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나는 어제 업로드한 것을 보았다.
저번에 올린 4컷 만화의 인기가 좋아서 ‘스토리’를 살짝 가미해서 넣었는데 반응이 상당했다.
‘이래서 SNS에 중독되는 건가?’
은근히 시하의 그림 칭찬에 어깨가 으쓱한다.
나는 곧바로 글을 넣는 작업을 시작했고, 업로드했다.
“오빠. 여기서 뭐 해요?”
“응? 아!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서수현이 다가오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 이상한 거 숨긴 건 아니죠?”
“아니거든? 숨길 게 뭐가 있다고…. 근데 또 빈 강의실에는 왜 왔어? 나 찾은 건 아니지?”
“제가 맨날 오빠만 찾는 줄 알아요?”
“그러게. 왜 이렇게 날 찾을까?”
“제가 오늘은 도와주러 온 거거든요? 여기 있지 말고 빨리 나가요.”
“왜? 아직 시하 데리러 가려면 멀었는데?”
“그게 아니라…. 이번에 인문대학 체육대회 있잖아요.”
“아…….”
“잊었어요? 1학기 때 하잖아요. 근데 우리 국문과에 실력 좋은 애들이 필요해서 지금 오빠 찾고 있다니까요.”
“내가 왜? 나 안 해. 나 3학년이야.”
“3학년이면 뭐 해요. 1, 2학년 때…. 아니지. 1학년 때는 나는 모르니까. 2학년 때 이래저래 불려갔다면서요. 활약도 했고.”
“그건 그런데…….”
솔직히 그때는 선배들이 억지로 끌고 가서 어쩔 수 없었다.
나름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고.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어서 찾아오기 전에 도망쳐요.”
“어, 그래. 도망가야겠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톡으로 연락 오면 가뿐히 거절할 걸 애들이 알고 있으니 직접 찾아와서 약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무서운 놈들이었다.
나는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그때 문이 열리며 남학생 5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봐. 이봐. 과대가 배신자라니까. 내가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거든.”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우리 국문과의 희망이십니다.”
“이번에 다른 건 몰라도 철학과는 이겨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한숨을 쉬었다.
“대체 왜?”
“선배님. 축구 한 게임만 뛰어 주세요.”
“아니. 그거 말고. 철학과는 왜?”
“저희 2학년이 교양수업을 철학과랑 같이 듣는데 토론 수업 때 박살이 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과에게는 다 져도 철학과에는 질 수 없습니다.”
2학년 과대가 비장한 표정으로 열변을 토했다.
“나 바빠. 이래저래 할 일이 있다고.”
“선배님. 걱정 마세요. 서로 공강 시간 맞춰서 예선전 치르기로 했으니까요. 선배님 공강이 꽤 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미 모든 정보를 모았네.
다 알고 왔다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수업을 좀 채울 걸 그랬다.
물론 시하 보고, 일한다고 그럴 수는 없겠지만.
2학년 과대가 말했다.
“철학과 3학년에 강요한 형님이 그러던데요? 1학년 때 꽤 잘 찼지만 ‘졌잘싸’에 대명사라고.”
나는 이런 도발에 걸리지 않는다.
“공강 시간 언제?”
다만 저 다섯 명이 쉽게 안 보내줄 것 같아서 말한 것뿐이다.
절대 도발에 걸려서가 아니다.
2학년 과대가 환하게 웃을 때 내가 입을 열었다.
“공짜는 아닌데?”
2학년 과대가 말했다.
“잘 못 들었습니다?”
“공짜는 아니라고. 너희들이 생각한 것보다 내가 시급이 꽤 되는 남자라서.”
“그럼 저희가 다섯이니 학식으로 딜을 보죠.”
역시 2학년 과대.
노련하게 딜을 할 줄 아는 남자였다.
하지만 돈이 많지 않은 대학생에게 밥을 뜯어 먹을 수는 없었다.
“학식은 됐고. 일 하나만 해주라. 나도 노동력을 제공하잖아?”
“음…. 일단 들어보고요.”
“하겠다고 안 하면 나도 안 할래.”
“으으.”
아무래도 곤란하긴 하지.
체육대회에서 뛰고 싶은 사람이 별로 없다.
잘하는 애들도 없고.
아마 나를 꼭 스카우트하고 싶을 거다.
2학년 과대는 뒤에 있던 2, 3학년과 의논을 나누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상한 것만 아니면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래? 잘됐네. 사실 어린이집에도 체육대회를 할 거거든. 거기에 일손이 필요하다네? 너희가 와서 좀 도와주면 좋겠어.”
“아, 그거야. 어렵지 않죠. 전 또 뭐라고.”
쯧쯧.
애들이랑 놀아주는 것을 쉽게 보네.
낮잠을 자고 충전하는 애들 체력은 무한의 원자로 에너지를 받은 것과 같다.
“참고로 이번 한 경기만 뛸 거야.”
“당연하죠. 철학과만 이기면 됩니다. 철학과만.”
“나중에 도와주면서 힘들다고 하지 마.”
“아아. 그럴 일은 없죠. 애들 노는 걸 도와주는 것뿐인데.”
나는 씨익 웃었다.
비록 7명이 하는 체육대회지만 어른들도 참가하면 배로 힘들 것이다.
의외로 스텝들이 이것저것 치워야 할 게 많으니까.
물론 나도 경험해 보지 못해서 잘 모르지만 원래 행사라는 게 뒤에서 준비해 주는 사람이 제일 힘든 법이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할게.”
우리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
-국문과 vs 철학과 축구 경기의 날.
나는 몸을 풀었다.
“아아. 형아!”
“응. 그래.”
나는 시하가 손을 흔드는 것을 보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냥 어린이집에서 이런 일이 있다고 말했는데 선생님이 애들을 끌고 나왔다.
“시혀기 형. 이겨!”
“고마워. 승준아.”
“하나도 시혀기 오빠가 이겨!”
“고마워.”
뭔가 문장이 이상했지만, 뜻은 제대로 전해졌다.
이렇게 애들이 보는데 실망하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옆에는 국문과 학생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애들을 바라봤다.
복학한 3학년 학생이 응원을 주도했다.
“국문과! 국문과! 울트라캡숑 국문과!”
그 응원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변에 있던 2학년이 말했다.
“으아악. 언제 적 응원 구호야.”
하지만 그 반응에 굴하지 않고 계속 응원을 했다.
“국문. 국문. 국문. 국~문! 국문. 국문. 국문. 국문~”
의외로 참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저 노래를 들은 승준과 하나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국물~ 국물~ 국물~”
“울드라 캐쇼 국물과.”
국물이 울고 있는 응원이 되었지만 재밌으면 상관없겠지.
시하 역시도 신이 나는지 응원을 해댔다.
“구구. 구구.”
“귀여워.”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형아 공차고 올게.”
“아아. 형아. 화티.”
“시혀기 형. 파이팅.”
“시혀기 오빠. 이겨~”
나는 애들의 응원을 들으며 축구장 위로 올라왔다.
선수들을 보니 2학년 과대도 있었고, 나에게 발린 동기도 있었다.
쟤는 왜 있어?
“쟤 잘해?”
내가 2학년 과대에게 물어보자.
“아. 저 선배님이요? 듣기로는 초중고 수비수를 자주 맡았으며 군대에서는 병장 때 스트라이커의 재능을 깨우쳤다는데요?”
“어. 그렇지. 계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재능이 깨우쳐지긴 하지. 그래서 공격수라고?”
“아니요. 그냥 수비하라고 설득했죠. 솔직히…. 크흠. 못 미덥잖아요.”
“으음. 그렇긴 하지.”
솔직히 나는 인재가 너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철학과를 이길 수 있을까?
삐익.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툭.
공이 굴러갔다.
2학년 과대는 MF를 맡았는데 윙어인 나에게 패스를 해주었다.
공을 차는 시늉을 하며 한 명을 제쳤다.
이런 단순한 것에 걸리는 애가 있을 줄이야.
나는 몸을 좌우로 흔들며 앞에 있는 공격수에게 공을 찔렀다.
철썩! 골망이 흔들렸다.
제대로 된 어시스트에 신입생들의 응원이 터졌다.
“국문과! 히트다! 히트! 국문과! 히트다! 히트!”
응. 울트라캡숑보다는 나은 것 같다.
옆에 있는 시하도 학생들을 따라 엄지를 들었다.
“히트. 히트.”
“하트. 하트.”
“하나도? 하나도?”
멀리 있어서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셋이서 사이좋게 응원하나 보다.
흐뭇하게 보고 있을 때 철학과 한 명이 말을 걸었다.
철학과 3학년 강요한.
같은 학번이었고 1학년 때 체육대회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이야. 실력 여전하네.”
“오늘은 우리 과가 이길 것 같은데?”
“그거야. 마. 해봐야 알지. 아직 시간 많다. 아이가.”
“그래. 나중에 보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경기가 시작되자 아까보다는 더욱 열기가 뜨거워졌다.
막상 경기를 뛰게 되면 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다.
툭. 툭.
공이 강요한에게 갔다.
앞을 막고 있는 수비수는 이름 모를 우리 동기.
초중고 합치면 12년 수비 경력.
과연 그 경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마치 신병의 수비처럼 순식간에 뚫려버렸다.
그러면서 아깝다는 연기와 나는 최선을 다해 막았다는 표정이 압권이었다.
누가 쟤를 넣었어?!
2학년 과대도 착잡한 표정으로 골문에 들어가는 공을 보았다.
이것으로 1 대 1.
아직 승부는 모른다.
***
시하는 손에 땀을 쥐고 형아의 경기를 보았다.
골이 들어갈 때는 좋았지만, 골이 먹혔을 때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형아…….”
승준이 화가 났는지 콧바람을 뿜었다.
“시혀기 형아는 지지 않아!”
“하나도 응원할 거야.”
시하도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옆에 있던 서수현이 시하에게 말했다.
“이럴 때 더욱 응원해야 해. 자, 다들 국문과! 히트다. 히트.”
“국! 히트. 히트.”
“국물! 히트~”
“히트!”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되자 애들이 다른 곳을 보았다.
선생님도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새로운 것을 꺼냈다.
“자. 이제 간식 먹을 시간이에요.”
애들의 눈이 빛났다.
시하만이 경기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서수현이 과자를 받아서 시하 손에 쥐여주었다.
“먹으면서 보자. 시하야.”
“아아.”
옆에 있던 국문과 사람들도 어느새 어린이집 애들을 둘러쌌다.
“진짜 애들 귀엽다.”
“몇 살이에요?”
응원은 전반전에만 하고 다들 마음은 귀여운 애들에게 가 있었다.
그때 승준이 말했다.
“시하야.”
“아아.”
“우리도 가자.”
“아?”
“내가 사커 알아. 교체야. 교체.”
“아?”
“사람을 바꾸는 거야.”
“바꺼?”
“응. 너무 답답해. 나라면 시혀기 형아를 도울 수 있을 텐데.”
“아아.”
시하도 형아를 돕고 싶었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그 소리를 듣고 살며시 웃었다.
“교체보다는 시혁이 형, 오빠에게 힘을 주면 되는 거예요.”
“응?”
“아?”
선생님이 일어서서 팔을 쭈욱 뻗고 손바닥을 이시혁에게 향했다.
“이렇게 기운을 주는 거예요. 다들 해보세요. 으아아아.”
“아아!”
그건 시하도 잘할 수 있는 거였다.
시하가 손바닥을 펼치며 형아에게 기운을 보냈다.
다른 아이들도 선생님을 따라 했다.
원장 선생님은 그 귀여운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찰칵.
그때 이시혁이 빠르게 두 명을 제치더니 그대로 슛을 때렸다.
철썩!
모두의 기운이 공을 넣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신나서 두 팔을 위로 올리며 환호했다.
“형아!”
“전해져써!”
“하나의 힘이야!”
다들 자기 힘이라고 주장하다가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의 마술 같은 방법이 너무나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도 그렇게 될지 몰랐기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자. 선생님, 말이 맞죠?”
“네!”
“앞으로 선생님 말, 잘 들어야 해요.”
“네!”
어린이집 선생님.
그녀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노련한 사람이었다.
축구의 결과는 스코어 2 대 1.
국문과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오늘 시하는 형아의 멋진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저녁을 준비했다.
오늘 하루 응원하고 애들이랑 논다고 지쳤을 만도 한데 시하는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오늘은 뭘 그리나 보니 시하표 펭귄을 그리고 있었다.
없었던 엄지도 생겼다.
‘오늘 히트다. 히트. 응원이 마음에 들었나 보네.’
저 그림에 [히트다. 히트] 글자나 [파이팅!]을 써넣으면 될 것 같았다.
의외로 이모티콘 그림 준비도 착실히 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시하 입장에서는 그냥 그림을 그리는 거지만.
“시하야. 밥 먹자.”
나는 시하에게 밥을 먹이고, 씻겼다.
시하의 펭귄 가방을 열어 가정통신문을 꺼냈다.
어린이집에서 미리 말해준 대로 체육대회를 하나 보다.
그런데 걸리는 단어가 있다.
[어린이집 합동 체육대회]
선생님.
합동이라는 말은 없으셨잖아요?
그래서 봉사 활동으로 스텝이 필요했던 겁니까?
괜찮다. 나에게는…….
슈파. 슈파. 슈파. 강인대 엔진 소리.
국문과 오형제가 있으니까.
나를 축구 한 경기, 뛰게 한 대가로 애들이 고생하게 생겼다.
‘이상하게 2학년 과대가 슈파. 슈파.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