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500)

11화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KI 대표가 나왔다.

다들 모여 있는 것을 보더니 호통을 쳤다.

“다들 일 안 하고 뭐 해? 어서 흩어져.”

그 말에 다른 직원들은 아쉬움을 가득 남기며 나를 떠나갔다.

대표가 나를 보더니.

“아! 시혁 씨?”

“네.”

“그때 저희 직원이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드리죠.”

“대표님이 왜 사과를 하세요.”

“뭐 직원들의 책임은 제 책임이니까요. 서운한 거 있으면 오늘 풀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홍 과장. 잠깐 나 좀 보지.”

홍진수가 내 어깨를 잡았다.

“오늘 저희 일을 보러왔는데 큰일 아니면 시혁 씨도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어. 빨리 와. 급해.”

이렇게 일 얘기를 들어도 되는 건가?

하긴 상관없으니 안으로 들이겠지.

나는 시하를 불렀다.

“시하야. 가자.”

“아아.”

시하가 쫄래쫄래 내 뒤를 따랐다.

우리는 대표실에 들어갔다.

대표가 말했다.

“어떻게 택수 선생님과 계약은 잘됐어?”

“네. 잘됐습니다. 오랜만에 선생님이 하신 김장김치도 먹었고요. 챙겨 주시더라고요.”

“의리 없게 너만 먹냐?”

나는 두 사람의 말을 듣다가 갑자기 머릿속에 어떤 정보가 흘러나왔다.

송택수.

2000년 4월에 출간된 무협 소설이 한국을 강타했다.

지금 40대에서 50대는 그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15권이나 되는 소설을 완결하고 그대로 소식이 끊긴 거로 알고 있었다.

그 시절의 향수를 잘 느낄 수 있는 깔끔한 소설이었다.

그것만 읽으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밤새 읽고 했던 기억이…….

‘어디서 난 거지?’

나는 전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 기억에 깜짝 놀랐다.

“아!”

내가 소리를 내자 시하도 따라 소리를 냈다.

“아아.”

그러자 대표와 홍진수가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시혁 씨. 택수 선생님을 아시나요?”

“언제부터 우리 시혁 씨가 됐어?”

“오늘부터죠. 앞으로 저희 KI에 편집부장으로 들어올 겁니다.”

“네가 대표해라. 네가.”

“진짜 차려야 하나?”

“허!”

대표와 홍진수가 사이좋게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유명하죠. 택수 작가님. 아는 아저씨들이 이 작가 왜 신작 안 내냐? 뭐 이런 소리를 들었거든요.”

“아, 그거요. 농사지으신다고요.”

“네?”

“천생 농부라서 그래요.”

“아하.”

설마 농사짓는다고 소설을 안 쓰시다니.

대단히 소신 있으신 분이었다.

아마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가 보다.

“선생님이랑 원래 제가 친하게 지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소설을 쓰신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와. 진짜요?”

“그렇다니까요. 아마 또 쓰고 싶은 게 있으셔서 쓰신대요.”

왜 내 심장이 뛰는지 모르겠다.

“형아.”

“응? 아, 그래. 우리 시하는 무협이 뭔지 모르지? 검을 들고 싸우는 거야. 이렇게. 휙휙.”

옆에서 홍진수와 대표가 보탠다.

“그것뿐만 아니라 손에서 바람도 나와요.”

“이를테면 파워레인저지.”

“아이고. 대표님. 요즘 파워레인저 시대 아니에요.”

“알거든? 요즘 가면라이던가 뭔가 그거인 거.”

“그것도 이미 지났…….”

대표가 눈을 부라리자 홍진수가 입을 닫았다.

“흠흠. 그래. 계약이 잘됐으면 됐고. 그거 이야기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전에 말했던 거 있잖아. 우리랑 계약된 책 중에 영어로 외국에 출간하자고.”

“아, 그거요. 알아봤는데 할 사람이 딱 한 명 나타났어요. 일단 확인해 보려고요.”

그 말에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영문 번역이라면 나 역시도 관심이 가는 분야였다.

이 신비한 능력이 어디까지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바탕 KI 미디어를 뒤흔든 다음부터 자신감이 생겼다.

“일단 한번 해 보고 검토를 받아봐야지.”

“그렇게 할게요. 영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샘플은 받아왔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 괜찮아 보이던데요.”

“그래?”

대표가 샘플을 슥슥 넘겼다.

“혹시 저도 봐도 돼요?”

“어. 그래.”

홍진수가 내 폰에 파일을 보내주자 나는 그걸 확인했다.

“어?”

“왜, 그래?”

“그냥 고쳐야 할 게 보여서요.”

“응?”

“여기 보시면 다시 물을 때 sorry?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상황을 보면 이 사람이 말할 때 정중하게 말할 뉘앙스를 풍기고 있어요.”

나는 한글로 된 문장을 손으로 집어주었다.

“실제로 정중한 표현으로 말할 때는 Sorry?보다는 pardon이라고 말하고요. 아무래도 현지 경험이 부족하지 않나 싶네요.”

거기까지 말하고 아차 싶었다.

너무 내 생각대로 말했나?

그런데 두 사람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보석을 발견했다는 모습이었다.

“흠흠.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일하시는데 너무 시간 뺏은 것 같아서요.”

“아니야. 아니야. 우리 시혁 씨 하고 싶은 거 다 해. 이게 아니지. 잠시만 근로계약서하고. 어딨지? 사장님 자리에 있지 않아요?”

“그렇지. 그렇지. 내 서랍에 똭 챙겨져 있지.”

나는 시하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시하도 너무 지루해해서 이만 가봐야겠어요. 오늘 일하시는 모습 정말 잘 봤습니다. 그럼 다음은 톡으로 연락해요. 그럼 이만.”

내가 고개를 숙이자, 시하도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얼른 잡히기 전에 대표실로 빠져나왔다.

이럴 때 시하 핑계 대는 거지.

잘못하다가 그대로 취직당할 뻔했다.

그대로 KI 미디어를 나오며 시하에게 말했다.

“시하 덕분에 잘 빠져나왔어. 보니까 다들 초췌한 인상이던데 우리 시하와 놀 시간 없으면 안 되지. 그치?”

“아아.”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우리 시혁 씨! 연락할게. 조심해서 가!”

우리는 홍진수의 열렬한 배웅을 받았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시하야.”

“아아.”

“형아가 돈 벌었잖아. 계약금 말이야.”

“아아.”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이렇게 흥청망청 쓰면 안 되지만 나는 첫 월급 같은 느낌이라 그런지 시하에게 사주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사드리고 싶은 부모님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 대신 나에게는 시하가 있다.

“엄청 맛있는 거 먹자. 뭐 먹고 싶어. 말만 해. 물론 소고기 투뿔 등급은 조금 생각해 봐야 하지만. 아니, 형아가 굶으면 사줄 수 있어.”

도리도리.

우리 착한 시하는 형이 굶는 걸 못 보나 보다.

그런데 알아듣는 건가?

“아니면 요리를 할까?”

“형아.”

시하가 내 다리를 잡아끌었다.

“응?”

뭔가 봐둔게 있나 싶어서 시하가 가자는 대로 따라갔다.

익숙한 길을 걸었다.

KI 미디어로 향했던 일직선 길.

시하가 어느 한 곳에 멈춰 서더니 손가락으로 가게를 가리켰다.

[남극에서도 감자탕]

특이한 이름의 감자탕집이었다.

나는 시하가 왜 이 집을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문 앞에 시하가 좋아하는 펭귄이 그려져 있다.

감자탕을 들고…….

“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들어가자.

“형아. 형아.”

“그래. 들어가자.”

지금 시하는 이 펭귄집을 가고 싶은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의외로 사람이 많았다.

“어서 오세요. 몇 명이신가요?”

“이렇게 두 명이요.”

“어머. 애기가 너무 귀여워요. 이쪽으로 오세요. 그리고 저기 놀이방도 있으니 이용하시고요.”

“감사합니다.”

“메뉴 정해지시면 불러주세요.”

나는 메뉴판을 들어 시하가 볼 수 있게 했다.

“시하야. 뭐 먹고 싶어?”

메뉴들의 이름도 특이했다.

[남극의 빙하로 끓인 전골]

[펭귄이 좋아하는 감자탕]

요즘 이런 게 먹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아.”

시하가 ‘펭귄이 좋아하는 감자탕’을 골랐다.

뚝배기로 되어 있어서 많이 뜨거울 것 같았다.

“여기 감자탕. 으음. 두 개요?”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기면 하는 수 없는 거고.

“그리고 아기가 먹을 수 있게 빈 그릇도 가져다주세요.”

“네.”

나는 준비된 가방에서 시하의 턱받침을 해주고 전용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곧 뜨거운 감자탕이 도착했다.

“시하야. 형이 후후 불어서 줄게. 알았지?”

“아아.”

나는 뼈를 바르기 시작했다.

후후.

입술에 한 번 대어 보고 뜨겁지 않다 싶으면 시하의 빈 그릇에 올려주었다.

시하가 숟가락을 야무지게 움직여서 입에 넣었다.

국물이 볼에 묻었지만, 그것마저 귀엽다.

“형아.”

자기 손에 조금 튀었는지 닦아 달라고 한다.

우리 시하 엄청 깨끗한 남자다.

그런데 왜 얼굴은 안 닦아 달라고 하니?

그렇게 열심히 먹이고 있는데 앞에 애 엄마가 보인다.

“어휴. 우리 준이도 먹어야지.”

“시러.”

휙.

“저기 애기 봐봐. 엄청 잘 먹지 않아?”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물오물.

얼굴에 다 묻히고 먹는 것만 빼면 완벽하다.

아직 어려서 얼굴에 묻히는 건 어쩔 수 없다.

“형아.”

시하가 손을 내밀었다.

그래. 네가 왕이다. 왕.

나는 집사처럼 영광스럽게 손을 닦았다.

“저기. 애기 봐봐. 엄청 맛있게 먹네? 우리 준이도 먹자. 응?”

“우웅.”

앞에 있는 애기가 고민하다가 시하를 보았다.

다시 한번 고기를 보다가.

“응.”

“그래. 우리 준이 잘 먹네~”

그제야 준이라는 애가 열심히 주는 대로 먹기 시작했다.

그때 아이의 엄마와 눈이 마주쳤는데 고맙다는 제스처가 보였다.

나 역시도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뭔가 동지애가 불쑥 솟아오른다.

이게 애 키우면서 느껴지는 텔레파시인가?

“형아.”

“네.”

정신 차리고 나는 열심히 고기를 바쳤다.

***

펭귄 옷을 입은 시하와 펭귄 감자탕의 투 샷을 찍고 난 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시하야 옷 갈아입자.”

도도도.

시하가 신발을 벗자 도망갔다.

아직도 그런 기운이 남아 있을 줄이야.

하지만 오늘은 시하를 잡을 미끼가 있다.

나도 이런 건 성장했지.

“자 봐봐. 오늘 찍은 사진이야.”

내가 폰에 있는 앨범을 꺼내자 시하가 그 자리에서 멈췄다.

우뚝.

몸을 자연스럽게 돌려서 내 다리에 찰싹 붙었다.

“형아.”

자기도 보고 싶은지 팔을 위로 뻗었다.

나는 재빨리 잠바를 잡아서 그대로 들어 올렸다.

단추 역시도 풀며 펭귄 옷을 한 번에 벗겼다.

알몸에 기저귀만 남은 시하.

이제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폰을 시하의 손에 맡겼다.

쿵.

시하가 사진을 보기 위해 폰을 머리에 박았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면 눈 나빠져. 머리를 떼고 봐야지.”

“아아.”

시하가 머리를 떼고 폰을 보기 시작했다.

귀엽게 나온 시하와 오늘 만난 누나의 사진이었다.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자. 옷 갈아입자.”

나는 정신 팔린 틈을 타 재빨리 옷을 갈아입혔다.

눈은 폰을 떼지 않은 채 열심히 팔을 쑥쑥 넣어준다.

굉장히 순종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저 사진이 그렇게 재밌나?

‘Siha라고 인스타 만들어 달라고 하긴 했는데 말이야.’

저 사진을 보니 여성이 한 말이 떠오른다.

별로 올릴 생각은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나 그런 곳에서도 올릴 생각이 없었고.

‘인스타는 모르겠는데 영상은 좀 그렇지.’

만약 한다면 댓글이 안 달리게 만드는 게 좋다.

애한테 욕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세상은 워낙 다양해서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영상을 올리는 건 뭔가 돈벌이 수단 같은 느낌이라서 거부감이 든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시하가 하고 싶은 것을 했으면 좋겠고.

시하가 불필요한 욕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절대 가만 안 두지.’

그렇게 나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형아.”

“응?”

시하가 내 폰을 가리켰다.

“형아.”

“아! 형아 사진? 역시 형아랑 나온 사진을 보고 싶은 거였어?”

끄덕끄덕.

“형아.”

“그래. 이 누나 사진보다 형아 사진이 더 좋지?”

“아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나는 사진을 넘기며 우리가 찍은 사진을 찾았다.

두 사람이 똑같은 포즈로 브이 자를 하는 모습.

시하가 마음에 드는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가 사라졌다.

“어?”

폰은 시하 손에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마음에만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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