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금요일. 강인어린이집.
학부모님들의 모든 허락을 받았다.
봉사할 사람도 구해졌는데 토론에서 함께한 시혁 팀이었다.
혹시 봉사할 수 있냐는 말에 모두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걸로 애들을 좀 더 신경을 쓸 수 있다.
나도 시하를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았고.
“형아!”
“응. 그래. 시하야. 오늘은 딸기를 따러 갈 거야. 딸기. 딸기.”
“따기.”
“응. 그거야.”
옆에 있던 서수현이 말했다.
“시하야. 대학생들도 딸기 엄청 좋아해.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 딸기. 딸기. 딸기. 후우!”
“시하에게 대체 뭘 가르치는 거야?”
“가끔은 인생에서 빨리 배울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왜요? 게임이라서 재밌잖아요.”
나름 재밌는 게임이지.
술 게임에서 자주 쓰이지만 않으면.
“요즘. 딸기. 뚜왈기. 이렇게 한데요.”
“뭔 왈기?”
“뚜왈기요. 이건 두 박자래요.”
“시하야. 아직 이런 거 몰라도 돼. 알았지?”
“아아.”
옆에서 서수현이 ‘재밌는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딸기도 말하지 못하는 시하가 그 게임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지. 시하는 천재라서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모두 차에 탑승해 주세요.”
우리는 어린이집 버스에 탑승했다.
인원이 많이 있지 않아서 자리가 많았다.
승준이 말했다.
“시하야. 우리 같이 앉자!”
“하나도 하나도. 시하랑! 오빠랑!”
“형아.”
시하는 나랑 앉고 싶어 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뒷자리에 앉을까?”
다들 조르르 뒤에 앉았다.
하나, 나, 시하, 승준.
이렇게 네 명에서 앉았다.
혹시 하나가 불만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옆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
옆에서 내 손등을 간질이며 맑은 미소를 보였다.
뭐지? 설마 나를 좋아하나?
그 유명한 첫사랑 오빠가 되는 건 영광이었다.
정신 차리고 나는 애들의 안전벨트를 맸다.
“자 이렇게 안전벨트를 철저하게 해야 나중에 안 위험해. 알겠지?”
“아아.”
“아하하. 간지러워!”
“시혀기 오빠. 하나도. 하나도.”
그래. 그래.
애를 돌보는 게 셋이 되자 정신이 없다.
도와줘야 하는 서수현은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있었다.
“도와줘.”
“이것만 찍고요. 남는 건 사진뿐이란 말이예요.”
저 말에 동의한다.
내 어릴 때 사진이 많지 않아서 시하라도 추억할 수 있게 많이 찍어주고 싶다.
“그럼 나 말고 애들 위주로 찍어.”
“그렇게 말 안 해도 그러고 있어요.”
“셀카는 찍지 말고. 용량 아깝다.”
“못됐어. 정말. 저 SD카드도 빵빵하거든요?”
준비가 다 되자 우리는 딸기 농장으로 출발했다.
시원하게 뻗어가는 도로를 보고 싶었지만 내 눈은 항상 애들을 쫓았다.
눈을 떼면 항상 애들이 다쳐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린이집 선생님에게도 미리 교육을 받기도 했다.
계속 강조한 것이 애들에게 눈을 떼지 말 것.
이것만 지키면 90퍼센트는 먹고 들어가는 거란다.
“시하야. 밖에서 쌩쌩 달린다.”
“아아.”
옆에 있던 승준이 말했다.
“나 집에 자동차 있는데! 아빠가 사줬어!”
“하나는 요술봉 있어!”
“아아. 페페!”
응. 시하야. 미안해. 페페는 집에 없어.
아마 시하가 말한 것은 페페 그림일 것이다.
띠링.
그때 폰이 울렸다.
‘하트네.’
시하가 그린 황제펭귄 그림을 픽시브에 올렸다.
닉네임은 Siha.Pepe.
펭귄을 좋아하는 시하를 위해 그렇게 지었다.
‘어디 보자.’
시하가 그린 황제펭귄 그림의 하트는 10개였다.
처음 올린 것치고는 많이 받았다.
그림 밑에는 영어로 글을 쓰긴 했지만 다들 번역기 돌려서 읽어봤겠지.
댓글도 몇 개 보였다.
-너무 귀여워요!
-살찐 펭귄ㅎㅎ
-퍄퍄!
나는 그림의 하트를 시하에게 보여주었다.
“시하야. 봐봐. 그림에 하트 10개나 돼.”
“아아?”
시하가 폰을 탁 하고 잡고 심각하게 바라봤다.
뭘 알고 보는 걸까?
승준이 말했다.
“시하야. 그거 모야?”
“아아. 페페.”
나는 승준이에게 말해줬다.
“시하가 그린 페페야.”
“와아! 진짜다. 푸하하! 뚱뚱해!”
“하나도. 하나도.”
나는 하나에게도 폰을 넘겨 보여줬다.
“뚱뚱해! 뚱뚱해!”
“오빠. 저도 보고 싶은데요?”
“학교 밖에서 점심 하나 사기.”
“못됐어! 시하야. 형아가 누나 괴롭혀.”
시하가 고개를 올려 나를 보았다.
나는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형아~”
시하가 내 손등 위에 손을 포갰다.
시하는 이미 내 편이었다.
서수현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
우리는 딸기 농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홍진수가 손을 흔들고 우리를 반겼다.
옆에는 구릿빛 피부에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다.
무협 작가 송택수.
나는 그가 누군지 소개받지 않았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날카로운 분위기를 가졌는데 송택수는 점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태산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어떻게 보면 바둑 기사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혹시 무섭게 생기셨을까 봐 긴장했는데…….’
다행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안녕하세요. 시하야. 인사해야지. 딸기 농장의 주인 아저씨야.”
“아넝.”
“하세요.”
시하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송택수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역시 시하는 사람의 마음을 푸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
홍진수가 말했다.
“선생님. 이쪽이 시혁 씨고 이 아이는 시하입니다.”
“나도 보면 알아. 반가워요. 송택수예요.”
나는 송택수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배겨있는지 굉장히 딱딱했다.
농사한 세월의 흔적을 어렴풋하게 느꼈다.
“그럼 선생님들도 애들도 따라와요.”
우리는 송택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나는 한쪽 손에는 시하를 잡고, 왼손에는 하나의 손을 잡았다.
시하는 또 승준의 손을 잡았고.
“이렇게 넷이서 손잡고 있으면 어디 안 떨어지겠지?”
“아아.”
“시혀기 형아. 빨리 딸기!”
“하나도 딸기 먹고 시퍼!”
어느새 비닐하우스에 도착했다.
아이들도 손으로 딸 수 있을 만큼 화분들이 낮게 배치되어 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붉은색 딸기.
그 속에서 더 예쁘게 보이는 건 다섯 장의 하얀 꽃잎과 노란 수술이었다.
“시하야. 저게 딸기꽃이야. 예쁘지.”
“아아!”
시하도 예쁜지 어깨를 들썩거렸다.
송택수가 말했다.
“여기 있는 바구니에 담으면 됩니다.”
애들이 들 만한 아주 작은 바구니가 있었다.
손잡이 부분은 애들 팔에 넣고 다니면 될 것 같이 컸다.
“저 선생님.”
“왜 그러시죠?”
“딸기를 이렇게 공짜로 줘도 돼요? 아까 봤는데 체험비는 물론이고 따놓은 딸기도 가져가려면 가격을 받던데요.”
“당연히 받아야죠. 공짜가 어딨습니까. 다만 그 값은 시혁 씨가 치러주겠죠. 좋은 번역으로.”
송택수가 씨익 웃음을 보였다.
웃으니 또 인상히 달라진다.
좀 더 순수한 느낌이었다.
“비싼 번역값이네요.”
“체험 끝나면 나중에 말 좀 나눕시다.”
“네. 저야, 영광이죠.”
그렇게 말한 나는 바구니 세 개를 챙겼다.
“자, 얘들아. 딸기 수확하자.”
“아아.”
“시혀기 형아. 나는 대왕 딸기 딸 거야.”
“하나는 분홍딸기!”
분홍딸기가 있었나?
“그럼 다같이 가자.”
우리는 딸기 밭을 걸었다.
붉은 딸기도, 푸른 딸기도 보였다.
“이렇게 빨간색을 따는 거예요.”
나는 적당한 크기의 딸기를 따서 시하의 바구니에 넣었다.
“아아. 형아.”
“그래. 시하도 따보자.”
시하가 집중해서 딸기들을 노려보았다.
“응? 시하야. 뭔가 있어?”
“아아.”
도리도리.
아주 신중하게 딸기를 고르나 보다.
승준이 쪽으로 눈을 돌리니 딸기 중에 제일 큰 걸 고르고 있었다.
하나는 분홍색을 찾고 있었고.
‘공주님이네. 공주님. 옷도 분홍색이고.’
그때 시하가 손을 뻗었다.
톡.
아주 작은 딸기.
시하의 손에 있어도 아주 작아보였다.
“엇? 시하야. 그건 아직 다 자라지 않았어. 저렇게 빨갛고 큰 걸 따야지.”
시하가 고개를 저으며 자기를 가리켰다.
“시하.”
“응? 지금 시하라고 한거야?”
끄덕끄덕.
시하가 내가 딴 큰 딸기를 바구니에서 꺼냈다.
“형아.”
“어. 형아가 땄지.”
양손에 딸기를 들고 시하가 하나씩 들며 말했다.
왼손.
“시하.”
오른손.
“형아.”
나는 그제야 시하가 내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렸다.
“시하 딸기와 형아 딸기라는 거야? 이 두 딸기가 형제네?”
“아아.”
나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이 풍부한 감성을 봐라.
이대로 자라서 송택수 선생님처럼 소설을 쓴다면 신춘문예 대상감이다.
“고마워. 감동이야.”
“아아. 형아.”
“역시 시하밖에 없어…. 형아는 앞으로도 시하랑 살게.”
“아아.”
시하가 신나는지 두 딸기를 들고 으쌰으쌰 춤을 췄다.
흐뭇하게 감상을 하고 있는데 승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혀기 형아. 나 엄청 큰 거!”
승준이 가리킨 곳을 보자 정말 큰 딸기가 보였다.
진짜로 손바닥만 한 딸기였다.
“어떻게 찾았어?”
“저기!”
“장소를 말한 건 아닌데. 진짜 엄청 크네.”
하나도 질 수 없는지 자신의 바구니를 보여줬다.
“하나도 분홍색 차자써.”
“응. 너무 익어서 분홍색이 되었네?”
“이거?”
“아니야. 잘했어.”
나는 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행히 다들 많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바구니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비닐하우스를 나왔다.
하지만 애들은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자기들이 찾은 특별한 딸기가 아이들의 특별한 추억이 되었을까?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아이들이 자신이 딴 딸기와 딸기잼이 발린 식빵을 먹고 있었다.
선생님들도 즐겁게 티 타임을 가졌다.
나는 거기에 조금 떨어져서 송택수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 영어 번역을 해준다고 들었어요.”
“네. 맞습니다.”
“번역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가감 없이 들어줘요. 솔직히 무협이라는 게 한자 문화권에 있잖아요.”
“그렇죠? 무공 이름도 그렇고요.”
“저는 그게 걱정이에요. 과연 영어권에서 이게 잘 전해질 수 있을지…. 문화가 다르면 이해가 어렵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저는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거든요. 매니아의 숫자가 확연히 다르죠.”
“흐음.”
“일본만 보더라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해외에서 무협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아마 우리나라보다 숫자가 더 많겠죠.”
“그렇겠죠.”
“그리고 영어 번역은 메리트가 있는 작업입니다.”
“그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 삐죽하고 여러 지식이 범람했다.
“예를 들어 불교의 산스크리트어로 된 경전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영어죠.”
“확장성?”
“네. 제대로 영어로만 번역하면 다른 나라에서 손쉽게 재번역이 가능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네요.”
“이야기가 딴 데로 빠졌는데 어느 나라든 마니아가 있다는 거죠.”
송택수가 그저 웃었다.
“사실 저는 팔리지 않는 것보다 무서운 게 잊히는 겁니다.”
송택수가 딸기 하나를 집었다.
“먹고 나면 맛있었다는 좋은 기억이 남죠. 하지만 한해 농사를 망치면 먹히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잊히는 거죠. 시혁 씨는 제 글 농사를 잘하실 수 있겠습니까?”
송택수가 걱정하는 것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빙 둘러서 말했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였다.
나의 능력을 믿어도 되는가?
다른 번역가들이 만들어낸 책처럼 다른 색이 입혀져 내 작품이 아니게 만드는 건 아닌가?
“무협은 장르소설입니다. 결국, 기본적으로 재미가 있어야겠죠. 번역은 선생님의 색채를 잘 살리는 방향으로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잠시 고민하고 대답을 내놓았다.
“강인대학교에 있는 유학생들에게 1권에 대한 감평 받고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마음에 드시지 않으면 계약은 여기까지 하셔도 됩니다.”
“괜찮겠어요?”
“네. 자신 있으니까요.”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펜을 들었다.
“그럼 계약서 쓸까요?”
왠지 모르겠지만, 옆에 있는 홍진수는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