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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15/500)

15화

아스퍼거 증후군.

사회적으로 서로 주고받는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으며, 행동이나 관심 분야 또는 활동 분야가 한정되어 있어 같은 양상을 반복하는 증세를 보이는 질환.

‘아니야.’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치고는 시하가 너무 귀여웠다.

이게 아니지.

시하의 그림을 보는 것은 이번이 세 번째.

하지만 단언하건대 지금처럼 저런 그림 실력은 없었다.

재능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봐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던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축구공 그림이라던가…….

그림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아마 다른 사람들이라면 상상력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철저하게 분해하는 관찰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하가 그린 펭귄 캐릭터는 굉장히 잘 관찰되어 있었다.

비록 캐릭터라는 창작이 들어갔지만, 펭귄의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선과 선이 만나는 부분을 진하게 만들어서 그림의 선명도를 높였다.

과연 이걸 3살이 이해하고 그렸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건가?’

힌트는 어느 정도 있었다.

열린 상자, 어머니의 태블릿, 갑자기 오른 열과 능력.

내가 아버지의 노트북으로 얻은 능력이 시하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면?

그래서 이런 능력을 보이는 거라면?

‘아스퍼거 증후군은 아니지. 그리고 당연히 서번트 증후군도 아니고.’

하지만 과연 앞에 있는 송예나도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네?”

“아스퍼거 증후군 아니에요.”

“그치만 지금 이건…….”

“생각해 보세요. 의사니깐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시하는 굉장히 의사소통이 잘돼요.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었다는 베토벤은 의사소통의 실용성이 부족했죠.”

“시하도 부족한 경향이 있잖아요.”

“그건 아직 모르는 거죠. 시하는 이제 ‘차거.’도 말하고 ‘뜨거.’도 말하기 시작했어요. 저랑 의사소통도 잘 통하고요.”

“흐음.”

사실 근거가 조금 빈약하기는 하다.

이거 유전자 검사라도 해야 하는 건지…….

“아! 그래. 아스퍼거 증후군은 의사소통 중에 얼굴 표정과 몸짓을 사용하는 경우가 적은 편이잖아요. 우리 시하는 얼마나 풍부한데요. 그치. 시하야.”

“아아.”

송예나가 시하를 보다가 다시 나를 봤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왜요?”

“몸짓은 많이 사용하는 것 같은데 표정은…….”

“그건 다른 사람들의 눈썰미가 없는 거지 시하 잘못은 아니에요.”

“하아. 뭐, 네. 미심쩍은 부분도 많고 아직 확정적이라고 말할 수도 없네요. 참 신기하네요.”

그녀도 어긋나는 부분이 많은 시하 때문에 뭐라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다른 사람 눈으로 보면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그럼 일단 지켜보는 거로 하죠. 한 달 뒤에도 이 상태면 정말 고민해야 하는 문제니까요.”

“네. 그렇게 해요. 그리고 음. 혹시 모르니까 유전자 채취도 조금 할 수 있을까요? 시하가 싫어하면 안 하겠지만.”

“뭐, 머리카락이나 침 정도면야.”

아마도 그냥 평범한 유전자의 배열이 나오지 않을까?

아니지. 아주 특별하고 귀여움 유전자 배열이 있을 수도 있다.

이거 학회 논문 발표 감인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형아!”

“응. 펭귄이네. 펭귄. 진짜 잘 그렸다!”

“아아.”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시하의 능력에 대해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예고에 입학하고, 그림 실력도 상승하고, 이미 미대생으로 성장하기까지.

거기에 얼마의 비용이 드는지 생각했다.

이젤 비용부터 유화 비용까지.

예술을 하려면 엄청 돈이 많이 든다는데.

남들 다 하는 유학도 보내려면 얼마가 드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형아.”

나는 시하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너무 갔네.’

아주 먼 미래를 꿈꿨다.

아직 시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김칫국 한 사발을 들이켜 버렸다.

“응? 시하야. 많이 졸려?”

시하가 눈을 느리게 껌뻑였다.

끄덕끄덕.

팔을 벌려 안아 달라고 한다.

나는 그대로 시하를 들어서 엉덩이를 토닥였다.

등보다는 빵빵한 궁뎅이를 토닥이고 싶었다.

“자자. 코오 하자.”

“아아.”

시하가 눈을 감았다.

코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잠들어 버렸다.

피곤할 만했다.

오늘만 해도 참 여러 사건이 있었으니까.

아직 시하가 어리기도 하고.

‘미술은 무슨. 하고 싶은 거 해야지.’

머릿속에서 시하의 능력을 지워냈다.

사실 다들 잘하는 쪽으로 진로를 가긴 했지만 시하는 좋아하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다.

섣부른 판단으로 혹시 모를 다른 가능성을 닫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시하가 즐거워하면 되었다.

평범한 아이처럼 말이다.

지금 나에게는 그 ‘평범’조차도 조건을 맞추기 꽤 벅차니까.

‘내가 정말 부모의 자리를 대신해줄 수 있을까?’

언제나 돌아오는 의문에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어느새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시하를 방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주며 배를 두어 번 두드려준 뒤, 나는 거실로 나왔다.

노트북을 펼치고 심호흡을 했다.

‘돈을 벌자.’

틈나는 시간마다 일해야 돈을 벌 수 있다.

이 책 한 권을 가지고 석 달에서 여섯 달을 끌고 싶지 않았다.

보통 번역이 두 달이 걸릴 테지만 지금 능력이라면 빠르면 한 달 안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두 개의 노트북으로 하나에는 스캔본을 띄우고, 하나에는 한글 파일을 띄웠다.

키보드에 손을 올리며 빠르게 번역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금색 시곗바늘]

이것은 한 의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작은 할아버지인 의사가 정말 후회를 많이 했던 10가지 수술을 회상한다.

조금만 손이 더 빨랐더라면.

시간을 더 줄였더라면.

자잘한 실수가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더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 속에 죽어가는 의사에게 하나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다시 의사였던 시절로 돌아갔다는 점.

그리고 생긴 특별한 능력.

‘금색 시곗바늘’

골든아워 시간으로 돌아가는 능력.

정확히는 수술 시작 전으로 돌아가는 능력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깊은 흥미를 느꼈다.

그렇게 막 사기적인 능력은 아니었다.

아무리 수술 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살릴 수 없는 사람은 분명히 있을 테니까.

‘역시 재밌네.’

왜 이 책을 번역하려고 골랐는지 이해가 갔다.

하지만 번역하면서 문제점도 보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환경에 대한 보충 설명을 넣을 필요성이 있었다.

나는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홍진수에게 문자를 넣었다.

[혹시 작가분 메일 좀 알 수 있을까요?]

실제로 원작자와 메일을 하며 궁금한 것을 물어보거나 의논하는 예도 있다.

답변을 안 한 거나 안 받는 경우도 많지만 이렇게 인맥이라도 생기면 나중에 번역하다가 막혔을 때 물어볼 수도 있었다.

‘이제 척척 머릿속에 떠오르네.’

그런 생각을 하며 붉은 글씨로 내용을 추가했다.

나중에 홍진수가 판단해서 살릴지 말지를 표시해두어야 했다.

웅웅.

[홍진수 과장]

문자를 보냈더니 전화가 온다.

“네. 홍 과장님.”

「시혁 씨!」

굉장히 기쁘고 상쾌한 목소리였다.

「작가 메일은 왜요? 뭔가 막히는 게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지문에 설명을 좀 더 추가하고 싶어서요. 아시다시피 한국 의료생활과 외국 의료생활은 다르잖아요.”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한국은 의사가 병원 소속이라면 여기 소설에 나오는 병원은 의사가 계약직이니까요. 간호사만 병원에 소속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관계도 많이 달라지니깐요.”

관계를 갑과 을로 나누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되면 간호사와 의사의 관계는 굉장히 동등해진다.

그러면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병원 생활이 상당히 달라진다.

「아! 그렇네요. 그걸 생각 못 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지문을 만들어서 메일로 의견을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이야. 진짜…. 기성번역가 같네요. 정말 이 일이 처음 맞죠?」

“맞는데요. 일단 초반 분량을 번역하고 제가 생각한 방향성으로 했는데 그거 좀 확인해 주세요.”

「시혁 씨. 이번 책 작업 끝나면 우리 회사에 안 올래요? 제가 정말 잘해 줄게요.」

“아 통화음이 이상하네? 여기 전파가 안 좋나 봐요. 일단 문자나 톡으로 보내 주세요. 왜 이렇게 상태가 안 좋지?”

「가지고 싶다. 이시혁.」

“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끊을게요.”

뚝.

전화를 끊고 톡을 기다렸다.

[작가분 메일은 [email protected]입니다. 취업자리 구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주세요. 직권 남용으로 꽂아드리겠습니다. 여기 꽃길만 깔려 있어요.]

꽃길은커녕 야근의 길만 깔렸겠지.

나는 그저 피식 웃으며 메일을 작성했다.

번역가를 맡은 것과 왜 이런 지문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미국의 강세와 운율과 다르게 한국적인 운율이 어디서 비롯되어서 나오는지.

그리고 장문과 단문의 적절성을 작성하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30분이나 흘러 있었다.

꼼꼼하게 확인하고 정중한 표현까지 곁들이니 완벽했다.

‘이대로 보내자.’

어쩌면 확인하고 답변이 없을 수도 있다.

그건 알아서 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좋은 번역을 위해 작가와 의견을 나누고 싶었다.

어쩌면 이건 번역가의 자세일까?

***

시하는 엄마의 태블릿을 보았다.

“형아.”

“응. 이건 태블릿이라고 하는데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자 따라 해 봐. 태블릿. 태블릿.”

“아아아.”

“이건 펜. 따라 해 봐. 펜.”

“아아.”

시혁이 시하를 위해 태블릿을 켜줬다.

화면이 나오자 시하는 깜짝 놀라며 보았다.

예쁜 색들이 시하의 눈에 비췄다.

“자. 이 프로그램이 포토샵이야. 그림을 그리는 곳이지. 시하가 아무리 많이 그려도 형아가 지울 필요가 없어요. 이제 냉장고에 그리지 말고 여기에 그리면…….”

시하는 그런 형아의 말을 듣다가 포토샵을 콕콕 클릭했다.

새로 만들기를 클릭하며 레이어도 만들었다.

“어?”

“형아.”

시하는 시혁에게 ‘나 잘했지?’라는 눈빛을 보냈다.

“천재네. 천재.”

“아아.”

호들갑을 떠는 시혁을 보며 시하가 펜을 잡고 그림을 그렸다.

형아가 좀 더 기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하의 주위에 분홍색 빛무리가 조그마한 손을 감쌌다.

마치 누군가 함께 쥐고 있는 모양새였다.

시하는 그 빛무리와 함께 선을 그었다.

‘형아. 형아.’

SD 캐릭터가 점점 그려지고 있었다.

SD란 사람 형태의 캐릭터를 2등신 혹은 3등신으로 큰머리와 짧은 다리, 몸체로 표현하는 미술표현기법을 말한다.

-얼굴은 눈 밑에 광대와 턱의 하관. 두 부분으로 꺾어줘야 해.

아른거리는 희미한 목소리가 시하의 귀에 닿았다.

“아?”

시하가 한 번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 시하야?”

“아아.”

시하는 다시 액정에 시선을 두고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볼살 통통한 얼굴. 큼지막한 눈.

앞머리, 옆머리, 뒷머리를 세 부분으로 그리며 얼굴을 완성해 나갔다.

마치 그래야 한다는 규칙처럼 얼굴을 순서대로 그렸다.

확대와 축소를 자유자재로 쓰고, 좌우 반전과 회전을 썼다.

시혁은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지켜봤다.

“정말 잘 그린다.”

“아아. 엄마.”

“응? 그래. 엄마의 태블릿이지.”

손에서 빛무리가 물러나자, 시하는 그리던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림을 가리키며 시하가 말했다.

“형아.”

“응? 이거 형아를 그린 거야?”

끄덕끄덕.

시하는 기대했다.

형아가 환하게 웃어주기를.

“이야. 정말 고마워! 완전 똑같아! 이게 바로 인물화구나!”

전혀 아니었지만 시하는 인물화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시혁을 불렀다.

“형아!”

시하는 웃는 형아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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