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몇 주 전.
패션디자인학과 알리사는 시혁과 시하를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창작자로서 어디 하나에 꽂힐 때가.
거기에 이번 강인대학교 패션과 콘테스트가 열리는 타이밍까지.
때와 시기가 맞으니 알리사로서는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시하페페 작가의 그림을 보고 디자인을 짰는데 꼭 따뜻한 룩이 필요했다.
모델이 시혁과 시하가 아니면 이미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억지로 강요할 수 없는 노릇.
‘일단 최선을 다해 보자.’
알리사의 작전은 단순했다.
정말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때로는 통하는 전략.
알리사는 노트를 가지고 시혁에게 연락을 넣었다.
[알리사 : 번역 주신 거 너무 재밌었어요ㅎㅎ]
[시혁 : 감사합니다]
[알리사 : 여기에 대해서 좀 자세히 말하고 싶은데 혹시 시간 되세요?]
[시혁 : 일단 시하를 데리고 오면 저녁 먹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어요]
알리사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이번 작전에서 필요한 요소는 바로 시하였다.
[알리사 : 정말요? 제가 음료수 살 테니까 시하랑 같이 이야기하면 되겠네요ㅎㅎ 톡으로 말하기에는 너무 장황할 거 같아서요]
[시혁 :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알리사 : 그럼 카페에서 봐요ㅎㅎ]
[시혁 : 네]
알리사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50분.
지금부터 작전 시작이었다.
언제나 준비된 자에게 기회는 오는 법이다.
이미 책도 다 읽어놨다.
나머지는 어떻게 설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흐흥~”
알리사가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카페에 먼저 도착한 알리사가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시혁과 시하가 들어왔다.
“시혁, 시하. 여기예요.”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
알리사의 입이 바싹 말라왔다.
늘 원하는 쪽이 지고 들어가는 거라고 했는데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을 침착하게 한 다음 말을 꺼냈다.
“우선 마시고 싶은 거부터 고를래요? 시하야. 뭐 마실래?”
“아아.”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줄 알고 알리사가 폰으로 카페 메뉴를 꺼냈다.
글자보다는 이미지가 보기 편할 것 같아서 보여 주었다.
커피는 조금 그러니 쉐이크나 에이드 위주로 이미지를 띄웠다.
“아아.”
시하가 신중히 고르는 모습을 보고 시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는 마실 걸 시켰으니까 시혁 씨도 고르세요.”
“그럼 전 자몽에이드로 하죠.”
“그래요. 그럼. 시하야. 다 골랐어?”
시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으로 밀크티쉐이크를 골랐다.
“와. 밀크티쉐이크네?”
“아? 미크.”
“응. 이거면 되지?”
알리사는 시하를 열심히 챙기면서 주문을 했다.
자리에 돌아온 알리사가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그때 본 무협은 굉장히 재밌었어요.”
“그래요?”
“네. 뭔가 서술이 재밌기도 했고 멋있기도 했죠. 아마 여성보다는 남성분들이 더 좋아할 거 같아요.”
“아무래도 장르적 특성을 봤을 때 여성 독자 비율보다 남성 독자 비율이 더 높을 것 같긴 하죠.”
“맞아요. 하지만 제 생각에는 여기서 여성 독자들도 잘 끌고 올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래요? 어떻게요?”
“뭐. 그냥 흘려 들으셔도 돼요. 이건 그저 패션디자인과의 학생이니까 하는 말이에요.”
“그래도 듣고 싶네요.”
“혹시 영어로 말해도 돼요?”
“Sure.”
알리사가 패드를 꺼내서 디자인한 옷을 보여주었다.
굉장히 수수한 듯하지만, 굉장히 세심하게 그린 동양풍의 옷이었다.
「수실과 집중을 위해 상의에 묘사를 넣은 디자인예요.」
「음? 갑자기 옷이요?」
시혁으로서는 굉장히 뜬금없었다.
알리사도 알고 있었지만, 이유야 갖다 붙이기 나름이었다.
「보통 표지에 이끌리는 사람이 많죠. 아름다운 꽃에 나비와 벌이 이끌리듯이요.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여성 독자를 처음 유입시키는 건 이러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흐음. 재밌는 관점이네요. 캐릭터 얼굴이 아니라 디자인이라니.」
「어차피 캐릭터 얼굴은 다 잘생기게 나올 테니까요.」
「…그건 그렇죠.」
묘한 말에 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사는 혀로 입술을 적셨다.
「모델의 완성은 얼굴이 아니라 룩이죠. 느낌이요. 물론 클라이언트들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감이 결정되는 거긴 한데…. 그건 넘어가고 옷이 정말 중요해요.」
「오. 그래요?」
시혁이 관심을 보이자 알리사가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알리사가 힐끗 시하를 보았다.
야무지게 밀크쉐이크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 시하에게 패드를 보여 주었다.
“네. 시하야. 이 옷 어때?”
“아?”
“멋있지?”
“아아.”
시혁도 시하가 심심하지 않게 하는 알리사의 배려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알리사가 속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음 작전으로 넘어갔다.
살며시 사진을 넘기며 자신이 작업한 진짜 목적인 옷을 보여주는 것!
이를테면 남성을 공략하기 전에 가족부터 내 편을 만들기 작전의 응용이었다.
시혁이 시하에게 꼼짝 못 한다는 것을 저번에 봤기에 나온 전술이었다.
“아아?”
시하가 반짝이며 옷을 보았다.
알리사는 어설픈 연기를 했다.
“어? 이 옷이 왜 중.간.에 끼.어.있.죠?”
물론 외국인 특유의 억양이 있었기에 시혁과 시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기 옷이네요?”
“네. 저 때 말했던 것처럼 제가 아동 패션에 관심이 많거든요. 성인 옷도 있어요.”
시하가 손을 뻗으며 패드를 잡았다.
시하의 눈에 비친 화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멍뭉미 패션]
오버핏으로 된 흰색 터틀넥 상의, 그 위에 있는 기다란 금색 목걸이, 7부 바지.
마지막으로 화룡점정인 강아지 귀 머리띠.
차우차우가 생각나는 디자인이었다.
그래서 시하는 이것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알리사는 몰랐지만, 이것이 또 한 번의 기회가 되었다.
“시혁. 전에 말했던 제안 유효해요. 강인대학교 패션디자인과에서 하는 콘테스트에 관심 없어요? 패션쇼로 하긴 하는데…….”
강인대학교 패션과 콘테스트는 유명했다.
보통 강당에서 하는데 공개된 행사라서 외부인이 구경하기도 한다.
가끔 하는 퍼레이드도 축제처럼 꽤 재밌는 행사였다.
알리사가 시하를 힐끗 보았다.
“시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겠어요? 보니까 옷에 관심 있는 것 같은데?”
이 말은 시혁에게 유효타로 작용했다.
시하에게 여러 가지 경험을 시켜보고 싶어 하던 게 최근의 일이었다.
“으음.”
알리사가 좀 더 찔러보았다.
“그럼 시하에게 물어보세요. 혹시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네. 그러는 게 좋겠네요. 시하야.”
“아아.”
“시하야. 어떻게 할래? 모델로 선정됐는데?”
“아아?”
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뭐라고 설명하면 좋지? 이런 행사에서 옷을 입고 걸어가는 거야.”
알리사가 재빨리 준비된 아동복 패션쇼 영상을 보여 주었다.
이미 패드에는 모든 준비가 갖춰져 있었다.
“아아!”
영상에 아이들이 멋들어진 옷을 입고 걸어 나간다.
어른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그래도 꽤 괜찮은 포즈를 취한다.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30도 정도 몸을 좌우로 틀었다.
다 보여주고 들어가는데 다음 어린이가 나왔다.
시하가 신기한지 코를 박고 보고 있었다.
“시하야. 얼굴은 떼고 봐야지. 어때? 이런 거 해 보고 싶어? 이 옷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가 내려올 거야.”
“아아.”
시하가 이해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한 건 알았다.
알리사는 일단 일차적인 목표를 완수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두 번째 작전을 들어가는 것이다.
“혹시 그러면 시혁 씨도 옷을 입을래요?”
“네?”
“제가 디자인을 할 때 따뜻한 룩을 생각했거든요. 아빠와 아들. 이런 느낌이면 좋을 거 같은데…….”
“아, 그게 좀. 강아지 머리띠가 부담스러운데…….”
“그럼 이것도 시하에게 물어보죠. 시하야. 어때? 형아랑 ‘같은 옷’ 입고 싶지?”
시하가 한 단어에 꽂혔다.
형아랑 ‘같은 옷’!
“형아~”
시하가 시혁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응?”
“가치~”
시하가 살며시 웃었다.
알리사는 시하의 웃음을 처음 봐서 깜짝 놀랐다.
너무너무 귀여웠다.
살며시 고개를 돌려 시혁을 보자…….
“허헣.”
이미 얼굴에서 백기를 들고 있었다.
알리사는 직감했다.
작전은 성공했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
이야기가 끝나고 알리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오늘 치수를 재면 좋겠다는 말에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이왕이면 시간 있을 때 단번에 해결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알리사.”
“네?”
“편하게 영어로 말할게요.”
“네. 저도 좋아요.”
시하와 도착한 곳은 패션과에 있는 어느 강의실이었다.
강의실이라고 해야 할까?
작업실이라고 해야 할까?
넓은 책상 위에 재봉틀과 줄자, 마네킹이 한데 모인 공간이었다.
이런 공간이 여러 군데 붙어 있었는데 나는 신기하다는 듯이 둘러보았다.
“시하야. 신기하지?”
“아아.”
“저런 마네킹에 옷을 입히는 거야. 지금은 다 벗고 있네. 아이 부끄러워!”
“아아.”
시하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는 듯이 봉을 잡았다.
위에는 상체의 형상만 달랑 있었는데 그게 신기한가 보다.
시하가 손을 들었다.
“한번 만져보고 싶어?”
“아아.”
나는 시하를 들어 올렸다.
상체의 가슴 부분을 찰싹찰싹 때렸다.
‘으음. 그쪽은 대체 왜 때리는 거지?’
가슴 근육이 튀어나온 게 단단해 보이고 때리기 좋기는 한 것 같았다.
왠지 학창시절에 주먹으로 서로의 가슴을 때리는 놀이를 하는 애들을 보는 것 같았다.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긴 했지만.
자신의 단단함을 자랑하려고 그랬나?
그때 알리사가 줄자를 들고 와 말했다.
「재는 것만 할 테니까 금방 끝나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저는 머리띠 안 해도 되죠?」
「그게 포인트인데…. 시하도 바라지 않을까요?」
과연 거기서 시하를 콕 하고 찌르다니.
알리사가 살며시 웃었다.
「분명 같은 걸 하고 싶어 할 거예요. 저에게 언니가 있는데 늘 언니 하는 걸 졸졸 따라다니면서 따라 했었거든요.」
경험을 곁들여서 설득하는 모습에 토론 배틀을 한 게 생각난다.
하지만 저 말에는 허점이 존재하고 있다.
「혹시 언니 옷 물려받아서 같은 옷을 입은 거 아닌가요?」
「크흠. 시하야. 치수 재자.」
정답이라는 듯이 고개를 돌려 모른 척하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시하에게 영어로 말할까?
“아?”
“시하야. 알리사가 줄자를 가지고 몸길이를 잴 거야. 으음. 시하 옷 만드는 데 필요한 일이야.”
“아아.”
“자. 팔을 벌려 봐.”
시하가 팔을 벌리자 알리사가 재빨리 치수를 쟀다.
「알리사. 살며시 튀어나온 배는 만지지 마시죠?」
「제가 언제요? 그냥 치수를 쟀을 뿐이에요.」
「어차피 오버핏으로 만들건대 배를 잴 필요가 있어요?」
「맞춤옷 안 만들어 보셨죠?」
저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만들어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배도 재는 건가?
「그건 그렇다 치고 배는 만질 필요가 없잖아요?」
「창작을 위해서 필요했어요.」
「솔직히 너무 귀여워서 만져보고 싶었다고 하면 용서해 줄게요.」
그 말에 알리사가 순순히 시인했다.
「죄송해요. 너무 귀여워서 만져보고 싶었어요. 볼록 튀어나온 배가 너무 귀엽잖아요.」
「오케이. 나 머리띠 안 할 거예요.」
「용서해 준다면서요! 치사하게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렇게 투덕거리며 우리는 치수를 쟀다.
정말 금방 끝났다.
당연하지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시하야. 이제 가야지. 알리사 누나에게 인사해야지. 바이바이.”
“리사. 바이바이.”
시하가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알리사가 시하가 이름 불러주는 것에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옷 예쁘게 만들어 줄게!”
그리고 몇 주 뒤.
알리사가 어린이집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