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4월 5일. 식목일.
체육대회에서 선물로 준 화분은 어린이집의 큰 그림이었다.
식목일날 쓰기 위해 준 화분의 선물.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식목일에 맞춰 씨앗이나 나무를 심는 날이었다.
식목일에 관한 설명을 하기 위해 선생님이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자. 여러분! 오랜만에 선생님이 이야기를 들고 왔어요! 다들 자리에 앉아보세요!”
시하가 먼저 자리에 앉자 옆에서 같이 놀던 승준과 하나도 조르르 앉았다.
7명의 아이 중 3명이 앉자 다들 따라 앉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자. 오늘은 잭과 콩나무 이야기를 할 거예요.”
승준이 말했다.
“어?! 나 아는데!”
“하나도. 하나도.”
선생님이 손가락을 가로 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에 인어공주 이야기도 알고 있던 이야기였나요?”
“아니요!”
선생님은 뿌듯한 얼굴을 했다.
이번에도 오리지널리티가 넘치는 이야기였다.
원장 선생님은 쓴웃음을 지었다.
원래 같이 일하던 저 선생의 꿈은 동화작가였다.
하지만 뜨지 못한 동화작가는 돈이 되지 않는다.
지금에서야 겸업하려고 이렇게 준비 중이다.
어쩌면 나중에 정말로 유명한 동화작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이야기 시작합니다!”
스케치북에 첫 그림이 나왔다.
잭과 엄마가 나오는 모습.
“옛날옛날에 잭과 엄마가 있었습니다. 잭과 엄마는 가난했죠. 그래서 잭은 소를 팔기로 했습니다.”
“엄마. 소 팔고 올게요.”
“그래. 비싸게 받아야 한다!”
그림을 넘겼다.
“잭은 소를 팔러 마을로 갔습니다. 그때 어떤 할머니를 만났어요.”
“얘야. 그 소 팔 거니?”
“네.”
“그럼 이 강남콩이랑 바꾸지 않을래?”
“네? 강낭콩이랑 소랑요?”
“그래. 이건 그냥 강낭콩이 아니라 마법이 걸린 강남콩이란다.”
“잭은 그 말에 넘어가 소랑 강남콩이랑 바꿨습니다. 잭이 집으로 돌아와 말했습니다.”
“엄마. 강남콩이랑 바꿨어요.”
“뭐라고?! 아니. 너무 어리석구나. 잭.”
“이건 그냥 강낭콩이 아니라 마법의 강남콩이래요.”
“너는 속은 거야. 이리 내.”
“엄마는 강남콩을 밖으로 던졌어요.”
스케치북을 넘겼다.
콩에 손과 발이 나오더니 갑자기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손과 손이 교차하는 모습.
“밖에서 콩이 노래를 불렀어요.”
“오빤 강남스타일~ 오~ 오~ 오빠 강남스타일.”
“엄마와 잭은 놀라서 밖을 보았어요.”
“엄마 보세요. 마법의 강남콩이라고 했잖아요.”
“이런 말도 안 돼!”
“이런 춤을 추는 콩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이 재밌다며 돈을 던졌어요.”
“허허. 재밌어.”
“재밌다!”
“어느 정도 돈이 쌓이자 잭과 엄마는 기분 좋게 빵을 살 수 있었죠. 그런데 다음 날. 콩이 없어지고 콩나무가 생겨났어요.”
아이들이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었다.
특히 시하는 눈에 힘을 주며 스케치북을 보았다.
부리부리.
“콩나무가 된 콩은 이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스케치북이 넘어갔다.
검게 그을린 구름을 나무가 손으로 잡아 먹으려 했다.
옆에는 흰 구름을 내뱉은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나쁜 공기를 먹고!”
“한 번에 좋은 공기를 네 사람에게 나눠줬어요.”
원장 선생님은 이제야 이야기를 왜 이렇게 바꿨는지 알았다.
식목일의 의미.
나무가 오염물질을 흡수한다.
큰 나무 한 그루는 성인 네 명이 하루에 숨을 쉬는 산소를 제공한다.
이걸 이야기로 푼 것이었다.
“그렇게 콩나무는 쑥쑥 자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욕심 많은 거인이 그 나무가 탐이 났어요.”
“흐흐흐. 이 나무를 뺏어야겠다.”
승준이 소리쳤다.
“안 돼! 내가 용서 안 할 거야!”
“하나도. 하나도. 시혀기 오빠에게 이를 거야!”
“아아?”
시하가 하나를 봤다.
왜 형아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는 옳은 선택이었다.
시하 역시도 이런 건 멋진 형아가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흡사 전대물에서 악당이 나타난 반응이었다.
다들 해치우고 싶어 하는지 손이 근질근질한 표정이었다.
선생님이 그걸 노렸다는 듯이 노련한 웃음을 보였다.
씨익.
“콩나무는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어요. 그래서 잭에게 부탁했습니다.”
“잭! 나를 구해줘. 거인이 나를 훔쳐가려 해.”
“뭐라고?!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내가 만든 콩을 먹어. 그러면 너는 강해질 거야.”
“알았어!”
“그렇게 잭은 콩을 먹었어요.”
스케치북 장면이 넘어갔다.
잭의 몸이 근육근육해졌다.
엄청난 힘을 넣은 것 같이 표현되어 있었는데 거인을 상대하려 했다.
“이 나쁜 놈. 내 주먹을 받아라!”
“잭이 주먹을 휘두르자 거인이 쿵 하고 쓰러졌어요.”
“크윽.”
“잭은 콩나무를 지켰습니다. 그걸 본 잭의 엄마가 말했습니다.”
“오! 잭! 정말 대단하구나!”
“엄마. 이제 제가 지켜드릴게요.”
“잭은 챔피언이 되어서 돈을 많이 벌어 빌딩도 3채를 샀습니다. 엄마와 잭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묘하게 구체적인 빌딩 수였다.
그건 상관없는지 애들이 손뼉을 쳤다.
짝짝짝.
승준이 일어났다.
“콩 머그면 강해질 수 있어요?!”
“하나도 콩!”
“아아! 시하도!”
선생님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번 구연동화로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하나. 식목일을 자연스럽게 전해줬던 점.
둘. 콩을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콩을 먹일 수 있게 된 점.
원장도 그걸 눈치챘는지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두 선생님의 눈에 좋은 시그널이 교류되었다.
‘잘했어.’
‘이 정도는 껌이죠.’
선생님이 일어났다.
“그럼 오늘 가지고 온 화분으로 강낭콩을 심어볼까요?”
“네!”
“그럼 여기 아래에 비닐을 깔아요.”
함께 아이들과 비닐을 깔았다.
시하도 열심히 도왔다.
가운데 흙은 붓고 애들에게 모종삽을 쥐여줬다.
물론 애들은 비닐 옷으로 갈아입었다.
“자. 선생님이 먼저 시범을 보일게요. 여기 있는 흙을 이렇게 떠서 화분에 넣어요. 꼭. 꼭.”
시하는 선생님을 따라서 흙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여기 강낭콩을 넣습니다. 다시 흙을 조금 담아주세요.”
시하는 콩을 보았다.
아주 작고 귀여운 콩이었다.
여기서 엄청 커다란 나무가 나와서 시하와 형아를 지켜주는 것을 상상했다.
“아아. 형아. 디켜.”
시하가 열심히 콩을 심었다.
선생님이 노래를 불렀다.
“씨. 씨. 씨를 뿌리고. 꼭꼭. 물을 주었죠~”
흙에 물을 주고 화분에 ‘이시하’라고 스티커를 붙였다.
완벽하게 심어진 화분이었다.
선생님은 그 화분들을 들고 갈 수 있게 포장해서 비닐에 넣었다.
“나중에 갈 때 들고 가세요. 아셨죠?”
“네!”
선생님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럼 다들 식목일에 맞춰 노래를 부를까요?”
“네!”
선생님이 피아노를 쳤다.
“씨. 씨. 씨를 뿌리고~ 꼭꼭 물을 주었죠~”
“하룻밤. 이틀 밤. 쉿 쉿 쉿.”
아이들이 신나게 부르기 시작했다.
시하도 열심히 따라불렀다.
이 화분에 콩나무가 나와서 좋은 공기를 만들고, 콩이 나와서 시하가 먹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형아를 지켜줄 힘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하는 몰랐다.
그게 바로 선생님들의 속셈이라는 것을.
원래 싫어하는 음식을 키우면 애들도 자연스럽게 먹게 되는 고도의 전략이었다.
아이들은 교육이라는 함정에 빠져버렸다.
***
대학생은 벌써 시험 기간에 돌입했다.
보통 중간고사, 기말고사로 나누어져 있지만, 강의마다 다를 수 있었다.
시험이 세 번인 경우도 있었고, 기말고사만 치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시하 보고 싶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참 무식한 방법이었다.
나는 녹음기를 켰다.
삑.
「한국어 부사의 정수는 뭘까? 그건 바로 의성어와 의태어다! 예를 들어볼까? 무거운 카메라면 ‘찰칵’이 아니라 ‘철컥’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
나는 노트북으로 타이핑을 했다.
수업 때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필기는 하지 않는다.
그저 놓치지 않고 ‘이해’할 뿐이다.
괜히 필기하다가 집중력이 깨어지며 못 듣는 말이 있으면 안 된다.
나름의 공부 방법이다.
아니, 그냥 학점을 잘 받는 방법이다.
‘물론 이걸 통으로 외우기만 한다고 잘 받는 건 아니지만.’
이를테면 재료로 사용하는 거다.
예를 들어도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을 예로 들고, 비유해도 교수님이 사용하셨던 거로 비유를 한다.
물론 이게 통하는 교수님이 있고, 강의가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런 거 하나하나 파악하려면 대학원생 선배님들에게 물어봐야 했다.
실제로 대학원생들이 채점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 교수님들은 직접 채점을 하신다.
‘마음에 들어야 하지.’
상대평가라 대충 볼 수도 없었다.
2학기에 교내 장학금을 받으려면 말이다.
그리고 성적만 좋으면 주는 교외 장학금.
선배님들이 기부해주시는 현금이 알짜배기였다.
등록금이 깎이는 것과 다르게 쏠쏠하게 챙길 수 있는 몫이었다.
‘체육대회에 참가했으니까 일단 기본적으로 학과 기여도 점수는 받았고…….’
토익을 미리 쳐뒀으니 영어 점수도 퍼센트로 반영될 것이다.
한마디로 이번에 성적만 잘 받으면 다음 학기에 공돈이 들어온다.
공부만 했을 뿐인데 돈이 들어오는 것이다.
‘시하 장난감도 하나 더 사줄 수 있고 좋네.’
기지개를 켠 나는 다시 노트북을 두들겼다.
그때 얼굴에 차가운 음료가 다가왔다.
“아, 차가!”
“오빠. 열심히 하시네요.”
서수현이 히죽 웃으며 커피 캔을 들이밀었다.
“아, 고마워.”
나는 이 호의를 받아들였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에요?”
“머니를 노리려면 어쩔 수 없지.”
“하긴. 다들 열심히 공부하니까요.”
“넌 안 해?”
“저요? 전 당연히 하죠.”
“그럼 공부해라. 괜히 애매한 B를 받아서 울상 짓지 말고.”
“선배 B 무시해요?”
“애매한 성적이잖아. 취업할 때 뭐라고 할래?”
“열심히 했지만, B를 받을 운명이었습니다. 뭐 이렇게요.”
“사실 학점을 보는 이유는 딱 하나긴 하지.”
“뭔데요?”
“성실성. 그거 말고 아무것도 없어.”
“그건 어떻게 아는데요?”
“내가 취업센터에서 근로해 봤으니까.”
뭐, 이름값은 먹어주는 것 같았다.
공대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대학 이름값보다는 교수 이름값이 영향을 미쳤다.
“무슨 말이에요?”
“예를 들면 공대에 오상환 교수님이 있지? 전자과 말이야.”
“네.”
“그 교수님이 이 학교 오기 전에 원래 대기업 반도체 회사에 다니셨어.”
“오~”
“재밌는 점은 설계로 기업 매출의 4배를 뛰게 했다는 거지. 그래서 파워가 엄청 강하단 말이야.”
“그래서 알력을 넣는 거예요?”
서수현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아니. 음. 인맥이라면 인맥일 수도 있겠다. 넌 잘 모르겠지만 보통 DRAM, SRAM 설계 쪽으로 빠지거든. 그렇게 되면 다른 설계 쪽은 공급이 없어진단 말이지.”
“오올~”
“그 교수님은 영악하게 EEPROM을 파고들었지.”
“어?”
“공급이 이 대학밖에 없는 거야. 설계 쪽으로. 그럼 기업으로서는 누굴 뽑겠어?”
“이 대학원생이요.”
“그렇지. 심지어 대기업에 일단 1차 서류는 그대로 통과된다고 봐야지.”
“와아. 그래서 다들 대학원생이 되는 거예요? 취직되니까?”
“그런 경향이 있지. 다른 학과는 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쪽 교수님은 그래. 괜히 기업이랑 공동 연구를 받는 게 아니지. 머니뿐만 아니라 학생들 취업에도 도움이 되니까 하는 거야.”
“대박~ 나도 대학원 다녀야 하나?”
“국문과는…….”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생각에는 영어라도 제대로 배워두면 좋을 거 같아. 기회가 빨리 뚫리거든.”
“오~ 번역?”
“뭐, 그런 것도 있고. 거긴 좀 힘들어. 차라리 기술 번역하는 게 낫지.”
“아, 그때 말했던 것처럼요?”
“어. 예를 들면…….”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떤 기억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오빠?”
“혹시 의료 쪽으로 관심 있으면 거기 한번 번역해 보던지. 한국 의료가 장난 아니잖아.”
“네?! 의학이요? 지식이 1도 없는데.”
“공부하면 되는 거지. 실제로 의료 전문으로 번역해 주는 업체도 있을 정도야.”
“진짜요?”
“대학생 때부터 만들어서 지금은 탄탄하다고 하더라.”
“그건 어디서 알았어요?”
“글쎄?”
의학 번역 지식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드디어 알 것 같았다.
‘정신없이 일하느라 확인을 못 했는데 아버지 노트북을 한번 뒤져봐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