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500)

35화

나는 장난감 세 개를 계산하고 시하와 밖으로 나왔다.

봉지를 자기 손으로 들고 있는 시하가 너무 귀여웠다.

아직 우리의 쇼핑은 끝나지 않았다.

“시하야. 이제 대형 서점에 갈까?”

“아아.”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서점으로 갔다.

시하가 볼 그림책을 골라서 사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하는 책에 관심이 없나 보다.

정확히는 장난감에 푹 빠져 있었다.

“형아가 알아서 고를까?”

“아아.”

시하가 봉지 안을 계속 힐끗 보았다.

안에 잘 들어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걸까?

다음에도 시하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서점을 둘러보았다.

유아용으로 볼 수 있는 그림책들이 참 많았다.

‘그것보다…….’

막상 고르려는데 고민이 되었다.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그림의 문제.

시하가 앞으로 보는 것들이 어떤 형상으로 그려질지 모르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을 생각해 보자.’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는 것밖에 없다.

많은 것을 접하고 느끼게 하는 것.

그렇다면 많은 그림을 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지.

‘흐음.’

정말 그런가?

번역된 글을 찾아보고 분석해 보면 엉망인 글도 많았다.

아쉬운 부분인 점도 보였고.

집중이 안 되게 만든 책도 분명히 있었다.

아무거나 먹으면 체하는 법이다.

‘어렵네…….’

무언가 틀에 갇힌 교육을 할 생각은 없다.

그저 한없이 자유롭게 보여줄 뿐이다.

‘차라리 배경이나 풍경 같은 사진 책이 낫나?’

그림책에서 사진이 있는 여행 잡지에 시선이 갔다.

‘아니야.’

다시 한번 그림책을 봤다.

그림책은 하나의 그림으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스토리가 핵심이다.

스토리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 스파크가 번쩍 튀었다.

소설을 번역한 수많은 자료가 이리 튀고 저리 튀었다.

앞에 있는 그림책의 줄거리를 검색하면서 시하에게 올바른 주제에 맞은 책들을 선정한다.

그림이 아니라 스토리.

이 정도는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시하야. 골랐어.”

“아아?”

내 손에는 열 권의 책이 올려져 있었다.

시하가 그 모습에 눈을 껌뻑였다.

***

나른한 주말.

시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살며시 형아를 쳐다보았다.

시혁이 거실에서 펜을 잡고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자는 탁월한 조어력과 압축력을 가진다. 중국인들이 문자개혁방안을 놓고 20세기에 들어와 고민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뜻글자에서 소리글자로 넘어서는 문턱을 넘지 못하는 한자 때문이다.”

“한글은 반대이다. 처음은 소리글자였지만 점점 뜻글자로 확대하고 있다.”

시하는 저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형아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건 알았다.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시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형아의 가방을 발견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서 펼쳤다.

서랍을 열어 색연필을 꺼낸 뒤 빈자리에 그림을 그렸다.

동글동글 동그라미.

거기에 꽃잎을 그려 넣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참 잘했어요’ 하는 표시였다.

팔락. 책을 넘겼다.

사각사각 사각형.

생각해둔 것을 풀고,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쌓여나갔다.

몇 개를 더 그리고 나서야 책을 덮고 그대로 가방에 넣었다.

완전 범죄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

중간고사 날.

강의 시간 전에 자리에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학생이 많았다.

미리미리 와서 훑어보는 건 어느 시험 때나 마찬가지인 풍경이었다.

나는 책을 책상에 올렸지만, 딱히 펼치지 않았다.

이미 외워둔 것을 중얼거리며 복습하고 있을 뿐이다.

그때 서수현이 내 옆으로 왔다.

“오빠.”

“어. 왔어?”

“오빠는 책 안 봐요?”

“안 보고 떠올리는 게 더 도움이 돼서.”

“지금 좀 재수 없지 않아요?”

“아닌데. 너는 공부 많이 했어?”

서수현이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아주 많이 했나 보다.

“전 밤을 새워가며 공부했죠.”

“밤새울 정도로 평소에 놀았다고?”

“못됐어!”

하지만 사실이었는지 서수현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원래 시험은 벼락치기긴 하지.

“열심히 복습해.”

“지금 보면 토 나올 거 같아요.”

“그럼 내가 보여줄게.”

나는 친절하게 책을 펼쳤다.

거기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응?”

“오빠. 몇 살인데 아직도 책에 낙서하고 있어요?”

“네가 해봤어? 이거 재밌어. 이게 아니지. 내가 그린 거 아니야. 아마도 시하가 그렸나 본데…. 언제 그린 거지?”

“아, 진짜요? 아하하. 잘 그렸네요.”

그림에는 네모난 의자가 그려져 있었다.

세워져 있지는 않고 쓰러져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의자가 그려져 있었고 마지막에는 골뱅이 모양의 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너무 귀여워.”

“나도 그렇게 생각해. 시하가 나보고 잘했다는 표시를 하고 싶었나 보네. 근데…….”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림이 참 오묘했다.

여기에 스토리를 얹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번뜩이려고 할 때 교수님과 대학원생이 들어왔다.

“책은 가방에 집어넣고 필기구만 책상 위에 놓으세요.”

시험이 시작되었다.

외운 대로 비유를 들어서 답안을 제출했고 나는 먼저 밖으로 나왔다.

서수현도 열심히 공부한 건 사실이었는지 내 뒤를 따라왔다.

“설마 답을 몰라서 대충 작성한 건 아니지?”

“설마요. 오빠. 이제 뭐 할 거예요? 시간 있으니까 같이 카페라도 갈래요? 학교 앞에 새로 카페 생겼는데 거기 맛이 궁금해서요. 서로 답이라도 맞춰보기도 하고.”

별로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었다.

“미안. 나는 가볼 데가 있어서.”

“어린이집이요?”

“응. 그리고 너. 카페인 마시는 것보다 잠이 더 필요하겠다. 눈에 아이라인인지 다크서클인지 구분이 안 가.”

“못됐어!”

나는 그런 서수현을 한 번 더 놀린 뒤에 자리를 떠났다.

폰을 들고 홍진수에게 연락했다.

「네! 시혁 씨!」

여전히 기운 넘치는 목소리였다.

가끔 부담되기도 하지만.

“혹시 의료 번역 업체 로랭스에 대해서 아세요?”

「알죠. 당연히.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죠?」

“거기 황기준 대표의 저서가 KI 미디어로 출판된 걸 봐서요.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 해서요.”

「으음. 연락처는 곤란한데요. 혹시 용건 있으시면 제가 대신 연락드려도 됩니다.」

“아. 그러면 이렇게 물어봐 주세요. 이장혁 아드님이 연락하고 싶어 하던데 혹시 연락처를 줘도 되냐고.”

「으음. 아버님이 황 대표와 아는 사이였습니까?」

“네. 아마도. 친구 사이였나 봐요.”

「대충 어떤 용건으로 물어보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저 호기심이죠. 아버지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고요.”

「일단 알겠습니다. 금방 물어봐 드리죠.」

통화가 종료되었다.

잠시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이장혁 아드님 이시혁 씨 맞습니까?」

“네. 맞아요. 혹시 황기준 대표님입니까? 저희 아버지 친구분이신.”

「맞습니다. 저번에 장례식에서 만났는데 기억 안 나십니까?」

“아…. 죄송해요. 그때는 저도 정신이 없었고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서요.”

「그럴 수도 있죠. 장혁이 일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 편하게 하세요. 저희 아버지 친구분이신데…….”

「그럴까? 그런데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서 연락했다고 하던데. 어떤 점이 궁금한지 알 수 있을까?」

나는 머릿속에서 말을 골랐다.

“그냥 대학 시절의 아버지라든가 혹시 통역가로서 일했던 일들이라든가. 그런 사소한 거요. 사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으음. 그래?」

“아!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장혁이 아들이라면 궁금해할 만하지. 장혁이가 초반에 기틀을 세워줄 때 도움이 많이 됐거든.」

“아버지는 가끔 급전 필요할 때만 도와줬다고 글에 적혀 있던데요.”

「가끔 툴툴거리면서 도와주는 게 매력이었지. 하하.」

아버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다른 이미지였는지도 몰랐다.

「괜찮은 시간에 이야기하자. 아저씨가 연락할게. 그래도 되지?」

“네. 그래 주시면 고맙죠.”

「그래. 편한 시간에 회사에서 보자.」

통화를 종료하며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경험이 많이 필요할지 모른다고.

시하에게 경험이 필요하듯이 나 역시도 세상을 보는 경험이 필요했다.

이번 만남이 또 다른 생각을 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어린이집에나 가볼까?’

나는 그전에 책에 그려진 시하의 그림을 다시 봤다.

사진으로 찍어서 편집한 뒤에 픽시브에 올렸다.

스토리텔링을 위한 글귀도 함께 넣어서.

***

-시하의 그림. 픽시브 업로드.

[제목 : Position competition(지위 경쟁)]

1. 각도를 만들며 쓰러진 의자 두 개 그림.

「타이머 25분」

2. 첫 번째 그림보다 높이 있는 쓰러진 의자 두 개 그림.

「타이머 5분」

3. 두 번째 그림보다 좀 더 높이 있고, 똑바로 세워진 의자 하나의 그림.

「단 하나의 의자」

4. 꽃무늬 그림.

「참 잘했어요!」

[좋아요] [하트] [퍼가기] […]

[siha.pepe.] [작품 목록]

#4cutcartoon #competition #Limitedtime

[댓글]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번에는 무슨 의미일까?

-헤시태그 보면 어느 정도 유추 가능해

-경쟁 사회를 나타내는 것 같아

-의자가 점점 올라가는데 쓰러지고 가장 높은 곳에 앉은 의자만 똑바로 세워져 있음

-남들보다 뛰어나야 저 왕좌에 앉을 수 있지!

-소름 돋아!

-진짜 소름 돋아!

해석은 점점 더해지고 있었다.

이걸 본 사람들이 자신들의 해석을 놓기 시작했다.

-경쟁 사회에서 가장 쉬운 분별력은 시간이야!

-와! 그래서 저 의자 각도가 시간을 나타낸다고?!

-밑에 적혀 있잖아. 멍청아!

-그것뿐만 아니라고. 5분. 25분. 이거 무슨 의미인지 알아?

-무슨 의미인데?

-뽀모도로잖아!

뽀모도로 기법.

1980년대 후반 프란체스코 시릴로가 제안한 시간 관리 방법론이었다.

25분을 일하고, 5분을 쉬는 시간 관리 방법론.

-!!!

-뽀모도로를 쓸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바쁜 생활을 비판한 거라고!

-미친. 이 짧은 4컷 만화에 그런 오묘하고도 심오한 의미가 있었단 말이야?!

-역시 엄청나! 5252 믿고 있었다고. 시하페페!!

실제로는 시혁이가 갖다 붙인 것뿐이다.

하지만 그걸 알 일이 없는 독자들은 여러 해석을 내놓기 시작했다.

-난 올라가는 의자 그림에 소름 돋았어! 이 작가는 천재야!

실제로 시하는 시혁이 앉은 의자를 보고 다양하게 그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이걸 몰랐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그런데 마지막 의자는 왜 이렇게 평범하게 그렸지? 결국, 왕좌 같은 지위를 차지하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지. 실제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경쟁하잖아!

-맞아! 그거야. 입시, 취업 같은 거 말이야.

-정말 대단한 것인 양 얻고 나면 말단 사원이지. 젠장!

-oh my god! 그런 것까지 생각해서 표현했다고?!

-이 작은 그림에 대체 얼마나 의미를 넣은 거냐고?!

시하는 그런 생각이 1도 없었다.

그저 집안의 의자를 그린 것뿐이다.

-그럼 저 꽃무늬 밑에는 ‘참 잘했어요!’라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야?

-저건 보통 어린애들에게 쓰이는 표현 아니야?

-이건 시하페페 그림체를 이해해야 해. 그림체가 귀엽잖아.

실제로 그림체가 귀여웠다.

-그게 왜?

-이건 경쟁에서 얻은 게 허탈하고 허무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칭찬해 주겠다는 의미지.

-위로의 말이라는 거야?!

-아니. 내 생각은 달라. 결국, 얻은 건 어린아이같이 조그마한 상이라는 거지.

시하가 만든 그림과 시혁이 만든 글귀.

두 개의 시너지가 이렇게 댓글을 활활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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