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500)

31화

어린이집 합동 체육대회.

보통 이런 대회는 인원수가 적은 어린이집에서 모이기도 한다.

매년 강인대학교 체육관을 빌려서 하는데 어른들도 꽤 좋아했다고 한다.

특별히 어린이집에서 준비해야 하는 것은 체육대회에서 자랑할 부스였다.

각자 어린이집에서 하나씩 놀이를 만들어오는 것이다.

아이들이 안 다치고 재밌게 관심을 끌 수 있는 놀이.

이게 은근히 어렵다.

나는 이걸 만들기 위해 국문과 오형제들을 이끌고 어린이집으로 왔다.

2학년 과대가 한탄했다.

“합동이라니…. 사기다!”

뒤에 있던 4명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말은 없었잖아요!”

“안 돼! 합동이라니!”

“아니야. 아직 희망을 버리면 안 돼.”

“그래. 우리 철학과 이겨서 좋았잖아? 그놈들 구겨지는 얼굴이 볼만했는데.”

미안하지만 나도 합동인 건 몰랐다.

알았으면 말했겠지.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거래는 거래였고, 약속은 약속이었다.

어린이집에 도착한 우리를 원장 선생님이 반겨주셨다.

“올해 우리가 준비할 게임이 있어요. 애들이 좋아하면서 참여를 유도할 게임.”

“그런 게 있나요?”

원장 선생님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이게 그렇게 비장해질 일인가 싶었다.

“예로부터 어린이들에게 과자 준다고 해도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했죠.”

“그랬죠.”

“그래서 생각한 게 박 터뜨리기예요. 그 안에 과자를 넣는 거죠.”

“애들이 좋아하겠네요.”

한 입을 맛볼 수 있는 과자면 더 좋을 것이다.

의외로 고전적인 게임이었다.

안에 과자가 있는 것만 빼면.

“왕도는 언제나 옳죠.”

“그건. 그렇죠. 그럼 박만 만들면 되겠네요?”

“아니요. 여기에 하나 정도 더 만들어야 해요. 아니면 할 게 없어서. 박은 원래 있는 거고요.”

“아, 그래요?”

“혹시 재밌는 아이디어 같은 거 없어요? 애들이 참가할 의욕을 가지는 거라던가?”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가 나는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요즘 시하가 빠져있는 펭귄몬스터.

물론 펭귄에 빠진 거긴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인기 캐릭터였다.

그렇다면.

“공 던지기를 하죠. 볼풀공 말이에요. 귀여운 박스 구멍에 많이 넣으면 선물을 주는 거죠. 캐릭터는 펭귄몬스터로요.”

원자 선생님도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선물은 뭐로 주죠? 또 과자?”

“밥도 먹어야 하는데 과자는 조금 그러니까 이건 어때요?”

나는 시하가 그린 그림을 이미지 파일로 폰에 저장해 두었다.

내가 꺼낸 것은 그중에 시하의 팬아트 그림이었다.

“시하가 그린 팬아트를 스티커로 만들어서 선물로 주는 거죠.”

“흐음. 괜찮네요. 예쁘게 포장하면 인기 많을 것 같고. 갖고 싶어서 참여도 열심히 하겠어요.”

“웬만하면 다 받을 수 있게 난이도는 쉽게 하고요.”

“그러면 되겠네요. 괜히 못 받아서 우는 아이가 생기면 안 되니까요.”

뒤에서 듣고 있던 오형제 중에 과대가 말했다.

“제가 아는 데가 있는데 거기서 하면 싸게 할 수 있어요. 100개에 스티커 2만 원? 그 정도면 금방 하죠.”

“흐음. 100개면 충분하긴 하겠네요. 모자란 것 같으면 200개 하면 되니까요.”

스티커는 애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 중 하나지.

거기다가 펭귄몬스터의 주인공인 황제펭귄의 스티커다.

이건 애들이 넘어올 수밖에 없다.

***

체육대회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하는 것들이 있다.

달리기, 줄다리기 등등.

우리는 체육관에서 하얀 테이프로 레일을 그렸다.

아이들이 쉽게 달릴 수 있는 일자 레일.

도착하면 다음 사람이 뛰게 되는 릴레이였다.

그것 말고도 준비할 게 많았다.

아이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풍선이라든가, 스티커 주문이라든가, 행사표를 만들든가, 스텝의 동선과 해야 할 방침이라든가.

다섯은 조금 부족한 건 당연하니 여기서 추가로 봉사 활동 지원자를 모았다.

막상 당일 날이 되면 정신없이 바빠질 하루였다.

물론 당일에 나는 보호자로서 시하랑 같이 있을 생각이다.

준비가 끝난 뒤 나는 취업센터로 갔다.

“그래서. 준비는 잘돼 가고?”

오랜만에 만나 문도환은 히죽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나는 입에 문 담배를 뺏었다.

“형. 나 시하 만나러 가야 해.”

“아차! 몸에 냄새 배겠다.”

문도환이 미안하다는 듯이 담배를 다시 넣었다.

아쉽다는 얼굴이 가득한 것을 보니 아이에게 사탕 뺏은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이참에 끊는 건 어때?”

문도환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너. 너. 지금 롤 계정을 삭제하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나에게 쏟은 거야. 알아?”

“미안해. 그 정도로 형이 애연가인 줄 몰랐어.”

“그래. 네가 나에게 엄청난 폭언을 퍼부었지만, 형이 용서한다.”

“그게 폭언 수준이었다고?”

“그렇지.”

나는 그저 피식 웃었다.

가끔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맘이 편하기는 하다.

“그런데 넌 괜찮아?”

“뭐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는 거지.”

“별로.”

“체육대회 그냥 애들에게 맡기면 되는데 왜 또 도와주고 그래.”

“생각보다 너무 힘들 거 같아서 그러지. 그래도 당일 날에는 시하랑만 놀 거야.”

“그것 때문이 아니잖아.”

나는 그냥 웃음을 보였다.

문도환에게는 내가 무리하는 거로 보였던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육아, 일, 학과 생활 등등.

“해야 하는 일인데. 뭐.”

“힘들면 말해. 나라도 도와주러 갈 테니까.”

“힘들 게 뭐 있어.”

“몸 말고. 잊으려고 노력하는 거.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거. 그런 거 말이야.”

“…….”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바빠서 아무 생각도 안 들어. 그게 좋아.”

“네가 그렇다면야…….”

“금요일에 체육대회 하는데 시간이 있으면 형도 보러와. 나 완전 열심히 시하랑 놀 거니까.”

“두 사람 노는 거 봐서 뭐 하게?”

“하하. 그렇지? 근데 좀 와주라.”

“왜?”

“시끌벅적하면 시하가 덜 볼 것 아니야.”

“뭘?”

“부모님과 함께 있는 아이들의 모습.”

“…….”

이번에는 문도환이 입을 다물었다.

“넌. 너 좀 걱정해.”

“나야 으른이니까.”

“으른 좋아하네. 내가 봤을 때 너도 애야.”

“하하. 그런가? 그럴지도?”

나는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에 태양이 가려져 있지만 나쁘지 않은 흰색과 푸른색이다.

“형. 나 초등학교 1학년 때 말이야. 체육대회를 했는데 딱 저 하늘이었다?”

“그래? 날씨 좋았겠네.”

“응. 날씨가 엄청 좋았어. 근데 나는 가정통신문을 쓰레기통에 버렸어. 아버지가 바쁜 것도 알고. 다 아니까. 잠 줄여가며 일하고 나 돌본 것도 아니까.”

“으음.”

“그때 부모님들을 보니까 조금 슬프더라. 나는 혼자 열심히 체육대회를 즐겼거든. 그래도 쪼르르 엄마에게 가는 애들이 너무나 부러웠어.”

문도환은 옆에서 가만히 들어주었다.

“백팀이 이겼는지, 청팀이 이겼는지 시상식을 하는데 아빠가 정문에서 달려오더라.”

“엄청 놀라셨겠네.”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막 달려오면서 나를 안는 거야. 그때 뭐라고 하셨는지 아직도 생생해.”

“다행히 혼내지는 않으셨네.”

“응. 그때 아빠가 이렇게 말했어.”

「미안해. 미안해. 아빠가 미안해. 눈치 보며 크게 해서 미안해. 아빠가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괜히 어른인 척 아빠 배려 안 해줘도 돼. 이런 건 다음에 꼭 알려줘. 알았지. 시혁아?」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내뱉었다.

“근데 나는 그게 안 됐어. 늘 아빠가 더 쉬셨으면 했고 나 때문에 힘들지 말았으면 했지. 나는 그렇게 눈치 보는 아이가 되어 있었어.”

“후우. 너는 이런 이야기를 너무 아무렇지 않게 하더라.”

문도환이 담배가 마려운지 라이터만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웬만하면 시하는 그냥 철없이 컸으면 싶어. 남들 다 욕하고 잘못 키웠다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래. 그냥 눈치 안 봤으면 좋겠어.”

“알았어. 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

나는 그런 문도환에게 피식 웃음을 보였다.

“고마워. 그날 형이 엄마 해. 나는 아빠 할게.”

“야. 내가 아빠 해야지.”

“그래? 그럼 나는 형아 할게. 형은 엄마, 아빠 다 해.”

“뭔 말도 안 되는 역할이야? 고생은 나만 하라고?”

“어. 형이 두 아이를 상전으로 모시는 거지.”

“그래.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아참. 그래도 처음부터 못 간다? 오늘 야근 좀 해야겠네.”

“무리해가며 안 와도 돼. 그냥 얼굴만 잠깐 비춰주면…….”

“체육대회 종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시간 뺄 수 있거든?”

“나도 학교에 취직할까?”

“맘에도 없는 소리 하긴.”

역시 말하기 잘했다.

맘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문도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인연을 소중히 할 생각이다.

***

-어린이집 합동 체육대회 당일.

북적북적.

이 넓은 체육관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안에는 5곳인 어린이집과 함께하니 과연 정말 많았다.

다섯 개의 부스들도 굉장히 재밌게 꾸며져 있었다.

“시하야.”

“아아.”

“도장 받을 표 목에 걸자.”

나는 시하에게 표를 목에 걸어주었다.

여기에 다섯 개의 도장을 받는 것이 체육대회의 첫 번째 행사였다.

참고로 시하는 백팀이다.

“형아.”

“응. 빈칸이네?”

“아아.”

“여기에 도장 콱 받는 거야. 그러면 선물도 준대.”

“아아.”

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하게 도장이란 것도 스티커와 함께 먹히는 요소였다.

“그럼 이제 출발해 볼까?”

“아아.”

그때 승준과 하나가 엄마를 데리고 달려왔다.

“시하야~!”

“시하야~!”

분명 이란성 쌍둥이일 텐데 어떻게 달리는 폼이 똑같았다.

느낌이 말이다. 느낌.

열심히 달려와서 시하의 양손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나도 가치.”

“아아. 가티.”

오랜만에 승준 엄마와 인사를 했다.

“시혁 씨. 오랜만이에요.”

“네. 오랜만이죠? 요즘 시하가 부쩍 승준이 덕분에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저도 승준이와 하나에게 말 많이 들어요. 어린이집에서 뭐 했냐고 물어보면 항상 시하랑 놀았다고 하더라고요.”

“시하도 그래요. 하하.”

“어머. 애들이 저리로 가네. 저희도 가요.”

“네.”

우리는 애들을 데리고 첫 번째 부스로 갔다.

애들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활쏘기였다.

흡착판이 달린 활이었는데 손으로 당기는 활이 아니었다.

모양은 석궁이었고 총처럼 쏠 수 있었다.

‘요즘 장난감은 신기하네.’

도장을 받으려면 표적지에 3발이 맞아야 한다.

“시하야. 파이팅.”

이번에는 내가 시하를 응원했다.

표적지는 5개가 있었고, 애들이 나란히 다섯 명이 섰다.

승준, 하나, 시하 순으로 서 있는데 너무 귀여워서 사진 찍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찰칵. 찰칵. 찰칵.

그때 옆에서 한 애가 시하를 보더니 웃음을 보였다.

“뭐야. 백팀이잖아. 못해라!”

아주 애가 벌써부터 승부욕에 휩싸여 있다.

시하는 아이를 보았다.

파란색 머리띠를 한 것을 보니 청팀인 걸 알아차린 것 같다.

“처치.”

“시하야. 처치가 아니라. 청팀.”

“처치.”

일부러 그러는 건가?

“청팀.”

“처키.”

“아무튼, 파이팅. 이겨야 해.”

옆에 있는 하나가 환한 미소를 시하를 응원했다.

“시하야~ 이겨~”

“아아.”

시하 옆에 있는 애가 하나를 보고 입을 벌렸다.

“우와. 예쁘다.”

하나가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흥.”

오늘 하나가 무척 도도한 아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저런 새침 대는 모습이라니.

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시하를 노려봤다.

“내가 얘보다 잘해.”

뒤에 있던 아이 엄마가 곤란하다는 듯이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나는 속으로 시하가 이기길 기원했다.

앞에 있는 스텝이 말했다.

“그럼 모두에게 화살 10개를 줄게요. 3발을 여기에 맞춰야 도장을 줍니다. 자! 힘내세요.”

참고로 앞에 있는 스텝은 국문과 5형제 중 한 명이었다.

나는 고생한다는 의미에서 엄지를 들었다.

“자. 시작.”

승준이 싱긋 웃으며 석궁을 들었다.

“난 10개 다 마출 거야.”

“하나도!”

두 사람이 방아쇠를 당기자 화살이 날아갔다.

휙! 아쉽게도 조준이 안 됐는지 빗나갔다.

나는 시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응?”

시하는 엎드려 쏴 자세를 하고 있었다.

‘저거 내 훈련병 때 찍었던 사진이랑 똑같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