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알리사는 패션디자인학과 유학생이다.
좋아하는 것은 옷과 만화.
특히 한국 웹툰도 즐겨보며, 픽시브에서 여러 작가 일러도 감상을 했다.
그중에서 우연히 특이한 그림을 보았다.
[siha.pepe]
한 번도 보지 못한 일러레의 이름.
호기심에 클릭한 그림의 퀄리티는 높다고 할 수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SD 캐릭터처럼 단순히 표현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네 컷 만화로 된 구성의 ‘스토리’였다.
“와우!”
알리사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귀여운 그림체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으니까.
첫 그림을 봤을 때는 그냥 귀여운 아이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여자가 아이의 엄마인 줄 알았다.
‘그런데 표정이 왜 저러지?’
그런 의문을 가지며 세 번째 그림으로 갔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인간 아이가 사라지고 멍뭉미를 내는 강아지만 남아 있었으니까.
네 번째 그림에서는 할아버지와 강아지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배경은 거의 없고 간단하게 표현한 그림.
색은 칠하지 않고 정말 만화 일기처럼 나타낸 이 스토리에 알리사는 충격을 받았다.
먼저 강아지를 아이로 의인화한 점.
알고 보니 반전으로 강아지였던 점.
마지막으로 슬픔과 동시에 행복을 줬던 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든 제목인 ‘다시 찾은 행복’.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하나의 예술이자 공감의 만화를 그린 것이다.
“굉장해…….”
비록 4컷 만화일지라도 이 작가의 스토리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사람들은 그림체가 좋으면 웹툰을 많이 볼 거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림체가 예쁘면 사람들이 클릭하는 수가 많아지니까.
하지만 계속 그 만화를 보려면 가장 1순위로 필요한 힘이 ‘스토리’다.
스토리가 좋으면 이상한 그림체여도 사람들이 보게 된다.
반대로 스토리가 좋지 않으면 판매 수가 급감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siha.pepe] 작가는 팔로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림체도 상당히 사랑스러워.”
아기자기한 느낌이 들어서 팔로우할 수밖에 없었다.
알리사는 기분 좋게 [좋아요]와 [하트]를 눌렀다.
“댓글은 뭐라고 했을까?”
하나같이 칭찬 일색이었다.
-귀여운 그림 뒤에 숨겨진 의미에 놀랐어요!
-너무 귀여워요♡
-좋아. 기르자!
-내가 키워줄게!
-사실 아이가 아니라 강아지였다는 거에 충격이야!
알리사는 괜히 자신이 뿌듯해져서 그림을 퍼가기로 했다.
SNS와 친구들에게도 링크를 보냈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는 알리사는 연체동물처럼 흐물흐물해졌다.
***
띠링. 띠링. 띠링.
뭔가 계속 올라오는 메시지에 나는 폰을 보았다.
‘뭐야?’
픽시브에 올린 계정에 하트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좋아요 400개, 하트 500개, 그림을 본 사람의 수 2천.
나는 살며시 입을 벌렸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
‘이게 무슨…….’
뭔지 모르겠지만 계정에 인기가 생기고 있다.
올린 것도 별거 없었다.
전에 올린 팬아트 정도?
4컷 만화의 힘이 이 정도로 큰 것일까?
아니면 시하의 표현력에 다들 놀란 것일까?
뭐가 됐든 시하의 그림 실력이 인정받았다는 거겠지.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아니지. 이 정도가 미약할 리는 없지.’
폰을 보니 어느새 DM(Direct Massage)이 쌓여 있었다.
「언제 또 올리시나요?」
「정말 귀여워요! 혹시 커미션 받으시나요?」
「…이런 그림 원하는데 그려주실 수 있나요?」
여러 가지 시하의 자랑거리가 생겨서 뿌듯했다.
다행히 악플 같은 것은 없었다.
있었으면 지웠을 것이다.
‘아니지. 한국어가 아니라서 지울 필요는 없나? 아니야. 혹시 모르니까 악플 달리면 지워야지.’
지우는 것뿐만 아니라 차단까지도 할 거다.
“시하야~”
나는 자고 있는 시하를 깨웠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기도 했고.
“아아~”
“시하야. 시하야. 그림이 하트를 엄청 받았어.”
“우우…….”
시하가 일어나기 싫은지 잠투정을 부렸다.
어젯밤에 안 자고 너무 신나게 놀기는 했다.
“하트가 엄청나다니까?”
“아?”
시하가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실눈을 뜨는데 너무 귀엽다.
“형아.”
“응. 여기 볼래?”
시하가 힐끗 보더니 눈이 다 떠진다.
하트가 엄청 많았다.
“아?”
“형아가 시하 그림 올렸는데 사람들이 엄청 좋아하네?”
“아아! 형아!”
눈이 다 떠진 시하가 내 폰을 덥석 잡았다.
하트의 숫자보다는 댓글이 달린 게 신기한가 보다.
영어와 일본어가 섞여 있어서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다들 시하 그림 최고!라고 말하고 있어.”
“아아.”
“어때? 엄청나지?”
“아아.”
“형아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니까. 그럼 우리 씻고 어린이집에 자랑하러 갈까?”
“아아. 자랑.”
“응. 응. 자랑. 자랑.”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덩실덩실 흔들었다.
시하도 기분 좋은지 눈을 가늘게 떴다.
코오-
아니, 가늘게 뜬 게 아니라 다시 잠이 들었다.
“시하야. 일어나야지.”
“아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시하를 옆구리에 끼고 화장실로 갔다.
얼굴을 씻기고 의자에 앉혀서 밥을 먹였다.
준비가 끝난 우리는 다시 집을 나섰다.
그제야 잠이 달아났는지 뽈뽈거리며 잘도 걸어 다녔다.
“시하야. 오늘도 파이팅하자.”
“아아.”
“형아가 마음은 빨리 끝내고 시하랑 놀고 싶은 거 알지? 그러니 눈물이 나더라도 형아 기다려야 해. 알았지?”
“아아.”
나는 시하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이제는 익숙한지 쏙 들어가 버리는 시하를 보며 살짝 쓸쓸해지기도 했다.
***
시하가 어린이집에 있을 때 나는 수업과 번역에 몰두했다.
공강 시간에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1권 번역에 집중했다.
아버지의 노트북은 집에 있었고, 내 노트북 하나만 들고 와서 그런지 화면이 작아 보였다.
‘아버지 노트북을 들고 오면 다른 애들 노트북이 안 될지도 모르니까.’
까탈스러운 노트북이라 밖으로 꺼내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주말에 열심히 써서 그런지 벌써 반 권 분량이 번역되었다.
“오빠. 여기서 뭐 해요?”
“응?”
서수현이 나에게 다가왔다.
“아. 또 번역하시네요? 어? 영어네요?”
“어. 영어로 번역하는 중이야.”
“대박. 오빠 영어 잘하세요?”
“너보다는?”
“그건 그렇겠죠. 그런데 이건 무슨 글이에요?”
“무협이라는 장르 소설인데…. 넌 잘 모를 거야. 아 맞다. 너 아직도 유학생에게 한글 가르쳐 줘?”
2학년 때 유학생과 교류를 한 적이 있었다.
서로의 문화를 배워 나가면서 언어를 공부했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모임을 나가지 않게 되고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부탁하면 읽어주기는 할 거다.
좀 더 많은 감평이 있으면 좋으니까.
분명히 공통점이 있을 거다.
“전 아직도 교류는 해요. 요즘 스피킹이 중요하잖아요. 제가 듣기로 승진하려면 실질적으로 스피킹이 되어야 한다고 하던데요?”
“공부 잘하고 있네. 그러면 부탁 좀 하면 안 될까?”
“네? 뭘요?”
“새 친구 좀 소개해 줄래? 내가 번역한 1권을 읽고 간단하게 주인공이나 책에 대한 느낀 점만 말해 달라고 해 보게.”
많은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딱 읽고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진 느낌이 정확했다.
그거면 능력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소개야 어렵지 않죠. 오빠도 그럼 모임에 나와 주세요. 히히. 어쩌면 유학생이 번역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을지도 몰라요. 그런 거로 윈윈 하는 전략 어때요?”
“그거 괜찮은데?”
생각보다 상당히 괜찮은 제안이었다.
시하를 외국인과 소개해 줘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
오후 4시. 스터디룸.
저녁이 되기 전에 시하와 함께 유학생들을 만났다.
다들 커피 한 개씩 들고 오는 것이 한국 대학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하도 여러 외국인이 있는 게 신기한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유학생들을 보았다.
“안넝. 하세.”
시하가 먼저 손을 들고 인사를 했다.
“안녕? so cute!”
“안녕. 아기야.”
“정말 귀여워요.”
“흐흥~ 너무 귀엽다!”
다들 시하에게 빠진 모양이었다.
서수현이 흐뭇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내가 옆구리를 찌르자 화들짝 놀란다.
“왜요?”
“소개 좀 해 줘. 이렇게 있을 거야?”
“아. 그러네요. 여긴 저희 과 선배예요.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소개 부탁드립니다. 선배부터.”
“안녕하세요. 국문과 3학년 이시혁입니다. 오늘 제 부탁을 들어주시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쁜 시간 내주셔서 너무 고맙네요.”
나는 옆에 있는 시하를 소개했다.
“여기 있는 애기는 제 동생인 시하입니다. 세 살이죠. 시하야. 소개해 볼래?”
물론 내가 다 소개했지만 시하가 자신을 소개하는 것도 좋아 보였다.
“아아. 시하.”
시하가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주 간단한 소개였지만 다들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유학생들도 각자 소개가 이어졌다.
그중 ‘알리사’가 시하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열렬한 팬을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먼저 저는 번역일을 하고 있어요. 영문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했죠. 이번에는 무협이라는 소설을 영어로 번역했는데 거기에 대한 감상을 말해 줬으면 해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각자에게 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게 링크를 올렸다.
“톡으로 자신의 감상을 저에게 얘기해 주시면 돼요. 오늘 다 안 읽으셔도 되고요. 최대한 빨리 말해 주시면 좋겠지만 부담을 가지시지 마세요.”
그 뒤로 번역에 대해서 유학생들이 물어봤다.
“보통 번역일은 얼마 받나요?”
“저도 번역을 할 수 있을까요? 아르바이트로?”
“번역하는 데 얼마나 걸려요?”
각자의 질문에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르바이트로는 힘들 거예요. 출판사에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도 있고요.”
가벼운 마음으로 하기에는 서로가 안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었다.
“하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소설보다는 각자 전공에 맞는 전문 서적을 하시는 게 좋아요.”
지금 내가 하는 건 ‘출판 번역’이다.
하지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기술 번역’이다.
기업체 내부 문서, 상품 사용 설명서, 회사 홍보자료, 홈페이지, 보고서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단가도 상당하다.
어떤 사람은 기술 번역만으로 어지간한 대기업 부장급 수입을 얻는다.
이런 설명을 하니 다들 눈이 반짝반짝해진다.
역시 돈 얘기는 어느 나라든 관심을 집중시키나 보다.
“아무튼, 여러 언어를 쓴다는 건 굉장히 메리트가 있으니까 한번 생각은 해보세요. 제가 아직 누구를 소개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지만 각자 학과 교수님들도 번역하시는 분들도 계실걸요?”
실제로 기술 번역은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므로 부수입으로 하시는 교수도 많았다.
기술 번역은 유려한 필체나 필력이 필요 없다.
정확하고 쉬운 의미 전달이 목적이니까.
“그럼 더는 질문 없으실까요?”
다들 궁금증이 풀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알리사가 손을 들었다.
“혹시 패션에 관심 없어요?”
“네?”
“제가 아동 패션에 관심이 많거든요. 패션디자인학과라서요.”
“아…. 네.”
“혹시 괜찮으시면 아이랑 같이 학과 콘테스트에 나와 주실 수 있어요?”
“그건 좀 그러네요. 고민하고 연락드려도 될까요?”
“네. 좋아요.”
“그럼 다른 질문 없으면 마무리합시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하가 손을 들었다.
“어. 그래. 시하야. 질문 있어?”
“아이스. 마무리!”
“응?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아아.”
“역시 마무리는 아이스크림이지.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다들 갑자기 아이스크림 마무리에 웃음을 보였다.
“푸하하하.”
“시하 진짜 so cute! 우우우.”
“정말 귀여워요.”
“갑자기 나도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