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강인 패션쇼!]
커다란 포스터가 학교 내 게시판에 붙어 있었다.
포스터에는 작년 우승자들의 옷이 보였다.
구경 오라고 유혹하는 패션과의 행사.
흥미 있는 학생들이 소곤거리며 말했다.
“우리도 가볼래?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좋아. 사실 나도 흥미가 있었어. 언제 이런 패션쇼를 보겠어.”
“에이. 시간 아깝게.”
“근데 관람객 중에 추첨을 통해 상품도 준다던데?”
“상품이 뭔데?”
“보자. 보조배터리? 오! 끌리는데?”
“패션디자인과에서 만든 티도 준다던데? 저거 괜찮지 않아?”
나는 그런 애들을 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현재 식권을 끊으려고 줄을 서고 있는데 국문과 후배들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앞에 있던 서수현이 말했다.
“오빠. 오늘 패션쇼 기대되네요. 그쵸?”
“흥미가 많네?”
“재밌으니까요. 작년에 막 화려한 의상도 있고 캐주얼한 의상도 있었는데 재밌었어요. 그리고 잘하면 의류 쇼핑하는 곳에 공장을 돌릴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혹시 패션디자인과세요?”
“아니거든요. 작년에 제가 쇼핑몰에서 사서 알아요.”
“아, 그래?”
“네. 그래서 이번에도 가려고요. 재밌잖아요. 이런 대학생의 특권을 누려야죠. 중간고사도 끝났는데.”
“음. 그래.”
“오빠도 시하 데리고 한번 가봐요. 시하에게 여러 가지 보여주는 게 좋잖아요.”
“어. 그래. 좋겠지.”
이미 가기로 되어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관람객이 아니라 모델로 서는 거지만.
서수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서 이번에 국문과 애들 전부랑 같이 가려고요. 제가 같이 가자고 했어요. 다들 작년에 제가 옷에 대해 말하니까 눈을 반짝였는데…….”
나는 유치환 시인이 왜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표현을 썼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내가 그러지 말라고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었으니까.
‘국문과 3학년 여대생들이 다 본다고?’
제가 바라는 깃발은 이상세계인가요?
응. 포기하면 편해.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식권을 뽑고 음식을 받았다.
옆에서 서수현이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머릿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유체이탈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오빠. 제 말 듣고 있어요?”
“밥 먹는데 이야기하는 거 예절이 아니야.”
“네? 실컷 이야기하다가 이제서요? 그리고 다 먹었는데요?”
“이제야 이야기하는 거지. 아 혹시 입에 묻은 건 밖에서 자랑하려고?”
“아 뭐야! 못됐어. 왜 지금 이야기해 줬어요!”
나한테는 네가 젤 못됐어.
***
-강인 패션쇼 시작 30분 전.
옷을 갈아입고 대기실에서 있는데 모델들이 힐끗힐끗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이거 좀 부담되네.
물론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시하를 보는 것이다.
다들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시하야. 화장실 갔다 오자.”
“아아.”
상의에 있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우리는 화장실을 다녀왔다.
대기실에 있던 알리사가 말했다.
“시혁. 시하. 모두 잘해요.”
“뭐, 실수는 안 할게요. 그냥 옷을 보는 것뿐인데요. 교수님들은 모델에 신경도 안 쓴다면서요?”
“그래도 제대로 보여 줘야죠. 연습한 대로 하면 문제없어요.”
연습이라고 해 봤자 별거 없었다.
무대에 나와서 몸을 돌려 여기저기 보여주며 다시 걸어 들어간다.
그것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여유가 넘쳐 보였다.
마치 축제라도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중에 얼굴을 굳히고 비장한 표정인 사람도 있었다.
참가 중에 자신이 모델로 나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얼굴 굳은 사람은 자신을 모델로 한 것 같았다.
“패션쇼 시작하겠습니다!”
저 말을 하자 다들 순서를 기다렸다.
스텝의 안내에 따라 다들 하나둘씩 대기실에서 나갔다.
나는 시하를 보았다.
“시하야. 혹시 무서우면 형아에게 안겨도 돼. 알았지?”
“아아.”
어른이든 아이든 이렇게 사람이 많이 보는 무대에 서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시하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사실 나도 별로 긴장이 되지 않았다.
그냥 걷고 나오면 될 것 같았으니까.
“네. 다음 순서 나와주세요.”
“네. 가자. 시하야.”
“아아.”
드디어 우리의 순서였다.
***
“다음은 알리사의 멍뭉미 패션입니다!”
시하는 시혁을 손을 잡고 걸었다.
학교의 한 강당 위였지만 시하의 눈에는 굉장히 커 보였다.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이 보였다.
많은 눈이 이쪽을 향해 있어서 굉장히 낯설었다.
조금 무서운 느낌이 든 시하는 형아의 손을 꼬옥 잡았다.
“시하야. 가자.”
“아아.”
시하는 발을 열심히 놀리며 걸었다.
사람들은 그런 시하를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른들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애기도 있으니 너무 귀엽게 보였다.
관객 중에는 어린이집 애들도 있었다.
승준과 하나가 말했다.
“시하야~”
“시하야~”
어린이집 선생님은 애들을 조용히 시켰다.
“쉿. 쉿.”
“시하 멋지다.”
“시혀기 오빠 머시써!”
쌍둥이는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해 감상을 내뱉었다.
선생님은 이 귀여운 애들을 어쩌면 좋을지 고민했다.
사실 너무 큰 소리만 아니면 어느 정도 대화를 해도 되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이기도 했다.
주변 관객들은 이미 사진을 찍고 있었다.
찰칵. 찰칵. 찰칵.
지금 나온 사람 중에 제일 카메라 소리가 많이 들렸다.
그때 애들 옆에 있던 외국인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상당히 괜찮네요. 오호. 지금까지 본 모델 중에 꽤나?」
선생님은 뭐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외국인의 표정만은 알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아이들과 같은 즐거운 얼굴이었다.
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무대를 보았다.
시하가 떨지 않고 잘 걸어가고 있었다.
무대 가운데에 서자 나름의 포즈도 취한다.
“멍멍.”
두 주먹을 쥐고 볼에 가까이 대었다.
승준과 하나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우리가 생각한 거다!”
“마자. 저 포즈 조아!”
모델 연습할 때 두 사람의 합작품이었다.
위에 있는 시혁도 살며시 주먹을 들다가 내렸다.
“월!”
선생님이 보기에는 나름 큰 개로 저항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효과가 좋았다.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와. 저 모델 누구래?”
“멍뭉미 터진다. 진짜.”
“아이랑 나오니까 아빠랑 아들이랑 나온 거 같다. 그치?”
“울음소리 디테일을 보면 맞는 것 같아.”
전혀 그런 건 아니었지만 선생님은 그저 조용히 입에 지퍼를 채웠다.
그저 마음속으로 시혁과 시하를 응원할 뿐이었다.
시하와 시혁이 들어가고 패션쇼는 계속되었다.
승준과 하나도 다양한 옷을 입고 나오는 사람들이 신기한지 의자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선생님은 그런 둘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가만히 앉아서 봐야지.”
“네.”
“네.”
다행히 두 아이는 말은 잘 들었다.
승준이 말했다.
“시하가 오늘도 마법에 걸렸어.”
“힝. 하나도 마법 걸리고 싶은데.”
“내일 마녀에게 걸어 달라고 할까?”
“응. 하나는 공주님 되고 시퍼.”
“나는 사자. 사자가 제일 쎄.”
못 말리는 애들의 대화에 선생님은 웃음을 보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모든 패션쇼를 참여해 주신 분들이 나와서 감사의 인사를 하겠습니다.”
패션쇼의 마무리가 되고.
“그럼 심사를 발표하겠습니다.”
심사의 집계는 금방 나왔다.
교수님들이 패드로 점수를 매기니 금방 합계가 나온 것이다.
“인기상은 알리사 디자이너의 멍뭉미 패션!”
아쉽게도 알리사의 패션은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인기상을 받았다.
알리사는 손뼉 치며 좋아했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것보다 가장 뜨거웠던 반응을 얻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점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국문과 학생들과 서수현은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뭐지? 관심 없다며?”
서수현의 중얼거림에 다른 애들이 말했다.
“시혁이 오빠가 오늘따라 달라 보인다.”
“맞아. 맞아. 나도 그 생각했어. 패션 때문인가? 막 보호 본능이…….”
“그것보다 아기가 너무 귀엽지 않았어? 멍멍.”
“어우. 따라 하지 마. 내 머릿속 그림을 망가뜨리지 말라고.”
“확실히 남자는 꾸며야 해. 화장도 진짜 자연스럽게 잘 먹은 거 같던데?”
“시혁이 오빠의 재발견인 느낌? 동생도 귀엽고. 수현아. 그치?”
서수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시하가 더 좋던데?”
“아! 그 아기 이름이 시하야?”
“응. 시혁 오빠 동생.”
“아, 그렇구나. 키즈 채널 같은 거 안 만드시나? 바로 구독할 거 같은데.”
“글쎄?”
국문과 여학생들은 이번 패션쇼에 대해서 이것저것 떠들었다.
국문과 남학생들은 달랐다.
특히 2학년 과대가 웃음을 보였다.
“으하하. 선배님. 저에게 약점 잡히셨습니다.”
“이걸 이렇게 잡네!”
“근데 잘 어울리는 게 약점이 될까?”
“당사자의 표정을 봤을 때 이건 무조건 흑역사지. 부끄러워하는 순간 약점을 보인 거라고.”
2학년 과대가 씨익 웃었다.
“이제 예선이 아니라 인문학과 체육대회 당일에도 부를 수 있겠구만!”
2학년 과대는 몰랐다.
학과 참여도 점수 때문이라도 시혁이 참여는 할 거라는 걸.
딱히 의미 없는 약점이었다.
***
패션쇼가 끝나고 탈의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모델들이 시하와 나를 잡았다.
“자, 잠시만요!!”
“같이 사진 한번 찍지 않으실래요?”
“애기가 너무 귀여워서 같이 찍고 싶어요.”
나는 단호히 거절하려다가 이건 시하에게도 좋은 추억이 되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같이 찍는 거로 해요. 시하야. 괜찮지?”
“아아.”
단체 사진을 찍었다.
개인별로도 찍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서 한동안 계속 찍어야 했다.
뭔가 연예인이 된 기분이었다.
시하의 포즈는 똑같았다.
브이를 그리는 손.
저 왼손은 절대 놓칠 수 없나 보다.
다들 똑같은 시하 포즈에 한바탕 웃어버렸다.
“시하야. 이제 브이 하지 말고 다른 포즈 해봐.”
내가 시하를 안고 그렇게 말하자 시하가 손을 내렸다.
찰칵.
“푸하핫!”
사진을 확인한 모델이 배를 잡고 웃었다.
시하가 손을 위로 올리지만 않았을 뿐.
아래로 내려진 손은 브이 자를 그리고 있었다.
역시 우리 시하.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아래에 브이 자를. 푸하핫. 시하 진짜 귀엽네요.”
“감사합니다.”
한바탕 사진을 찍고 우리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사실 그냥 입고 가도 되지만,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귀찮아질까 그냥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오니 알리사가 우리를 반겼다.
“시혁! 시하! 오늘 정말 고마워요.”
“고마우면 밥 한 끼 사줘요.”
“흐흥~”
“모른 척하지 말고요.”
“알았어요. 밥 한 끼 사면 되는 거죠? 제가 좋은 데 알아놨어요. 꽃게탕이. 아우! 끝내줘요.”
“시하야. 알리사가 엄청 맛있는 거 사주겠대.”
“아아! 게. 아우.”
시하가 알리사의 말을 따라 했다.
많이 압축되긴 했지만.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저기.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갈색 머리에 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였다.
영어로 물어보길래 나도 영어로 답했다.
「누구시죠?」
「아, 이런. 나는 이런 사람이네.」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투드 에이전트?」
「맞네. 모델을 스카우트하는 일을 하고 있지. 자네는 굉장히 따뜻한 ‘룩’을 갖고 있어서 선호하는 에이전시가 많을 거야. 내가 보는 눈이 까다롭거든.」
「죄송하지만 전 관심이 없는데요.」
「잘 생각해 보게. 이런 대학 생활을 즐기면서 전업 모델도 할 수 있을 걸세. 보통 내가 추천한 모델은 하루 10만 달러 이상은 벌지. 이건 자네에게도 기회야.」
너무 거짓말 같은 액수에 신뢰도가 ‘팍’ 하고 꺾였다.
개인적으로 사기꾼 냄새가 난다.
「정말 생각 없어요.」
「흠. 아쉽군. 그래도 나중에라도 연락해 주게. 정말 아까워서 그러네.」
그때 시하가 말했다.
“게 아우!”
투드가 시하의 말에 헛기침하며 인사를 하고 조용히 떠났다.
알리사가 배를 잡고 웃었다.
“푸하핫. Get out으로 들렸어요.”
“저도요.”
물론 시하는 꽃게탕을 먹고 싶어서 말한 거겠지만.
“그럼 이제 꽃게탕이나 먹으러 갈까요?”
“그래요.”
우리는 밥을 먹으러 갔다.
***
밥을 먹고 있는 도중 시혁의 폰에서 무언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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