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500)

29화

아이스크림으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서 우리는 마트로 향했다.

어차피 가야 하기도 했다.

요즘 번역 일을 하느라 카페인을 많이 찾게 되니까.

커피믹스를 사야 했다.

역시 커피는 막심이지.

내가 그 말을 하자 외국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미국에 있는 집으로 막심을 보내줬더니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알리사도 옆에 있는 외국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한국에만 있기에 너무 아까워. 세계에 퍼트려야 해!”

언젠가 믹스커피가 국위선양을 할지도 모르겠다.

한국보다 더 알려지게 될지도?

“시하야. 과자 먹고 싶어?”

“아아. 형아.”

막상 슈퍼에 오니까 보이는 것이 과자 천국이었다.

나는 검지를 들어 가로로 그었다.

“자!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사줘?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하나만 골라 봐.”

“아아.”

시하가 과자를 노려봤다.

어디서 배웠는지 손으로 미간을 잡으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하가 선택하기에 과자의 종류는 너무 다양했다.

“아아. 형아.”

“응? 골랐어?”

시하가 고른 것은 감자 맛 봉지 과자였다.

“아이스크림도 고르자.”

“아아.”

나는 시하를 들고 아이스크림을 보여줬다.

또 미간을 잡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형아. 저거.”

“응? 아. 수박 아이스크림?”

“아아.”

나는 시하랑 같은 수박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계산을 했다.

봉지에 담은 것은 시하가 들었다.

“그렇게 좋아? 봉지를 들 정도로?”

“아아. 조아.”

요즘 곧잘 말을 잘해서 좋았다.

조만간 문장들도 잘 말할 것 같았다.

이제는 말하는 것에 대해서 안심을 해도 될까?

“그럼 집에 빨리 가자.”

“아아.”

“이제 형, 누나들에게도 인사해야지. 바이바이.”

“아아. 바이바이.”

시하가 작은 손을 흔들자 유학생들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뚝딱 해치우며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도도도.

“시하야. 씻어야지.”

“아아.”

나는 시하를 잡고 열심히 씻겼다.

시하는 저항 하나 없이 나에게 몸을 맡겼다.

시하는 개운한 얼굴. 나는 초췌한 얼굴.

오늘따라 굉장히 피곤했다.

“또 그림 그려?”

“아아. 형아.”

“그래.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리나 보자.”

나는 시하의 그림을 보았다.

오늘 그리는 그림은 마트에서 사 온 과자와 믹스커피, 계산했을 때 꺼낸 돈이었다.

팔도 있고 다리도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열심히 발을 퐁당퐁당 흔들며 그리는데 너무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

“크큭. 너무 귀여워서 그랬어.”

“아아.”

자기가 귀엽다는 것을 아는 걸까?

아니면 지금 그림 그리는 데 집중하고 싶어서 고개를 돌린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시하가 좋아하면 된 거지. 뭐.

‘그것보다 이 그림들도 업로드해야겠는데? 흠. 이번에는 어떻게 구도를 짜서 만들어보지?’

나는 살짝 고민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KI 미디어.

홍진수는 이시혁이 보낸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굉장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다.

유학생이 보낸 직관적인 감평.

사실 아무리 글을 많이 봤다고 해도 편집자인 자신은 한국 문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오히려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놓치는 부분이 많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디 보자.”

유학생들의 반응을 정리하자면 이랬다.

[매력적인 서사]

[묵직한 맛이 살아있는 글]

[적을 벨 때의 호쾌한 맛이 있다]

[치밀하게 설계한 심리 싸움도 기대된다]

이것만 봤을 때 먹힐 것 같다는 측면에서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까지 엄습해 왔던 불안감이 사라지는 느낌.

“역시 시혁 씨야!”

이시혁. 가지고 싶다. 이시혁.

이 애를 어쩌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잘 구슬려서 넘어오게 만들지?

천생 편집자다!

아니, 번역 능력까지 완벽하게 갖춘 편집자!

번역할 사람은 얼마든지 많다.

이렇게 편집자로서 능력을 갖추고 조율을 하면 번역자들의 능률이 더 오를 것이다.

저번에도 생각했지만 이시혁은 누군가와 협업을 했을 때 빛을 발하는 인재다.

풍부한 지식, 날카롭게 핵심을 찌르는 능력.

한 작품의 번역으로 매달리기에는 정말 아까운 능력이었다.

좀 더 날개를 펼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 KI 미디어에 입사해야지. 암.”

홍진수 과장의 머릿속에는 기승전 KI 미디어였다.

그렇게 만족스럽게 보고서를 보고 있는데 링크에 요상한 게 있었다.

“이게 뭐지?”

아무래도 이시혁이 저장하다가 잘못해서 링크를 붙인 것 같았다.

“픽시브라면 거기 아닌가?”

홍진수가 사이트를 클릭했다.

나온 것은 최근에 올려진 그림이 보였다.

제목 : A wise life of prison cell(슬기로운 감빵생활)

1. 과자 봉지 캐릭터 그림.

[과자 대신 질소로 채웠지!]

2. 아이스크림 캐릭터 그림.

[가격은 올리고 크기는 작아졌지!]

3. 믹스커피 캐릭터 그림.

[원두보다 설탕과 프리마가 많지!]

4. 천 원짜리 캐릭터 그림.

[나 때는 말이야! 과자를 엄청 살 수 있었어!]

[좋아요] [하트] [퍼가기] […]

[siha.pepe.] [작품 목록]

#prison #4cutcartoon #Character

물건들에 눈이 점으로 찍혀 있었다.

팔다리는 선 하나로 표현했는데 그게 또 귀여웠다.

더욱 웃긴 건 제목과 밑에 있는 설명 글이었다.

“시혁 씨가 이런 웃긴 것도 보는구만. 응? 근데 작가 이름이 익숙하네? 시하페페?”

홍진수는 생각에 잠겼다.

시하라는 이름에서 시혁의 귀여운 동생이 떠올랐다.

‘에이 설마. 아직 세 살인데…….’

홍진수는 자신의 어이없는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저 시혁이 시하와 이름이 같은 계정을 봐서 이런 걸 보는 거로 생각했다.

그게 그나마 말이 되니까.

“근데 이거 재밌네.”

홍진수가 [좋아요]와 [하트]를 누르고 댓글을 보았다.

-그림체 너무 귀여워요♡♡

-이제 사물 자체를 의인화한 건가?

-제목이 너무 웃겨요ㅋㅋㅋㅋ

-나도 저런 경험 있어. 과자 업체들 전부 질소를 우리에게 팔아!

-맞아. 우리는 질소를 돈 주고 사 먹는 거라고?!

-궁금한 게 있는데 믹스 커피가 뭐지?

-한국에 있는 인스턴트커피인데 정말 맛있어! 내가 캐리어에 한가득 들고 공항으로 갔잖아.

-나는 저 돈에 공감해. 옛날에는 진짜 과자가 값이 싸서 1달러로 정말 많이 샀었는데.

다들 공감하는 게 많은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흠. 한국 사람은 없나?’

아직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 사람이 없는 건가 싶었다.

‘이런 재밌는 걸 나만 알 수 없지!’

홍진수는 링크를 KI 미디어 단톡방에 올렸다.

그는 잠깐의 재미를 챙길 줄 아는 상사였다.

띠링.

[대표 : 일 안 하고 이거 보고 있었어?]

홍진수가 잘못해서 대표님도 있는 방에 링크를 올려버렸다.

[홍과장 : 가끔의 힐링은 작업에 효율을 가져다줍니다. 공부 다 하고 쉬는 타이밍에 엄마에게 걸린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오해십니다!]

[홍과장 : (눈물을 닦는 햄스터 이모티콘)]

[대표 : ...]

[대표 : 귀여운 척하지 마라.(엄근진)]

밑에는 직원들의 ‘ㅋㅋㅋ’로 도배가 되었다.

***

-다음 날. 어린이집.

오늘은 선생님이 구연동화를 읽어주는 날이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애들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 여러분! 오늘은 선생님이 인어공주에 관한 이야기를 할 거예요.”

그때 승준이 일어서서 가슴을 쭉 폈다.

“그거 아는데!”

“하나도. 하나도 아는데!”

시하는 이 이야기를 몰랐지만, 승준이 옆에서 가슴을 쭉 폈다.

자신도 이야기를 안다고 주장했다.

선생님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네.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건 선생님이 만든 특별한 이야기예요! 이름하여 발레리나 인어공주!”

선생님이 독창적으로 만든 이야기였다.

하나가 발레리나라는 말을 알고 있는지 눈을 빛냈다.

“우와!”

시하도 흥미가 생기는지 선생님을 봤다.

선생님이 큰 스케치북에 그린 그림을 꺼냈다.

“자, 그럼 이야기 시작합니다.”

원장 선생님이 아이들의 시선을 한곳으로 모으며 집중을 할 수 있게 도왔다.

“옛날, 옛날에 인어공주가 살고 있었어요.”

첫 번째 그림은 인어공주가 발레를 하는 여성을 보는 장면이었다.

“우연히 밖에 나온 공주가 발레리나를 봤어요.”

그때 원장 선생님이 노래인 ‘백조의 호수’를 틀었다.

딴- 다다다다 다단 다단 다단 다다다 다다.

“우아한 모습으로 춤을 추는 발레리나가 너무 예뻐서 인어공주는 자신도 다리를 갖고 싶어 했어요.”

그림을 넘겼다.

검은 로브를 입고 있는 마녀가 나왔다.

“다리를 갖고 싶어 하던 공주는 바다 최고의 마녀에게 부탁했어요.”

“제가 다리를 갖고 싶어요.”

“마녀가 말했어요. 흐흐흐. 다리를 갖게 된다면 저주로 말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가 소리쳤다.

“안 돼!”

인어공주의 이야기를 알고 있는 아이들이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모습에 더욱 실감 나게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공주는 마녀와 거래를 했어요.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리를 가지게 되었어요.”

스케치북이 넘겨졌다.

“바다 위에서 선 공주가 우아하게 춤을 췄어요. 발레리나와 같은 춤을요. 그런데!”

왕자가 공주를 본 그림.

“왕자가 그런 공주의 아름다운 발레를 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바로 사랑에 빠진 왕자는 공주에게 다가갔는데 풍덩 빠지고 말았답니다.”

“어푸어푸. 으악! 사람 살려!”

“공주는 우아하게 발끝으로 바다 위를 점프하면서 왕자님을 구했어요.”

“감사합니다. 이름을 알 수 있겠소?”

“하지만 인어공주는 마녀의 저주 때문에 말을 하지 못했어요.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지만, 말을 하지 못했던 인어공주는 너무 답답했어요.”

스케치북이 넘겨졌다.

왕자가 어떤 결심을 하는 모습이었다.

“이름을 알려줄 수 없다면 그대와 함께 춤을 출 수 있게 해주시오.”

“인어공주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먼저 인어공주가 우아한 발걸음으로 춤을 췄어요. 그때 왕자님은.”

그림을 넘겼다.

왕자가 땅에 손을 짚고 다리를 휘둘렀다.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췄답니다. 이것은 유명한 비보잉이라는 춤이었어요!”

여기서 원장 선생님은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름다운 춤을 추던 두 사람을 본 마녀가 너무 감동한 나머지 인어공주의 저주를 풀어줬어요. 두 사람의 뜨거운 춤에 대한 열정이 마녀를 감동하게 한 거죠.”

스케치북의 마지막 장.

“그렇게 인어공주와 왕자님은 극장에서 춤을 추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참고로 그 춤의 이름은 발레리나를 사랑한 비보이였습니다. 와아!”

짝짝짝.

하나가 눈을 반짝이며 일어섰다.

“하나도! 하나도! 발레 할래! 발레 배우래!”

승준이도 함께 일어섰다.

“나도 나도 비보이!”

승준이 땅을 짚었다.

엎드려뻗쳐 자세.

나름 스케치북에 나온 왕자의 춤을 따라 한 것이다.

시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시하도.”

관찰력이 좋은 시하는 땅에 등을 붙이고 발을 위로 뻗었다.

그런 다음 엉덩이를 움직여 조금씩 원을 그렸다.

빙글빙글.

나름대로 윈드밀을 표현하고 있었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마음에 들었던 것을 따라 하고 있었다.

“어? 이게 아닌데…….”

이야기로 잠시 조용했던 어린이집이 시끌벅적해지며 선생님의 눈이 바빠졌다.

“진짜 이게 아닌데…. 다들 진정해요!”

선생님은 두 사람의 사랑에 감동을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계획과 다르게 아이들은 예측불허였다.

승준이 말했다.

“시하야. 나 멋지지!”

“하나도. 하나도.”

“아아. 아아!”

선생님은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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