네.」
「좋은 기술을 넣으셨네요. 옷에 무기질 초박막 코팅을 하다니요. 괜찮네요.」
「호오. 이 기술을 아십니까?」
「제가 어리게 보이더라도 꽤 박식합니다. 친환경 나노 코팅제. 현재 의료업계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기술이죠.」
「호오.」
「독일은 일 처리가 까다롭죠. 번역서 하나를 출판하는 데도 기간이 1년입니다. 그런 독일에서 라이센스를 의류업체 한 곳에서 성사했다는 건 바이어들에게 어필할 만하죠.」
나는 자료들을 넘겼다.
빠르게 시하에게 패턴을 보여주면서 머리를 굴렸다.
「이걸 볼 때 네 가지 소재 중의 하나는 알겠네요. 친환경 소재. 그것도 미세먼지와 황사 문제인 한국과 중국을 타킷을 사로잡으려는 초발수성을 이용한 옷이겠죠. 아닙니까?」
소재, 환경, 타깃층까지 유추해내며 나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나의 이 대답은 니콜드에게 이렇게 되묻고 있다.
이래도 자격이 없을 것 같습니까?
「하하. 정말 멋지군요.」
니콜드의 눈이 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흥미를 넘어서 탐욕이 눈에 깃든 것 같았다.
「사실 그저 말만 조금 통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입니다.」
어느새 나는 자료를 다 넘겼고, 시하에게 마지막 Q&A의 글자만 보여주었다.
이제 흥미가 사라졌는지 시하가 품에서 벗어났다.
마치 다 끝난 걸 아는 것 같았다.
니콜드가 말했다.
「이 모습을 보니 꼭 고용하고 싶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니콜드가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이 아저씨가 아직 끝난 줄 아네.
거래는 이렇게 하는 게 아니지.
「니콜드.」
「네.」
「그래서 얼마 줄 겁니까?」
이제 상황이 바뀌었지?
그쪽에서 나를 원한다.
잘나가는 통역사는 이런 일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나는 초짜.
이미 능력은 증명했다.
위치는 역전됐고 이제야 거래 선상에 섰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얼마 줄 겁니까?」
니콜드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대단하시네요. 역시 쉽지 않네요. 안 그래요. 투드?」
투드 역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시혁. 여기서부터는 제 일입니다.」
에이전트의 일까지 뺏을 수 없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시하를 품에 안았다.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그럼 저는 갈게요.」
「저도요. 다시 만났으면 합니다.」
「글쎄요. 니콜드의 넉넉한 인심에 따라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하하. 못 당하겠군요.」
니콜드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
시혁과 시하가 떠나간 자리.
니콜드와 투드는 다시 술을 한 잔씩 했다.
“재밌습니다. 아주 재밌어요.”
“괜히 만났다고 생각하시죠? 시혁의 몸값이 많이 올랐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그렇죠. 좋은 포트폴리오가 생겼으니까요.”
투드가 영상 하나를 보여주었다.
니콜드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건 대체 언제 찍은 거란 말인가?
“초상권 침해입니다.”
“다 허락 맡았습니다만?”
“제 초상권이요.”
“그럴 줄 알고 시혁하고 시하만 찍었습니다.”
“커험.”
“편집도 거치면 아무 문제가 없죠.”
“커허험.”
“기업은 많죠. 어디 보자 저희 에이전시에 모델을 요청한 기업이…….”
“거참. 왜 이리 급하십니까.”
“시간은 돈이 아닙니까? 그렇게 여유로운 기간은 아닙니다.”
“그건 그렇죠.”
니콜드는 머리를 굴렸다.
시혁은 굉장한 인재였다.
가만 보니 나중에 통역사로 크게 될 사람인 것 같았다.
언제 어디서 이런 글로벌한 인재가 인맥이 될지 모르는 법이다.
그리고 그 탁월한 능력.
자료를 엄청나게 빨리 보는 속독!
아무리 그래도 그건 니콜드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어를 모르는 니콜드는 시혁이 시하에게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빨리 넘긴 걸 몰랐다.
그래서 엄청나게 속독을 하는 줄 알았다.
‘회도 몇 점 먹었을 뿐인데 다 읽었지.’
오해였다.
니콜드는 더더욱 대단한 점을 알았다.
상황판단과 추리력이 상당하다.
이를테면 눈치 같은 것.
그리고 갑작스러운 만남인데도 그 여유.
마지막에 거래할 줄 아는 자세까지.
바이어와의 원만하게 거래하려면 그 정도 능력은 있어야 했다.
‘이번 노릴 시장까지 파악하다니.’
한국과 중국.
그리고 또 다른 나라는 인도였다.
아시아 시장 진출과 계약을 따내는 게 이번 목표였다.
글로벌한 기업에 성큼 다가가며 차세대 패션과 섬유기술에 브랜드를 알릴 기회.
“흐음. 이 정도 어떻습니까?”
“흐음.”
투드가 고민했다.
“하하.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런 거 말고 이건 어떠십니까? 계약이 훌륭하게 체결되었다고 했을 때 인센티브를 주는 거죠.”
“호오. 흥미로운 옵션이네요.”
“전 시혁이 잘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기본금도 이만큼은 챙겨주셔야. 그래야 제 수수료도…….”
“결국, 투드 자네가 더 받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하하. 서로 윈윈하는 거죠.”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계약서 작성은 이쪽에서 하겠습니다. 내일 사인해서 보내드리죠.”
협상이 끝난 둘의 술잔이 부딪쳤다.
***
시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가볍다.
품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시하마저 가볍게 느껴졌다.
일종의 착각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즐거웠다.
‘조금 짜릿했지?’
나는 그 상황을 떠올렸다.
뭔가 가슴속이 뻥 뚫린 것 같은 긴장감.
헤쳐나가는 모험심이 느껴졌다.
나에게도 이런 감정이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문득 걷는데 시하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시하야.’
나는 시하를 고쳐 안으며 얼굴을 보았다.
너는 오늘 형에 대해서 어떻게 봤니?
어떤 모습이었니?
아버지처럼 든든한 등을 보여줬을까?
아니면 그저 멋있는 형의 모습이었니?
내가 아버지의 등과 어머니의 품을 대신했을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력하면 가까워지며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다.
저 멀리 보이는 달에 인간이 도달한 것처럼.
‘예쁘네.’
정말 예쁜 달이었다.
황금색보다 개나리색이 더 예쁘다고 생각한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놀렸다.
빨리 시하를 집에서 눕혀야겠다.
그렇게 걷고 있을 때 한 사람과 마주쳤다.
“응? 알리사?”
“시혁.”
달빛보다 더 노란 머리카락이 눈앞에 흔들렸다.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흐흥~ 콧노래를 부르다 여기까지 왔어요.”
“요즘 콧노래는 대단하네요.”
“사실 고민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건데요.”
“그래요? 어떤 고민이요? 아 참! 오늘 고마웠어요. 알리사 덕분에 기본적인 지식을 얻게 되었잖아요. 나중에 제가 한턱낼게요.”
“그것보다 다른 걸 주면 안 돼요?”
“네?”
알리사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바람이 불며 머리카락이 내 뺨을 때렸다.
찰싹.
“악! 눈.”
“아! 괜찮아요? 미안해요.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알리사가 재빨리 내 옆으로 왔다.
나는 한쪽 팔로 시하를 안으며 눈을 비볐다.
이 와중에도 시하는 품에서 살짝 얼굴을 비볐다.
너무 귀엽다.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알리사를 보았다.
“그래서 뭘 주면 되는 건데요?”
알리사가 살며시 주저하더니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꼬았다.
“저도 데려다줘요.”
“네?”
이게 무슨 말이야?
그때 시하가 눈을 떴다.
“하우 머치. 두유 페이?”
How much do you pay?(보수는 얼마나 주십니까?)
내가 니콜드에게 한 말이었다.
아이고 시하야.
언제 그 말을 배웠어?
아무래도 시하는 아버지의 등보다 아버지의 머니를 봤나 보다.
이래서 교육이 중요한 건데…….
알리사가 말했다.
“4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