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로부터 며칠 뒤 메일에 답장이 왔다.
[시혁에게.
먼저 메일을 보내 주신 것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열정적인 번역가는 처음인 듯합니다.
통보가 아니라 차근차근 한국 상황과 정서, 글에 관한 내용을 간단하게 적어 주셨더군요.
메일이었지만 굉장히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작가라서 더욱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글이었지만 시혁의 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 부분에 관해서 설명을 추가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독성을 떨어뜨릴까 봐 운율에 대해서 말해 주셨던 부분도 좋았습니다.
번역 부분은 시혁에게 맡기겠습니다.
이미 맡겼지만요. 하하.
개인적으로 굉장히 흥미가 가서 연락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한국에서 출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여기서 시리즈로 나올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책은 의사가 가장 후회하는 열 사람의 수술이 중심이거든요.
그 외에 잊어버렸던 수술도 성공시킬 겁니다.
그 과정을 어떻게 그릴지는 시혁에게도 비밀입니다.
제가 이런 말은 하는 건 다른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만약 한국에서 성적이 괜찮아 또 출판하게 된다면 시혁이 번역을 맡아주세요.
저는 이제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하.
말이 너무 많이 길어졌네요.
몸조심 잘하시고, 또 연락합시다.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은 제이슨이.]
설마 이런 내용이 올 줄은 몰랐다.
노트북 앞에서 메일을 보고 있는데 히죽 웃음이 나왔다.
“시하야!”
“아아.”
“메일이 왔어. 메일이. 내 칭찬이 엄청난데? 굉장하지?”
“아아.”
“너무 좋다. 진짜 너무.”
누군가에게 실력을 인정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뿌듯한 일인지 싶다.
그것도 작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큰지 모른다.
심할 때는 번역한 글이 자신의 글이 아니라고 하는 작가도 분명 있으니까.
나는 시하를 들고 빙그르르 돌았다.
시하는 슈퍼맨 놀이를 하는 줄 아는지 두 팔을 위로 들었다.
“오호. 자세가 좀 나오는데? 간다! 슈욱.”
나는 시하를 옆구리에 끼고 거실을 누볐다.
“부웅!”
“부부!”
“오! 지금 부웅 한 거야?”
“부부.”
나는 시하를 내려놓았다.
사르륵.
머리카락이 내려오며 시하의 눈을 가렸다.
“머리도 잘라야겠네. 형이 잘라줄까?”
“아아.”
“농담이야. 형아는 시하 머리까지 예쁘게 하는 법을 모르거든. 우리 미용실이나 가자.”
“아아.”
나는 시하와 함께 집을 나섰다.
“어?”
문을 열고 나가자 앞집에 있는 주민이랑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인사도 못 드렸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아아.”
시하도 나를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내 다리에 딱 붙어서 몸을 숨겼다.
이유는 앞에 있는 남자가 너무 컸다.
얼핏 보기에도 키가 2m쯤 될 것 같았고 몸무게도 상당할 것 같았다.
그만큼 커다란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허벅지가 장난 아니라서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보디빌더인가?’
잠바를 입고 있었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근육질 몸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애기가 귀엽네요.”
험악한 얼굴의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네. 제 동생 시하예요. 저는 이시혁이고요.”
“아, 동생이었어요? 와! 나이 차이가 엄청 많이 나네요. 저는 젊은 아버지신 줄.”
“하하. 다들 그렇게 오해의 시선을 보내더라고요.”
“그러게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저는 백수인 백동환이라고 합니다.”
“아, 저는 이시혁이에요. 그런데 백수요?”
“네. 사실 제가 성우를 꿈꾸고 있거든요. 학원에 다니는 중입니다. 파릇파릇한 스무 살이죠.”
“아. 성우. 네?! 스무 살이요?!”
“하하. 다들 그렇게 오해의 시선을 보내더라고요.”
“아, 뭔가 죄송하네요.”
“괜찮습니다. 모든 사람의 반응이 비슷하거든요. 나중에 얼굴이 그대로다. 이런 소리를 듣는 것도 좋죠.”
험악한 얼굴과 몸이라서 조금 선입견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의외로 착한 남자일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성우 지망생이라니 의외다.
나는 PT 선생님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형아.”
“응? 아. 아. 보기보다 좋은 분이야.”
“저어. 보기보다, 라고 말씀하시면 슬픈데요?”
시무룩.
다 큰 어른의 시무룩을 보니 조금 그렇네.
시하가 뭔가 결심한 표정을 짓더니 앞으로 나서서 팔을 활짝 벌렸다.
“형아!”
“으응?”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형아. 디켜.”
“응?”
시하가 자신의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형아. 디켜.”
그런 시하의 말을 백동환이 알아들었다.
“형아를 지킨다고 하는데요?”
“헐? 정말? 형아를 지켜줄 거야?”
“아아.”
백동환이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악당이 되어 버렸네요. 흠. 그럼 한번 보여드리죠.”
“네?”
백동환이 목을 풀더니 얇은 모깃소리를 내었다.
“흐흐흐. 네가 형아를 지킬 수 있을까? 나에게는 비장의 변신이 있다.”
뭔가 어디서 들어본 전대물의 악당 소리.
나는 이 사람이 정말 성우를 준비하는구나, 싶었다.
시하는 백동환의 바뀐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물론 딱 나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형아. 디켜.”
“시하야. 이럴 때는 도망가는 게 최고야.”
“아니, 그러면 내용이 안 이어지는데…….”
나는 시하를 옆구리에 끼고 그대로 내달렸다.
뒤를 돌아보며 백동환에게 말했다.
“다음에 또 이야기해요.”
“네. 안녕히 가세요.”
모깃소리 내는 악당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미용실로 향했다.
***
SKY 미용실.
뭔가 대학교가 생각나는 간판이지만 원장님의 이름이 ‘하늘’인 모양이었다.
“어떤 머리를 하러 오셨어요?”
“저는 괜찮고요. 여기 애기 머리 좀 해 주세요.”
“원하시는 스타일 있으세요?”
“네. 그. 요즘 귀여운 바가지 머리로.”
“호호. 다들 이 나이 때는 바가지 머리로 하더라고요.”
“네. 아마 이 나이 때만 할 수 있는 스타일이긴 하죠.”
“그런데 아빠분도 해야 할 거 같은데요?”
“아, 그런가요? 그리고 저는 형이에요.”
“아하. 그러면 형제가 같이 나란히 앉아서 하면 되겠네요.”
“그럴까요? 시하야. 오늘 머리 스타일 바가지 머리로 하는 거야. 어때?”
“아아.”
음. 생각해 보니 시하에게 의견을 묻는 게 좋지 않을까?
“이런 머리로 하는데 괜찮아?”
“아아.”
끄덕끄덕.
시하도 마음에 드는 듯했다.
“형아.”
“응?”
시하가 사진을 가리키더니 내 머리를 가리킨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우리 시하가 그럴 리가 없다.
“설마 형아도 이 머리를 하라고?”
“아아.”
끄덕끄덕.
“풋!”
뒤에서 미용사들의 웃음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어떻게 하지?’
솔직히 말해서 하기 싫다.
많이 하기 싫다.
이런 머리는 어릴 때 많이 해 봤다.
내가 아무리 안 꾸미고 다니는 대학생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머리는 하고 싶지 않다.
“형아~”
그런데 눈앞에 귀여운 생물체가 내 다리를 흔든다.
그와 동시에 내 마음도 흔들린다.
여기에 넘어갈 것 같다.
나는 미용사를 보며 말했다.
“저도 예쁘게 잘라 주세요.”
“풋! 네. 알겠어요. 저희가 쌍둥이처럼 잘라 드릴게요.”
그렇게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머리를 자르게 됐다.
사각사각.
뭉텅뭉텅 잘리는 머리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그래. 시하가 원하는데 다 해 줘야지.
‘다음에는 시하에게 다른 스타일로 하자고 보여줘야겠다.’
이미 늦은 후회를 하며 우리 두 형제는 머리가 잘리는 걸 보고 있었다.
“어머. 애기가 완전 얌전해요. 이름이 시하예요?”
“네. 시하.”
“이야. 시하 정말 얌전하네. 고개도 안 돌리고 거울을 딱 정면에서 보네. 잠깐 조금 숙여볼까? 옳지.”
우리 시하만큼 얌전한 아이는 없다.
괜히 뿌듯해하며 나는 시하를 힐끗 보았다.
“형아분. 고개 돌리지 마세요.”
“넵.”
이런 건 영상으로 남겨야 하는데. 아깝다.
그렇게 우리는 머리카락을 다 잘랐다.
“형아!”
“와. 시하야. 너무 귀여워.”
뒤에 있던 미용사와 기다리던 사람들도 귀엽다고 난리다.
“애기 너무 귀여워.”
“저 볼에 사탕 두 개 넣은 거 같아.”
“악! 너무 귀여워.”
“무표정. 도도해.”
도도하다니.
시하는 상당히 마음에 드는 표정을 짓고 있다.
“형제 둘이 있으니 더 귀엽네.”
거기에 나는 좀 빼줬으면 좋겠다.
거울을 보는데 뭔가 바보같이 보인다.
“형아.”
시하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내 머리와 자기 머리를 번갈아 본다.
그래. 네가 좋으면 다 좋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는 한바탕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그것도 나쁘지 않은 추억이 되겠지.
“시하야. 형아랑 똑같네.”
“아아.”
나는 시하를 안았다.
시하가 내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이게 그렇게 좋나?
***
강인대학교. 취업센터 휴게실.
“푸하하핫!”
문도환이 나를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너 머리가 왜! 시하랑 같아! 푸하핫!”
“너무 웃지 마세요. 나름 잘 어울리거든요? 그치, 시하야?”
“아아.”
“아니. 큽. 아, 웃겨. 우리 시혁이 3살 됐어요?”
“놀리지 마요. 이거 시하가 골라준 스타일이니까.”
내 이럴 줄 알았다.
이제 어린이집도 개원이고 학교도 개강일 텐데.
조용하고 아싸 같은 생활에서 애들에게 빅 웃음을 주게 생겼다.
이렇게 친한 형이 웃을 정도면 어느 정도라는 거야.
“아, 그래. 시하가 감각이 있네. 나중에 헤어 디자이너 되는 거 아니야?”
“가능성이 있죠.”
“하여간 웃기다니까.”
“그래서 언제 끝나요? 맛있는 거 사주신다는 말에 이렇게 왔는데. 그치 시하야?”
“아아.”
“다 정리했어. 여기서 야근할 일이 있겠어? 좀만 더 기다려줘. 가방만 챙기고 올 테니까.”
“나도 교직원이나 할까? 편해 보이는데.”
“하지 마라. 보기보다 박봉이다. 시하야. 여기 젤리 장난감 갖고 놀고 있어.”
주물럭. 주물럭.
시하가 오랜만에 젤리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쭈욱.
마치 치즈처럼 늘어나며 탄성력이 엄청났다.
형은 저 장난감을 아직도 갖고 있었어?
정말 씻어서 간직하고 있을 줄이야.
“다 챙겼어. 가자.”
“시하야. 그럼 갈까?”
“아아.”
우리는 그렇게 식당으로 왔다.
“형. 맛있는 거 사준다면서요?”
“왜! 여기 이모 손맛이 얼마나 좋은데! 혹시 이모 무시해?!”
그때 이모가 나와서 등을 때렸다.
“으이구. 손아. 왜 또 왔어. 이왕 사주는 거 비싼 거 사줘야지.”
“아. 이모. 내가 매출 올려주는 거라니까. 이렇게 후배들에게 홍보해야 자주 오고 하지. 그리고 나 박봉이야.”
“자랑이다! 어서 와요. 애기도 오랜만이네? 내가 비싼 건 못 내줘도 맛있게 해줄 수는 있어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하하. 그때 정말 맛있었어요. 꿀맛이었죠.”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자리에 앉아요.”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 계란찜과 두루치기를 시켰다.
두루치기는 최대한 맵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
시하도 먹을 거니까.
“갑자기 웬 바람이 불어서 만나자고 했어요?”
“이렇게 안 부르면 네가 나오지 않을 거 아니야. 번역한다고 하고, 시하 돌본다고 하고.”
“형. 나 바쁜 남자야.”
“알지. 그래도 가끔 이렇게 바람이라도 쐬면 좋잖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학교 근처에서요?”
“야. 사람 만나는 게 바람 쐬는 거지. 그것뿐인 줄 알아? 네가 학교에 관심 없어서 좋은 정보를 물어왔지.”
“뭔데요?”
“이번 연도에 갑자기 바뀐 지침이 하나 있어. 졸업 인증제 말이야. 하나 더 추가됐다.”
“네? 아니, 그건 왜 매년 바뀌어요?”
“나도 모르겠다. 이건 왜 맨날 바뀌냐?”
나는 머리가 아팠다.
괜히 또 자격증 공부를 해서 인증을 받아야 하나?
“무조건 해야 하는 거야. 학점으로도 인정해 준대.”
“그게 뭔데요?”
“현장실습. 방학 때 하는 그거.”
“아, 현장실습…. 제가 어떻게 방학 때 해요. 시하 봐야 하는데.”
“시하 볼 수 있는 곳으로 배치하면 되지. 솔직히 현장실습 그거 그냥 잡무 처리하는 거잖아.”
실제로 여러 업체의 반강제적인 협력 때문에 형성된 현장실습이다.
취업률 때문에 시장이 펼친 정책과 관련되어 있었다.
“근데 그거 알아?”
“뭐가요?”
“내가 현장 실습할 수 있는 장소를 학생이 정할 수 있냐고 물어봤거든.”
“그래서요?”
“된대. 네가 업체만 잘 찾아서 서류를 받아내면 되는 거지.”
“제가 아는 회사가 어디 있…….”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스쳐 지나갔다.
[가지고 싶다. 이시혁.]
아니. 이건 아니야.
“일단 나중에 생각해 볼게요.”
“그래. 아직 방학까지 한참 남았으니까. 시하 개원하면 좀 더 편해지겠지.”
“편해지는 건 모르겠는데 번역할 시간은 좀 더 확보되겠네요.”
“좀 쉬기도 해라.”
그때 이모가 음식을 꺼내면서 문도환의 등을 철썩 때렸다.
“너나 잘해. 너나. 아주 태평하다니까.”
“아아. 아파.”
그때 시하가 말했다.
“노나 자래.”
“어머.”
이모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