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500)

41화

옷에 그림을 다 그린 후 말리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입어보고 싶어서 옷걸이에 걸린 옷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애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참 귀여운 애들이었다.

“금방 마른다니까 딴 거 하며 놀까?”

“아아.”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승준과 하나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내 팔을 잡았다.

“사커! 사커!”

“하나는 소꿉놀이.”

다들 하고 싶은 게 너무 명확해서 곤란했다.

“시하는 뭐 하고 싶어?”

“형아~”

“응?”

“형아~~”

“형아가 하고 싶다고?”

도리도리.

“형아랑 놀고 싶다고?”

끄덕끄덕.

이렇게 기특한 동생이 어디 있을까?

역시 우정보다는 혈연이지!

정신 차리자.

시하는 내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좋아할 듯하다.

승준과 하나가 투정을 부렸다.

“사커. 사커.”

“소꿉놀이!”

나는 고민이 되었다.

축구를 하면 좋긴 하겠지만 하나가 하기 힘들 게 뻔했다.

그렇다고 소꿉놀이를 하면 남자애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고.

여기선 중도를 지키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축구와 소꿉놀이를 다 할 방법이 있는데 할래?”

세 명이 눈을 빛냈다.

뒤에 있던 알리사도 어떤 방법이 있을지 궁금한 모양.

나는 남은 도화지를 가져와 하나씩 이름을 적었다.

“음. 한글은 아직 못 읽으니까 그림도 그려줄게. 잘 봐.”

9가지의 그림.

식칼, 바나나, 식빵, 도마, 싱크대, 접시, 토마토, 냉장고, 담요.

소꿉놀이 세트에서 있는 물건들을 적어놓고 이렇게 말했다.

“축구공을 차서 여기에 맞추면 그 물건을 획득할 수 있어.”

승준이 눈을 빛냈다.

하나 역시도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렇게 하면 소꿉놀이도 할 수 있고 축구도 할 수 있지?”

“아아.”

시하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그건 또 어디서 배웠을까?

어쨌든 우리는 소꿉놀이를 하기로 했다.

“그럼 역할을 정할까? 하나가 정해 볼래?”

원래 이런 건 제안한 사람이 정하는 거다.

“하나는 엄마야!”

역시 집안의 최고 권력자를 선택할 줄 아는 아이였다.

“시혀기 오빠는 아빠야.”

“응? 아빠?”

“응!”

“그렇구나…….”

굉장히 묘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냥 강아지 역할을 하고 싶었는데…….

“오빠는 대학생. 시하는 회사원. 리사는 구피야.”

알리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피?”

“알리사. 지금 생각하는 구피 맞아요. 물고기요. fish.”

“시혁. 거짓말이라고 해 줘요. 어째서 저는 사람조차 아니죠?”

“정하는 건 하나 마음이죠.”

나는 어깨를 으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

다들 분주히 움직였다.

하나가 말했다.

“자. 다들 집안일을 도와!”

“아아.”

먼저 시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그마한 공을 땅에 놓았다.

앞에 만들어둔 종이를 보며 공을 찼다.

뻥.

아쉽게도 도화지를 맞추지 못하고 옆으로 빗나갔다.

승준이 앞으로 나섰다.

“시하야. 내가 할게.”

그때 하나가 말했다.

“너는 공부해. 어서 방으로 드러가.”

묘하게 현실적인 대사였다.

대학생이 공부해야 하긴 하지.

“그럼 나도 살림에 도움이 돼 볼까?”

하나가 내 팔을 잡았다.

“여보. 쉬어요.”

“응? 나 쉬어?”

“응. 고생해서. 밥 만드러써. 어서 머거.”

묘하게 편애받는 느낌이 들지만 쉬면 좋았다.

그 와중에 우리 시하는 재도전 중이다.

뻥. 뻥. 뻥.

그런 시하를 보며 승준이도 하고 싶은지 다리를 긁적였다.

“시하야.”

“아?”

“몰래 할게. 엄마에게는 비밀이다?”

“아아.”

결국, 두 사람이 공을 차고 있었다.

구피가 된 알리사가 눈치를 보며 슬며시 일어나려 했다.

하나가 그런 알리사의 다리를 잡았다.

“구피로 요리할 거야.”

기형적으로 생겨서 먹을 게 많게 되어 버린 구피였다.

그런 이상한 소꿉놀이를 진행하는 동안 물감이 말랐다.

알리사가 말했다.

“자. 이제 옷이 다 됐으니 입어 보아요.”

다들 하던 놀이를 멈추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아아! 형아!”

“와! 사커 공이다!”

“하나도 예뻐!”

다들 좋아해 주니 다행이었다.

나중에 종일 이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중에 커서도 시하가 추억할 수 있게 이런 옷은 남겨둬야겠다.

그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오늘 처음 만든 옷. 어린이집에서.]

***

-시하의 그림. 픽시브 업로드.

[제목 : penguin T-shirt(펭귄 티셔츠)]

1. 바가지 머리를 하고, 터틀넥 셔츠를 입은 하의실종 패션인 펭귄 티셔츠.

[좋아요] [하트] [퍼가기] […]

[siha.pepe.] [작품 목록]

#bowlcut #penguin #T-shirt #Fabricpaints

[댓글]

-시하페페♡♡♡

-이번에는 4컷 만화가 아니야!

-하지만 귀여워!!!

-저 옷 파는 건가요?

-한정 판매?!

-그런 거 안 적혀 있어요. 다들 정신 차리세요~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댓글들도 다수 존재했다.

예를 들어 저 그림에 또 뭔가 있을 거라고 보는 사람들.

다양한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저건 그저 귀엽다고 표현하면 안 돼!

-맞아. 분명 뭔가 있을 거라고. 그냥 티에 귀여운 캐릭터를 그릴 리가 없어!

-그럼 저 바가지 머리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건데?

-하하. 그것도 몰라? 저 바가지 머리를 봐. 저건 펭귄의 서식지인 남반구를 뜻하는 거라고!

-뭐라고 정말?! 그런 의미였단 말이야!

시하는 그냥 바가지 머리를 떠올려 그렸을 뿐이다.

하지만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는 시하페페의 그림을 본 해석가들은 열을 올렸다.

-좋아. 바가지 머리는 그렇다 쳐. 그럼 터틀넥 티셔츠에 하의실종 패션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그거야말로 시하페페의 대단한 점이지

-맞아!

-같이 좀 알자. 뭔데?

-저기 보면 오버핏으로 입고 있잖아. 그건 지구온난화로 인해 펭귄이 사는 섬의 늘어난 얼음을 나타내는 거지

-에이 설마~

-설마라고? 최근에 뉴스와 그린피스의 후원금 모집을 못 봤어? (링크)

떠다니는 빙하 급증으로 인한 펭귄들의 사망 뉴스.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이런 뉴스와 펭귄, 그리고 흰 터틀넥 티를 입은 그림이 올라왔다.

다들 그 묘한 시기에 감탄했다.

-그것뿐만 아니야. 하의실종은 그로 인해 죽음을 나타내는 거지.

-맞아.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니까. 빙하의 일각인 터틀넥! 그 밑에 있는 심해의 죽음. 캬~

실제로 그저 하의를 그리기에는 펭귄의 다리가 짧아 그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좋아. 그러면 마지막으로 목에 있는 금색 목걸이는 뭔데?

-금은 가치 있는 거지.

-그게 무슨 소리인데?

-어쩌면 이건 지구온난화와 펭귄을 지키자는 뜻이 아닐까? 후원을 하자는 거지. 시하페페의 그림이 따뜻하잖아?

-펭귄에게 쓰는 금의 가치라…….

-따뜻한 그림체에 맞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아니겠어?

그저 시하는 멍뭉미 패션을 그렸을 뿐이다.

오늘의 그림 역시도 댓글을 뜨겁게 달군 해석이 만연했다.

***

에이전트 투드는 조용한 룸이 있는 곳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여기서 인사드리네요. 니콜드.”

“하하. 투드. 설마 벌써 연락할 줄 몰랐습니다. 아직 패션 페어는 기간이 많이 남았는데요.”

하비니스 기업의 니콜드.

섬유뿐만 아니라 의류를 가공하고 브랜드까지 만든 기업이었다.

니콜드는 이번 패션 페어에 바이어로 참가했다.

현재 한국 의류의 패턴과 유행을 미리 실감하려고 온 것이다.

이번 패션 페어&섬유박람회 때 선보일 로컬 의류가 통할지 판단하기 위해서.

“아직이라뇨. 시간은 금방입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재밌는 제안을 조금 해 볼까 합니다.”

“그거 흥미롭군요.”

“하하.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번에는 모델 겸 통역사를 제가 소개하려고 합니다.”

니콜드의 눈이 빛났다.

설마 그런 이야기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혹시 통역사를 구하셨으면 낭패입니다만.”

“아니요. 따로 구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소개해 주는 통역사를 고용하려고 했죠.”

“아, 역시. 그럼 모델 핏이 나는 통역사는 어떻습니까? 꽤 먹힐 것 같은데요?”

“모델 핏이라…….”

“하비니스 브랜드에 맞춘 옷을 입고 바이어들을 상대하는 겁니다. 괜찮지 않습니까?”

“하하.”

니콜드가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보였다.

“일단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죠. 이게 한국의 회라는 건가요?”

“그렇죠. 아주 맛있습니다.”

투드가 와사비를 조금 덜어서 간장 그릇에 넣었다.

“여기에 찍어 먹는 겁니다. 이런 날 것이 꽤 맛있죠. 싱싱하면 더 좋고요. 제가 소개할 친구 역시도 아주 싱싱합니다.”

투드가 폰을 꺼내서 사진을 보여 주었다.

강인 패션쇼에서 찍은 사진과 미리 시혁에게서 받은 사진들이 넘어갔다.

니콜드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델로서는 괜찮네요. 영상도 있습니까?”

“물론이죠.”

“하하. 옆에 있는 아기가 더 눈에 띄는군요.”

“하하. 저도 그쪽으로 시선이 가기는 합니다.”

“흠. 하긴 패션쇼가 아니라 통역사로 고용할 생각이기는 하니까요. 이 친구, 이 분야에 대해서 잘 압니까?”

“전문용어는 어느 정도 할 겁니다. 하지만 통역사는 역시 조율을 할 줄 알고, 삭막한 분위기에 훈풍이 불게 해야 하는 게 진짜 능력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하지만 이렇게 영상을 가지고는 판단이 되진 않습니다.”

니콜드가 회를 한 점 입에 넣었다.

“투드. 그럼 이렇게 하죠. 혹시 통화할 수 있냐고 물어보실 수 있습니까?”

“지금 말입니까?”

“지금이면 더 좋고, 나중이면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네요.”

“좋습니다.”

“하하. 투드. 이번 거래는 참 재밌습니다. 에이전시도 허락한 건가요?”

“에이전시에게는 일단 재밌는 친구 좀 소개한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인 흥미라 수수료는 저에게 직접 주시면 됩니다.”

“대체 어떤 부분에서 투드의 흥미를 끌었는지 기대가 되는군요.”

투드가 살며시 긴장한 채로 시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간 후에 시혁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 시혁. 저 투드입니다. 혹시 전에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네. 당연하죠.」

“이번에 하비니스 기업의 니콜드 바이어에게 당신을 소개했는데 한번 이야기하고 싶어 하더군요.”

「그래요?」

“네. 어떠십니까? 혹시 통화 가능하십니까?”

「통화로 되겠어요? 제가 바로 거기로 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여기에 오겠다고요?”

「네. 그쪽에서 괜찮다면요. 나름 통역사로 소개받았는데 얼굴도 못 보고 대화할 수 있나요?」

투드가 피식 웃으며 그 말을 니콜드에게 전했다.

“정말 재미난 친구네요.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저 자신감도 대단하네요.”

“사실 이 친구가 나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자신을 비즈니스 좀 해달라고 말이죠.”

“와우. 그 열정 정말 높이 평가하죠. 그 말을 들으니 더 기대되는데요?”

투드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들었죠? 여기가 어디냐면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요. 혹시 제 동생도 같이 데려가도 될까요?」

둘은 당연히 허락했다.

잠시 후.

시혁이 도착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 이루어졌지만 두 사람에게 아무 문제 없었다.

이러한 일 처리를 빨리 끝내는 것이 좋은 것도 한몫했다.

서로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투드는 안 되면 빨리 다른 기업으로 돌릴 생각이었다.

니콜드는 빨리 통역사를 구해서 이번 세미나와 바이어의 거래를 준비해야 했다.

시간이 금인 사람들이었다.

시혁이 영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이시혁입니다. 여기는 제 동생 시하입니다.」

「반가워요. 우리 꼬마 친구도 안녕?」

“아아. Hi!”

니콜드가 살며시 웃음을 보였다.

「정말 귀엽군요.」

「그것보다 직접 보니 어떠신가요?」

「인상이 굉장히 좋습니다. 특히 웃을 때 말이죠. 이번 한국과 재밌는 교류가 되었으면 하는데…. 괜찮네요.」

「아마 제가 나서면 안 될 거래도 조금은 성사되지 않을까요?」

「하하. 대단한 자신감이군요.」

니콜드는 이 젊은 친구의 패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비즈니스 성향이 강한 이번 섬유박람회는 이것보다 더한 능력이 필요했다.

일단 발음에 관해서는 지적할 게 없었다.

그래서 조금 시험해 보기로 했다.

「패션 컨펌에 대해서는 좀 아십니까?」

시혁은 그런 니콜드의 질문에 살며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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