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500)

19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하도 눈을 비비며 일어났는데.

“형아?”

“응. 형아야.”

나는 시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시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도도도 달려왔다.

찰싹.

내 다리에 붙어서 얼굴을 비볐다.

“형아. 형아. 형아.”

“응. 형아야.”

시하가 나를 올려보며 팔을 들었다.

번쩍 들어 안자 시하가 내 가슴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계속해서 부르는 ‘형아’라는 말에 나는 괜히 코끝이 시큰했다.

말은 안 했어도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아. 여기 있어. 어디 안 가.”

“아아.”

“형아도 시하 많이 보고 싶었어.”

“아아.”

“오늘 떨어져 있던 만큼 같이 있자.”

“아아. 형아. 형아.”

“그래. 그래.”

시하는 아무렇지 않았던 게 아니었다.

열심히 참아준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참으로 대견했다. 미안하기도 했다.

어쩌면 부모님이 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건데.

맞벌이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이렇게 어릴 때부터 맡기는 사람도 많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나는 아주 오래 곁에 있어 주고 싶다.

“좋은 친구들이 많아서 너무 외롭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자주 올 테니까.”

“아아.”

옆에 있던 문도환이 코를 만졌다.

“누가 보면 전쟁통에 만난 줄 알겠네.”

“형. 육아 전쟁 몰라요?”

“그 말이 아니잖아.”

“제가 봤을 때 형은 아이 생기면 제일 먼저 울 타입이에요.”

“나 그렇게 감성적인 놈 아니야.”

“코 스윽, 은 왜 자꾸 하는 건데요?”

“콧물 나와서 그래.”

“진짜 지지다. 지지.”

지지라는 말에 시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아.”

“응?”

시하가 네모난 무언가를 손으로 표현했다.

“아. 티슈?”

“아아.”

“형아가 잘 가지고 있었지.”

나는 각티슈를 꺼내서 시하에게 주었다.

시하가 티슈를 뽑더니 그대로 문도환에게 주었다.

“고, 고맙다.”

“아아.”

“우리 시하 착하죠?”

“그래. 착하네.”

그때 선생님이 말했다.

“자, 다들 잤으면 잠자리를 정리합시다!”

나는 시하를 보았다.

“애들이 잠자리 정리하네. 시하도 해볼래?”

“아아.”

시하도 가더니 잠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들 하는 게 어설퍼서 선생님이 도와주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시하의 정리를 도와주었다.

그때 옆에서 승준이 말했다.

“형아. 나두!”

“하나두. 하나두.”

“어? 그래.”

나는 승준과 하나를 도와주었다.

승준과 하나는 내가 마음이 들었는지 정리가 끝나자 양옆으로 다리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놀자! 놀자!”

“나두! 나두!”

그 모습에 시하는…….

“형아…….”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귀엽다.

***

수요일 오후 1시.

시하의 어린이집 등원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어제 번역작업을 마무리하고 1차 원고를 보냈다.

아무래도 검토하는 데 오래 걸리는 점을 생각해볼 때 적어도 일주일 뒤에는 연락 오지 싶다.

웅웅.

[홍진수 과장]

“뭐야? 벌써?”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시혁 씨!」

언제나 밝고 큰 목소리다.

“네. 원고는 잘 받으셨죠?”

「그럼요. 그럼요. 너무 잘 받아서 밤새 읽어봤습니다. 제가 꼼꼼히 읽어봤는데 아니 이럴수가!」

“혹시 많이 틀린 게 있던가요? 저도 정신없이 하면서 보낸 거라.”

「제가 할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역시 교정, 교열할 일조차 줄여주는 시혁 씨에게 감탄했습니다. 역시 편집자를 하기 위해 태어난 남자…….」

“그건 아니고요. 고칠 게 없다면 다행이네요.”

「네. 이 부분은 제가 몇 번 더 읽어보고 오타만 잘 찾아보면 될 것 같습니다. 방향성이나 이해 안 되는 점이 없었어요. 작가님과 메일을 하면서 잘 조율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런 고평가에 머쓱했다.

이건 편집자와 번역가에게도 좋은 것이다.

더는 고칠 게 없다는 건 서로가 심력을 많이 안 써도 되는 부분이니까.

“그럼 1차 원고로 끝났네요? 나머지는 홍진수 과장님이 해주실 거고요.”

「네. 이제 제가 잘해야죠. 아마 검토되는 대로 입금을 해드리겠습니다. 격일이나 말일쯤에 입금이 될 것 같네요.」

“그러면 혹시 다른 번역도 가능할까요?”

「흐흐.」

뭔가 귓가에 악당 같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착각인가?

괜히 불안해진다.

「아마 시혁 씨도 알고 있을 겁니다. 원서를 검토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네. 알고 있죠.”

보통 출판사에서 원서를 모두 검토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여건이 안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전에 20개의 책을 5개로 줄여줬는데 이걸 다 편집자가 검토했다면 업무가 마비됐겠지.

“에이. 설마?”

「네. 눈치채신 것 같네요. 그때 우리 대리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릅니다. 근데 저희가 사람이 구해졌어도 검토할 시간이 없어서요.」

보통 출판사에서 검토서를 의뢰하기도 한다.

하나에 10~15만 원 정도.

‘흐음. 굉장히 작업량이 많아 보이는데…….’

그게 20개여서 충분히 줄일 수 있었지.

만약 수만 권이었으면 고개가 저어진다.

우리나라만 해도 신간 발행 종수가 4만 8천 권인데 외국 원서면 얼마나 많겠는가.

“그건 거절할게요.”

「역시 거절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한글을 영어로 번역하는 건 어떠신가요?」

“네?”

「전에 말씀드린 택수 선생님 있지 않습니까. 그 작품을 외국에 영어로 출판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무협을요?”

「의외로 인기가 있습니다.」

“그건 드라마나 영화 아닌가요? 차라리 중국어로 번역해 연재하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때 뭔가 머릿속에 번쩍였다.

수많은 중국 무협의 원서들.

한국 무협으로 와서 바뀐 의미와 뜻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며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설마 중국에서 쓰는 친전제자(亲传弟子), 적전제자(嫡传弟子)라는 단어와 의미나, 내공의 흡기가 양기(養氣)로 표현되는 것. 그런 다른 표현 문제 때문에 그런 건가요? 이런 단어 표현과 개념이 나뉘어 있고 그래서?”

「…….」

“여보세요?”

갑자기 침묵이 길어져서 전화가 끊긴 줄 알았다.

확인해 보니까 분명 통화는 계속 가고 있는데?

“여보세요? 안 들리세요? 과장님?”

「하나만 물어도 됩니까?」

“네. 얼마든지요.”

「우리 시혁 씨. 어디 계시다 이제야 나왔습니까!」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

대충 중국어 번역하자는 말까지 나오며 통화를 종료했다.

뭔가 아주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이거 이대로 계약해도 되는 걸까?

어차피 일거리야 있으면 좋으니까.

그렇게 빈 강의실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데 과대 서수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혁 오빠.”

“응? 아, 수현아. 여기 오늘 강의 있어? 나 나갈 건데 잠깐만.”

“아니요. 없는데요?”

“그래? 어차피 시간 돼서 가려고 했어.”

시간을 보니 벌써 2시가 넘었다.

조금 이르지만 시하를 보러 가면 될 것 같았다.

“잠깐만요. 오늘 우리 팀끼리 모여서 회의하기로 했잖아요.”

“응? 언제?”

“오빠. 강의 시간에 못 들었어요? 어쩐지. 멍하니 딴생각하고 있었죠?”

오늘은 시하에게 어떤 저녁을 먹일까 생각 중이었다.

“그, 그랬어?”

어떡하지? 시하에게 3시에 온다고 약속했는데…….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서수현을 봤다.

“근데 그게 몇 시였지?”

“4시 45분에 하기로 했잖아요. 회의 끝나고 밥도 먹자고 했는데.”

“왜 기억이 없을까? 혹시 갠톡으로 이야기한 거 아니야?”

“개인적으로 맞아보실래요?”

서수현이 주먹을 들었다.

“크흠. 농담이야. 농담. 그런데 어쩌지? 내가 시하를 데리고 가야 해서.”

“아, 그 3살 동생이요?”

“어. 장례식장에서는 못 봤지?”

“아니요. 본 것 같아요. 애기 안고 있는 분이 있던 거 같았는데…….”

“그게 못 본 거지. 어쨌든 내가 데려가기로 약속을 해서 말이야. 혹시 방해만 안 된다면 동생 데리고 회의해도 될까?”

“뭐, 상관없어요. 오빠 사정 모르는 사람도 없는데요. 제가 애들에게 이야기할게요.”

“아, 정말?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그럼요.”

역시 과대는 좋은 애다.

이래서 과대하나?

그런데 하나 의문이 드는 게 있다.

“그런데 빈 강의실은 왜 온 거야? 강의도 없고 회의까지 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오빠가 보여서 그냥 와봤어요.”

“그래? 별거 아니었구나?”

“그런데 와 보길 잘했네. 설마 까먹고 있었을 줄이야.”

“크흠.”

“이렇게 된 거 미리 단톡 팔게요. 진작에 만들었어야 했는데.”

“그래. 나 좀 초대해 줘라.”

“알겠어요. 그럼 도서관 스터디룸에서 봐요. 스터디룸은 어딨는지 알죠?”

“내가 아싸라도 그건 알아.”

“오빠 아싸 아닌데?”

“그럼?”

“핵아싸…….”

“야!”

서수현이 싱긋 웃으며 문을 나섰다.

나도 그냥 살며시 웃었다.

“오빠 그렇게 자주 좀 웃어요. 반응도 보이고. 하여간 너무 진지하다니까. 우리 즐겁게 즐겁게 삽시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뭐래. 아닌데요?”

그렇게 서수현이 떠났다.

나도 가방을 챙기고 어린이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시하가 자는 것을 보며 기다리다가 챙겨서 집으로 돌아왔다.

“시하야. 오늘 학교 도서관에 갈 거야.”

“아아.”

“거기에 스터디룸이라고 자리가 따로 있거든? 오늘은 조용히 놀아야 해. 알았지? 원래 조용하긴 하지만. 아 맞다. 이거로 그림 그리자.”

집으로 온 이유는 태블릿을 챙기기 위해서였다.

시하가 요즘 자주 사용을 해서 여기에 그림을 그리게 하면 될 것 같았다.

너무 길어진다 싶으면 내가 어떻게든 회의를 빨리 끝내야지.

“이제 다 챙겼네. 가자. 시하야.”

“아아.”

시하와 함께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도서관에 들어가자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저기가 책이 있는 건물로 향하는 길이고 저기가 독서실이 있는 길이야. 스터디룸도 저쪽에 마련되어 있어.”

강인대학교 도서관은 두 개의 건물이 이어져 있었는데 한 건물은 말 그대로 도서관이라 할 수 있었다.

책들이 수북이 꽂혀 있다.

다른 한 곳은 오로지 책상들만 가득한 건물이었다.

1층은 두 건물을 이어주는 통로 같은 곳이다.

“여기 들어가려면 학생증을 찍어야 해. 시하가 찍어볼래?”

“아아.”

지하철 개찰구처럼 바코드를 찍어야 들어갈 수 있다.

외부인은 신청서를 작성해서 카드를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강인대학교 앱을 켜서 QR코드를 띄웠다.

시하가 폰을 두 손으로 들고 코드를 찍었다.

띡.

막고 있는 작은 문이 열리며 우리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보자. 3-C룸이랬나?”

시하를 옆구리에 끼고 3층을 올라갔다.

“형아.”

시하가 허공에서 팔다리를 놀렸다.

파닥파닥.

자신도 계단을 올라갈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응. 시하도 올라갈 수 있지. 당연하지. 그런데 시간이 좀 급하네? 그러니 빨리 가자.”

“아아.”

금방 3층으로 올라온 나는 휴게실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제 좀 가세요.”

서수현의 목소리였다.

“회의하는 거지? 내가 좀 도와줄 수 있는데?”

“선배가 뭘 도와줘요? 이번에 붙을 상대 팀이잖아요.”

“내가 밥값 정도는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지.”

뭔가 이대로 지나가기에는 타이밍이 좀 그렇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슬쩍 고개를 내밀자 남자가 보였다.

‘내 동기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1학년 때는 거의 친하게 지낸 사람이 없었으니까.

서수현이 말했다.

“밥 안 사주셔도 돼요. 선배.”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아 맞다. 이번에 문학과 지역이라는 강의 듣지? 나 그거 족보 있는데. 시험 기간 때 같이 공부…….”

그때 시하가 말했다.

“형아.”

“응?”

그 말에 둘이 밖을 쳐다보았다.

나는 숨어있는 것도 어색해서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척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 수현아.”

“시혁 오빠!”

서수현이 잘 왔다는 눈으로 나에게 달려왔다.

“왜 밖에 있어?”

“이야기 좀 하느라고요. 다 끝났어요.”

이름 모를 동기가 딱딱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왜? 뭐?

동기가 말했다.

“수현아. 나중에 얘기하자. 나한테 족보도 많으니까. 언제든지 도움 필요하면 연락하고.”

서수현이 그 말에 대답하려고 할 때 시하가 입을 열었다.

“노나 자래~”

“풋!”

그 말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동기의 얼굴은 아주 시뻘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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