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나는 시하의 말에 풋 하고 웃었다.
이모의 말을 따라 하는 게 너무 귀엽기도 하고, 말이 점점 늘어가는 것에 안심하기도 했다.
그런 미소가 지어지는 말이었다.
앞에 있는 문도환은 시하가 다른 말을 하는 건 처음 들었는지 놀란 눈을 했다.
“와. 시하가 다른 말도 하네.”
“형. 시하가 뜨거, 차거도 말했다?”
“진짜 다행이다. 시하야. 내가 잘할게. 네 형은 잘하고 있으니까. 그래. 내가 잘해야지.”
옆에 있던 이모가 자신의 입을 두드렸다.
“입 조심해야겠네. 다 따라 할 거니까.”
그러면서 이모가 떠나갔다.
문도환이 신기한 눈으로 시하를 보았다.
“저기 시하야. 나는 삼촌이라고 해줘. 삼촌. 삼촌.”
“아아.”
“아니. 삼촌. 어? 아니면 형아라고 부를래?”
시하가 장난감을 주물럭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악. 내 젤리 장난감! 이 장난감이 뭔 잘못이 있다고!”
시하가 나를 보며.
“형아.”
계란찜을 가리켰다.
“응. 그래. 이거 먹고 싶어. 잠깐만.”
나는 후우후우 불었다.
의외로 계란찜은 강적이다.
뜨거움을 없애기 쉽지 않다.
시하가 보채지 않는 게 다행이다.
“자, 아~”
“아~”
나는 시하에게 달걀찜을 먹이고 문도환을 보았다.
“이제 그만 닦아요. 그리고 시하랑 나이 차이가 있는데 양심 없게 형이라고 부르라뇨.”
“너는?”
“전 실제로 형아니까 괜찮죠.”
“크흠. 난 아직도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불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그건 연하 만나서 부르게 하시고요.”
“만날 수 있을까?”
나는 그 말에 침묵했다.
“야, 빈말이라도 해줘야지.”
“형은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 만날 거예요.”
“그거밖에 장점이 없어?”
“그게 가장 큰 장점인데요?”
“……밥 먹자.”
“제가 소개팅 같은 거 알아봐 드려요?”
“됐어! 너도 아는 애도 없을 건데.”
“그거 무척 상처 되네요. 적어도 강의 들으면 인사해 주는 친구 정도는 있거든요?”
문도환이 나를 아주 불쌍하다는 눈으로 봤다.
“개강하면 자주 나 찾아와. 혼자 밥 먹지 말고.”
“시하랑 먹을 건데요?”
“그래. 둘이 아주 행복하게 살아라!”
문도환은 아주 좋은 사람이다.
나에게 너무 과분하게.
***
오늘 아침은 굉장히 분주했다.
“시하야. 밥 먹어야지. 밥.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린이집이 여는 시간은 7시 30분부터였다.
나도 오늘 9시부터 수업이 있어서 가봐야 했다.
수업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시하는 7시 30분까지 어린이집에 데려가고 싶었다.
‘아마 안 될 것 같네…….’
새벽에 잠이 들어서 늦게 일어났다.
한 4시간 잤나?
밥하고 시하 씻기고 정신이 없었다.
‘맘 편하게 가자. 시하랑 좀 더 있으면 좋지.’
나는 시하의 볼살을 만졌다.
말랑말랑.
시하가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형아.”
“응. 많이 잠 와?”
“아아.”
“아침에는 참 약하네. 형이랑 똑같아.”
“아아.”
시하가 오른팔을 번쩍 들었다.
아마 나랑 같아서 좋아하는 거겠지.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가리키더니 자신의 머리를 가리킨다.
“형아.”
“어. 머리도 같네.”
아, 잠깐만.
이 머리로 지금 학교 가야 하는 거지?
모자라도 쓸까?
하지만 내 앞머리를 가릴 수 없는 게 함정이다.
‘이 헤어스타일. 뭔가 부끄러워.’
시하가 좋아해서 좋긴 한데…….
“형아?”
“응. 맘마 먹자. 맘마. 자 들어갑니다! 아~”
“아~”
나는 시하의 밥을 먹이고, 씻기고, 옷을 입혔다.
“가자. 다녀오겠습니다.”
“아아.”
“아, 맞다. 낮잠 이불. 잠시만.”
나는 이것저것 챙긴 뒤에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현재 시각 7시 40분.
대충 어린이집은 8시에 도착할 듯싶다.
밖으로 나가는데 숨을 거칠게 쉬는 남자가 보였다.
성우지망생 백동환이었다.
“안녕하세요.”
“오! 형님! 안녕하세요.”
“아, 형님요?”
“저보다 나이 많으시지 않나요?”
“아, 그렇죠. 23살이니까.”
“그럴 줄 알았어요. 분위기가 형님각이었습니다.”
형님각이라는 것도 있나?
나는 고개를 숙이며 시하의 손을 잡고 걸었다.
뒤에서 백동환이 따라왔다.
“형님. 이야기 좀 해도 돼요?”
“제가 바빠서요.”
“그렇구나…. 죄송해요.”
“음. 왜 그러시는데요? 용건만 간단하다면야.”
“제가 그때 말씀 못 드린 게 있는데요. 저희 2층과 3층에 있는 또래들이랑 가끔 치킨도 먹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혹시 건전한 모임을 할 때 시하도 데리고 친목을 다져요.”
“아하…….”
딱히 내키지는 않는다고 할까?
할 일도 많고. 아니지.
시하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
이 팍팍한 세상에 한 번쯤은 친목을 다져놓는 것도 좋지.
“사실 이건 제가 주도하는 거거든요. 하하. 싫으시다면 억지로 권유하는 건 아니에요.”
“싫은 건 아니에요. 참가비는 있어요?”
“치킨값이면 충분합니다. 시하는 공짜예요.”
“그거 고맙네요. 저도 한 번쯤은 인사드리고 싶었어요.”
그러자 백동환이 씨익 웃었다.
인상 때문에 조금 무서웠다.
웃어도 무섭다니…….
“그러면 조만간 날짜는 주말로 잡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고맙죠.”
“네. 그럼. 시하도 안녕.”
“아아.”
후욱후욱.
그렇게 백동환이 달리면서 떠나갔다.
아침부터 저렇게 운동하는 게 대단해 보였다.
자기 관리하는 느낌이 물씬 느껴진다고 할까?
“형아.”
“응?”
“내가 디켜.”
“아~ 고마워. 아직도 저 삼촌을 악당으로 보는구나?”
“아아.”
이래서 첫인상이 중요한가 보다.
불쌍하게도 시하에게 악당으로 찍혔다.
이걸 만회할 수 있을까?
그렇게 시하랑 걷다 보니 어느새 어린이집 앞이다.
나는 정문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이러지?’
겨우 발을 떼고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머. 오늘 오신다는 시혁 씨와 시하 맞죠? 네가 시하구나?”
어린이집 선생님이 우리를 반겼다.
이제 시하와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지 봤다.
“형아가 공강 시간에도 오고 싶지만, 원장 선생님이 말리는 바람에 아마 늦게 오지 싶어. 걱정 마. 형아는 이걸 위해 강의는 많이 잡지 않았어. 헤어지는 건 잠시지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어.”
“저기요. 시하 형아분. 너무 말이 길어요.”
“네.”
나는 다시 시하의 어깨를 잡았다.
“형아가 저기 짧은 바늘이 3에 갈 때 올 거야. 3시라고 해. 3시. 이렇게 생긴 시간에 올 거야. 형아 보고 싶어서 울지 말고 꼭 참아. 할 수 있지?”
“아아.”
“그래도 형아 보고 싶으면 전화해야 해. 형아 번호는 못 외우니까 이렇게 펭귄 가방에 넣어놓을게.”
“저기…. 형아분?”
“네네. 시하야. 그러니까 형아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그때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앗! 시하다! 시하야~”
시하의 첫 친구 오승준이 시하의 손을 잡았다.
“아아.”
“시하야. 우리 놀자!”
그대로 시하의 손을 끌고 데리고 가버렸다.
시하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는구나.
헤어지기 싫다.
“저기 선생님 시하 잘 부탁드려요.”
“네. 나중에 볼게요.”
“저기.”
“네?”
“그런데 보통 울지 않나요?”
“호호. 서운하신가 봐요?”
“조금요.”
그때 시하가 불쑥 튀어나와서 나에게 달려왔다.
“형아!”
“시하야.”
시하가 가방에서 꺼낸 각티슈를 주었다.
그리고 각티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가 자신을 가리켰다.
“아아.”
“이걸 시하라고 생각하라고?”
“아아.”
이건 또 어디서 배웠을까?
아니, 그런 의미가 맞나?
그렇게 시하는 승준이가 부르는 소리에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
국어국문학과 강의실 203호.
드르륵.
오랜만에 문을 열자 학생들이 나를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린다.
어차피 같은 학번도 아니라서 그러는 것은 이해한다.
사실 같은 학번이 있어도 똑같은 반응을 보이겠지.
친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카톡이나 문자가 개별적으로 오기는 했다.
뭔가 의무적으로 하는 느낌을 받았지만 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마도 내가 보냈어도 의무적으로 보냈을 것 같았으니까.
대충 앞자리에 앉자.
“시혁 오빠.”
누군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3학년 과대 서수현이었다.
“아. 수현아.”
3학년 중에서 네 명인가 다섯이 장례식장에 왔는데 그중 과대도 있었다.
“오랜만이야.”
“네. 오랜만이에요. 오빠. 괜찮아요?”
“응. 괜찮아.”
서수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았다.
유일하게 3학년 중에 그나마 인사하는 애는 이 애밖에 없을 것이다.
과대라서 그런가?
“오빠. 그거 들었어요?”
“뭐?”
“작년부터 교수님이 토론에 꽂혔대요. 아마 조별과제를 할걸요?”
“그래?”
“네. 뭐라더라? 3학년 정도면 나중에 면접을 위해 미리 토론해야 한다고 하나 뭐라나.”
“토론하는 회사가 있기는 하지만 아마 별로 없을 건데?”
“그러니까요.”
“아, 아니다. 외국계 회사면 토론이 많을 수도 있어. 아무래도 외국어를 잘 배워서 취업을 그쪽으로 정하는 데도 있으니까.”
“설마 외국어로 토론하라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 침묵만 이어질걸?”
물론 나는 잘 말하겠지만.
“그래도 교수님들도 나름대로 취업 생각해 주시면서 이런 경험을 시키는 거겠지.”
“으으. 전 별로인데요.”
“뭐, 수업도 ‘문예비평론’인데. 어쩔 수 없지.”
“문예비평을 안 하고 시사 비평도 한다는 소리가…….”
나는 그런 서수현의 말을 끊었다.
“미안한데. 나 지금 너무 바빠서. 다음에 이야기하면 안 될까?”
“아, 죄송해요. 제가 취업 준비하는 시간 뺏었죠?”
“그건 아닌데. 일을 조금 해야 해서.”
“아…. 알바요?”
“어. 번역 알바.”
“와. 멋있어요. 오빠. 파이팅이에요. 그리고…….”
서수현이 우물거리다가.
“헤어스타일 멋있어요.”
“으응?”
그러고는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총총 걸음을 옮겼다.
이게 멋있다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말을 끊어서 왠지 미안한 느낌이 들지만…….
‘할 건 해야지.’
나는 노트북을 켜고 번역 작업을 시작했다.
이런 자투리 시간에 일해야 시하랑 많이 놀아줄 수 있었다.
지금 내 일의 스케줄은 온통 시하에게 맞춰져 있었다.
다다다다.
조용한 노트북의 두드리는 소리만이 내 귓가를 자극했다.
3월인 지금 거의 번역이 끝나가고 있었다.
잠을 줄여가며 했던 성과였다.
번역이 다 끝났다고 해서 정말 다 끝난 게 아니다.
편집자가 교정 교열을 하면 1차로 다시 한번 보고 의견을 나누는 작업이 필요하다.
‘시하 보고 싶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보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수업이 끝나면 몰래 보기라도 해야지.
그때 김호섭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감사 인사와 반가움을 담아 눈인사를 했다.
“다들 첫 수업에 와줘서 고맙다. 아직 수업 정정 기간인데 말이지. 혹시 듣기 싫다면 기회가 있어. 이번에 현장실습이 생겼으니 선택 필수인 이 과목 하나쯤은 안 들어도 졸업할 수 있으니까.”
다들 그 말에 웃음을 보였다.
“그래도 맨날 소리치며 혼내는 봉 교수 수업을 빼는 게 더 낫지 않겠어? 난 그래도 수업 때마다 학생을 지목해서 질문은 안 던지잖아.”
봉 교수라면 인상이 강렬하시지.
학생들을 뻘쭘하게 만드는 교수님이라고 할까?
발표도 많이 시킨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이번에는 학생들을 위해 토론을 조금 섞어볼 생각이야. 여기에 성적 반응 비율이 상당히 잡힐 거고. 물론 이 재미없는 문예비평론도 배울 거고.”
김호섭이 두꺼운 책을 흔들었다.
역시 토론을 하는 건가?
“아마 참 재밌을 거야. 싸우기도 많이 싸울지도 모르고. 팀으로 대결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인원은 7명씩 하면 되겠네. 여기서 플마 한두 명도 괜찮아.”
그때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 그러면 매 수업시간 토론을 하는 건가요?”
“시간제한은 둘 거야. 강의도 해야 하니까. 아마 자료조사를 많이 해둬야 할 거야. 그게 짧은 시간에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을 테니까. 아직 늦지 않았어. 한 과목 빼도 돼. 고민되지? 봉 교수 수업 들을지. 아니면 내 수업 들을지.”
김호섭은 최대의 난제를 아무렇지 않게 내밀었다.
그 말에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현장실습 할 건데 한 과목 뺄까?
그런데 이 과목이 김호섭 교수님이라는 게 좀 걸리네.
톡톡.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오빠. 우리 같이 팀 해요.”
서수현이었다.
챙겨줘서 고마운데 생각 좀…….
‘근데 시하는 잘하고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