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만화? 만화는 왜?”
「아무래도 이번 주말 모임에 시하가 재밌어하는 것을 틀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까지 배려해 주면 나야 고맙지.”
「저도 시하에게 점수 좀 따야죠. 이미 악당 이미지인 거 같은데.」
알고 있었구나?
모를 줄 알았는데.
「다들 좋은 분들이라 형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백동환은 나와는 참 다른 사람이다.
친화력이 장난이 아니니까.
나라면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대하지 못하겠지.
“그럼 이번 주 토요일에 봐.”
「네. 즐겁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토요일 아침.
누군가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내가 살며시 눈을 뜨니 시하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아.”
“시하야~”
나는 시하를 부둥켜안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학교를 다니니 너무 피곤했다.
번역일과 육아까지 하니까 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이런 주말에는 좀 더 자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아. 형아.”
“시하야~ 형아 조금만 더 잘게. 같이 자자.”
“아아.”
내 품에서 시하가 꼼지락거렸다.
어릴 때는 많이 자둬야 쑥쑥 큰다고 하던데 우리 시하는 기운도 넘친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운도 없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 사람이 부지런해야지. 그치?”
“아아.”
“그런데 시하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시하가 고개를 들더니 어딘가로 도도도 걸어가 펭귄 가방을 메고 나왔다.
“형아.”
“응. 어디 가려고? 아!”
생각해 보니 오늘 모임이 있었지.
어제 시하에게 말해 줬더니 눈을 반짝였다.
“새 친구들을 만나러 가야지.”
“아아.”
“새 형아, 누나들이겠지만.”
“아아.”
“그런데 아직 점심은 멀었는데?”
“형아. 바바.”
“먼저 가려고? 그러면 안 되지.”
나는 시하의 펭귄 가방을 잡았다.
현관을 나서려는 범인을 체포했다.
“옷도 내복이고 얼굴도 안 씻었는데 어딜 가려고.”
“아아.”
“형아가 일어날 테니까 좀만 더 기다리자.”
끄덕끄덕.
시하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어딜 가려고 하면 꼭 저 펭귄 가방을 챙긴다.
안에 뭘 넣었는지 가방이 빵빵하다.
“하나는 티슈겠고…. 어디 보자.”
나는 시하의 가방을 열어보았다.
각이 사라져버린 각티슈, 문도환이 준 젤리 장난감, 내 노트북 무선 마우스, 내 필통.
‘이건 언제 가져가서 넣은 거지?’
오늘 하루는 괴도 시하였다.
파티라는 말에 모든 물건을 다 챙겼구나.
“준비성 하나는 굿. 그런데 필요 없는 건 빼자.”
내가 마우스를 빼자 시하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형아 거잖아.”
“아아.”
도리도리.
“그래. 그래. 넣을게. 이건 필요 없지?”
내 필통을 꺼내자 또 고개를 흔든다.
“그, 그래? 일단 넣을게. 이건 필요하지?”
젤리 장난감.
시하가 팔을 뻗자 그대로 장난감을 손에 쥐여주었다.
훽! 철푸덕.
여전한 젤리 장난감 취급이었다.
문도환이 보면 슬퍼할 거다.
“각티슈는 필요하고?”
“아아.”
끄덕끄덕.
결국, 젤리 장난감만 빼고 다시 펭귄 가방으로 쏙 들어갔다.
“일단은 씻고 밥 먹자.”
“아아.”
나는 시하를 씻기고 밥을 먹였다.
그렇게 시하랑 놀아주다 보니 어느새 점심이 다됐다.
“그럼 옆집으로 출발할까요? 오늘은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거니까 멋진 옷을 입자.”
“아아.”
시하가 좋아하는 펭귄 옷.
후드를 쓰고 나니 완벽한 펭귄의 모습이었다.
“이 옷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아.”
“나중에 진짜 펭귄이라도 보러 가야겠네.”
“페?”
시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응. 형아가 좀 여유 있을 때 만나게 해줄게.”
“페?”
“그래. 그래. 펭귄.”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바로 옆집으로 가는 것뿐이지만.
띵동.
벨을 누르자 곧바로 백동환이 나왔다.
“형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하도 안녕?”
“아아.”
나는 시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을 봤을 때는 두 명이 더 있는 것 같았다.
2층, 3층이면 네 명이 더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2명 정도만 온 거겠지.
별로 많지는 않아서 좋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하자 두 사람도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색한 기운이 감돌 때 시하가 앞으로 나왔다.
“아아.”
귀여운 배에 손을 척 대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어린이집에서 배운 건가?’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다들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주변 분위기도 온풍이 불 듯 풀리기 시작했고.
“애기가 너무 귀엽네요. 몇 살이에요?”
“아아.”
시하가 손가락을 접었다.
어설프게 접어서 다섯인지 셋인지는 모르겠다.
“세 살이에요.”
“와 진짜 어리다. 안녕. 나는 2층에 사는 삼촌이야.”
“나는 3층.”
한 사람이 시하에게 오른손을 내밀자 시하가 왼손을 내밀었다.
“시하야. 오른손을 내밀어야지.”
“하하. 이렇게 악수하는 것도 처음이네요.”
시하만 조그맣게 잡은 형태였지만 이웃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백동환이 그런 모습을 보다가.
“형님. 순살 프라이드로 시켰는데 시하가 먹어도 됩니까?”
“응? 아, 어. 먹어도 돼.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먹인 적이 없네.”
그 말에 앞에 있는 두 사람이 반응했다.
“이거 큰일이네요. 시하가 치킨 먹고 반해서 맨날 시켜 달라고 할 텐데.”
“한국은 치콜이죠. 아마 엄청 놀라겠네요.”
그때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띵동.
문을 여는데 치킨의 고소한 냄새가 났다.
시하가 나에게 달려와 다리에 찰싹 붙었다.
“형아.”
“응. 맛있어 보이지? 이게 바로 꼬꼬로 만든 치킨이야. 아, 이렇게 말해도 되나?”
꼬꼬로 만든 치킨.
시하가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다.
“아아.”
아무래도 이미 고소한 냄새에 빠졌나 보다.
“바바.”
배달원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까지 해준다.
배달원도 그런 시하가 귀여웠는지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식탁으로 갈까?”
“아아. 형아.”
“응? 네가 들고 싶어?”
끄덕끄덕.
나는 시하에게 치킨 봉지를 주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가볍게 드는 모습을 보며 주변에서 엄지를 추켜세웠다.
“힘세다!”
“이거 콜라도 들어있는데.”
“아아.”
한 발, 한 발 힘겹게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1.5L는 무겁지…….
그래도 혼자 옮기려고 하길래 나는 살며시 밑을 받쳐서 들어주었다.
쪼그려 앉아서 가게 되었지만 어떻게든 식탁에 도착했다.
“그럼 치킨을 개봉합니다.”
“아아.”
봉투를 뜯고 치킨 하나를 들자 시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시하야. 일단 턱받침부터 하고. 자 먹자!”
“아아.”
“형님. 그 전에 시하가 먼저 먹어야 할 게 있습니다.”
“응?”
백동환이 씨익 웃으며 무언가를 꺼냈다.
“어? 그건?”
“치즈볼이죠.”
동글동글한 치즈볼을 꺼내서 시하의 손에 쥐여주었다.
“시하야. 한 번 먹어 봐. 아, 동환아. 혹시 우유 있어? 콜라보다는 우유가 좋을 것 같은데.”
“아침에 운동하는 저에게 언제나 집에 우유가 갖춰져 있습니다. 갖고 올게요.”
“형아.”
시하가 침을 삼키며 치즈볼을 들이밀었다.
“응? 아, 고마워. 그렇게 침 삼키면서 형아 먼저 주는 거야?”
“아아.”
“착하네. 우리 시하. 그럼 시하 먼저 먹으면 형아도 먹을게.”
시하가 다시 한번 치즈볼을 보더니 입에 넣었다.
바사삭. 오물오물.
시하의 눈이 1mm 커졌다.
팔을 파닥파닥 흔들며 온몸으로 맛있음을 표현했다.
“그렇게 맛있어?”
“아아.”
햄스터가 해바라기 씨를 먹는 것처럼 먹는데 너무 귀여웠다.
이 모습을 계속 보고 싶지만 나는 들고 있는 치킨을 후후 불며 식혔다.
너무 뜨거우면 시하가 먹지 못하니까.
찰칵. 찰칵.
앞에 있는 사람이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제게 보내주세요.”
“네. 그러려고 찍었어요. 저희 집 사촌도 아직 애기인데 밥 먹이는 모습을 제가 이렇게 늘 찍어주거든요. 평소에 부모가 찍을 타이밍이 없으니까요.”
나는 고마운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형아.”
“응? 벌써 다 먹었어? 그럼 치킨 먹어볼까?”
그때 백동환이 우유를 내밀었다.
“여기. 우유도 있어요.”
“땡큐.”
나는 시하의 손에 치킨을 쥐여주었다.
다들 하나같이 치킨은 안 먹고 시하의 먹는 모습을 보는 광경이 조금 웃겼다.
“자. 먹어 봐.”
“아아.”
한입 베어 물더니 오물오물 야무지게 먹는다.
시하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 마시떠.”
내가 놀라서 입을 열려고 할 때 주변에서 이미 호들갑을 떨었다.
“말했다!”
“형아만 말할 줄 알았는데!”
“역시 치킨은 진리지!”
나는 시하에게 콜라 대신 우유를 줬다.
“마무리는 우유로.”
꼴깍꼴깍.
“우리도 이제 먹죠?”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법이었다.
***
치킨을 먹고 이야기를 꽃피웠다.
다 먹고 난 뒤에 간단하게 영화 감상 시간을 가졌다.
물론 애니메이션이었다.
백동환이 특별히 준비한 시하의 첫 애니메이션이 뭘지 궁금했다.
“이게 요즘 애들에게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이죠. 펭귄몬스터!”
“펭귄몬스터?”
“전에 시하가 오늘처럼 펭귄 가방 메고 가더라고요. 펭귄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걸 선택했죠.”
“아, 그래?”
“애들이 여기 나오는 몬스터들을 엄청 좋아해요. 귀엽거든요.”
요즘 만화는 잘 몰라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틉니다?”
만화가 시작되었다.
대충 스토리는 알겠다.
주인공이 인간이고 같이 여행하는 몬스터가 있었다.
펭귄몬스터라는 제목답게 주인공의 파트너는 황제펭귄.
이 두 캐릭터가 만들어나가는 이야기였다.
시하도 펭귄이 나와서 그런지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백동환이 말했다.
“이제 몬스터 시합을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몬스터로 시합을 하는 거죠.”
“아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인데 착각이겠지.
나는 시하 옆에서 계속 시청을 했다.
주인공의 상대가 말했다.
「겨우 이 정도 실력이었나?」
「아니. 우리의 실력은 이 정도가 아니야. 아직 실전에 사용하기 그렇지만…. 보여주지. 황제펭귄!」
「펭!!」
주인공이 황제펭귄을 보며 말했다.
「네 최대의 힘을 보여줘.」
「펭!」
「훗. 기다려주지. 그래 봤자 우리의 상대는 안 되겠지만.」
「후회나 하지 마.」
황제펭귄이 날개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페에에에에에에.」
파직. 파직.
주변에 스파크가 튀며 펭귄의 털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가 남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시하의 눈이 반짝였다.
뻘떡.
흥분했는지 일어서서 보기 시작한다.
「페에에에에에에.」
황제펭귄이 울부짖었다.
주변에 있던 캐릭터들이 놀라면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나왔다.
적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눈을 좁혔다.
「페에에에에에.」
털이 황금빛으로 물들며 길이도 길어졌다.
「페에에에에에!!!!」
스파크가 튀며 완벽하게 황금빛을 발했을 때 주인공이 말했다.
「이게 바로… 슈퍼 황제펭귄… 쓰리… 다.」
멋진 슈퍼 황제펭귄 쓰리가 나오며 만화가 끝이 났다.
[다음에 계속]
나는 살며시 입을 벌렸다.
무슨 만화가 변신하다가 한 편이 끝이나?
그런데 시하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아아! 형아! 형아! 아아!”
엄청나게 흥분해서 내 옷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옆에서 백동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베스트로 뽑은 장면이죠. 크으. 슈퍼 황제펭귄 쓰리…….”
넌 왜 감탄하고 있냐?
그런데 이쯤에서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데 원하고 투는?”
“그건 다른 기술이라서. 저게 세 번째 기술이거든요.”
“형아! 형아! 페페.”
“그래. 그래. 엄청났지?”
그때 백동환이 씨익 웃었다.
“이걸 위해 준비한 게 있습니다!”
대체 또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