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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500)

9화

한태성을 몰아붙일 때 나는 신비한 감각을 느꼈다.

이 업계 사정 따위는 하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수치들이 내 입에 흘러나오는지.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보들은 내 머릿속에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이용했다.

표준 계약서를 볼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

이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머릿속에 있는 지식도 이런 불합리한 계약을 하면서 경력 쌓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냥 지른 것이 아니었다.

이런 표준 계약서가 오게 된 과정만 봐도 그렇다.

무려 교수님의 소개와 홍 과장의 신뢰가 걸린 문제였다.

홍 과장이 이런 계약서를 작성할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확인해 보니 역시나.

당황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어째서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계약하는 것은 홍 과장과 이야기를 나눌 때다.

“정말 이렇게 나와도 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문도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요. 형. 홍 과장에게 말하면 대번에 사과할 사람이에요. 뭐, 원래 이런 거라고 하면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거겠지만.”

“그렇게 되면 어떡해?”

“일이 뭐 거기만 있나요. 번역 일이야 지금 할 수 있는 것에서 최선의 선택인 것같이 느껴지지만. 찾아보면 의외로 할 수 있는 일이 많겠죠.”

“와. 이제 좀 여유로워졌는데? 이 형이 또 도와줄 거라 생각하는 거지? 역시 취업센터 교직원 인맥은 하나 있으면 좋다니까.”

“그런 건 아닌데…….”

“짜식. 부끄러워하긴. 든든한 빽이 나 말고 더 있어?”

사실 든든한 빽이라는 능력이 생긴 거지만.

이런 말은 안 하는 게 좋겠지.

“그런데 우리 시하는 충분히 재밌게 놀았어?”

“아아…….”

시하가 졸린지, 눈을 비볐다.

아까 각티슈를 한태성에게 날릴 때는 속이 통쾌했다.

내가 몰아붙인 것보다 더.

역시 순진한 아이의 행동이 더 잔인한 법이다.

나에게만 잔인하지만 않으면 되지.

“형이 업어줄까? 많이 피곤해 보이네.”

“아아.”

끄덕끄덕.

나는 시하를 업었다.

등이 묵직한 느낌이다.

앞으로 좀 더 무거워졌으면 좋겠다.

지금의 무게는 너무 연약해 보였으니까.

이대로 쑥쑥 컸으면 하는 마음이다.

문도환이 그런 우리를 보더니.

“정말 좋아 보인다. 왠지 너희 둘을 보고 있으니까 걱정이 안 돼.”

“잘 키워야죠.”

“너도 잘 크고.”

“전 다 컸죠.”

“어디?”

문도환이 옆에서 과장되게 무언가 찾는 시늉을 한다.

아무래도 뭔가 동생 같아서 나를 어리게만 보는 것 같았다.

하긴. 23살이면 아직 어리긴 하지.

“여기요. 여기. 오늘 정말 고마워요.”

“별걸 다 고마워한다. 덕분에 놀이방에서 실컷 놀기도 했고, 공짜 커피도 마셨고.”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고맙죠.”

“그런데 내가 멀리 있어서 못 들었는데. 대충 멋지고 강단 있는 모습을 보니까 ‘다 컸네.’ 이런 생각이 들더라.”

“하하.”

“하긴 네가 고집스러운 부분이 있긴 하지.”

“강단 있는 게 왜 또 고집이 되었을까?”

“원래 장점은 단점과 함께 있는 거 아니겠어?”

“뭐, 그렇죠.”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시하를 눕혔다.

살며시 베개에 누운 시하가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 평화스러운 모습을 계속 보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나는 시하의 펭귄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동그라미가 쳐진 부분과 전체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다 찍었다.

그런 다음, 홍진수의 톡으로 전송했다.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네. 시혁 씨. 계약은 잘 끝나셨나요?」

그 말에 나는 한태성이 홍진수에게 아무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명백한 증거가 손에 있는데 말하기 쉽지 않았겠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홍진수 역시 한태성과 같은 편이 아님에.

“계약은 잘 안 되었어요.”

「네?」

“아마, 바로 톡에 있는 문서를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거예요. 출간 1개월 후에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 적혀 있고, 번역가 이름을 써준다는 문장이 계약서에 없었으니까요.”

「아니. 그럴 리가요. 분명 표준 계약서에 그런 내용은 없을 텐데…….」

“그러니까요. 왜 그런 내용이 있고, 왜 있을 내용이 없을까요?”

「하아…….」

사진을 확인했는지 홍진수의 깊은 빡침이 폰 너머로 느껴졌다.

화를 가라앉히는지 몇 번의 심호흡이 들렸다.

「죄송합니다. 정말 시혁 씨와 교수님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빈번히 있다는 건 아는데 제가 당할 줄은 몰랐네요. 교수님 입장도 있으신데.”

「그….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한 주임을…….」

“한태성 주임이 어떻게 되는지 저는 관심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제대로 된 대우를 바랄 뿐이에요. 단가를 2,500원으로 올려주세요. 그거면 저는 사과로 됐습니다. 우리 좋게 좋게 해결하죠.”

「네. 배려 감사합니다. 많이 화나셨을 텐데. 그리고 사인을 안 하신 건 다행입니다. 업계 사정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는지…….」

홍진수의 감탄이 나왔다.

“대충 인맥으로 사정은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계약하러 나갈 수는 없잖습니까.”

「철저하시네요. 보통 이렇게 소개받고 나오면 사람을 믿고, 돈만 확인하고 사인하기 마련인데…….」

“그런 사람이 많다고는 알고 있습니다.”

사실은 하나도 모르고, 그냥 머릿속에 심어진 지식으로 말하는 거지만.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대체 그분이 저한테 왜 이랬을까요?”

「아. 그건 여러 복합적 요소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이번에 시혁 씨가 번역할 ‘금색 시곗바늘’이 원래 한 주임이 번역을 맡기로 했거든요.」

“아. 그래서…….”

「그리고 초창기 직원이 아니기도 합니다. 편집자에게 초창기 직원이 어딨냐만은. 경력직으로 다른 출판사에서 왔거든요. 아마 그때 못된 관행을 배운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절 초짜라 만만하게 본 거군요. 책을 뺏겼다는 생각은 덤이고. 근데 그 책을 왜 제게?”

「저희 회사에서 퇴직을 두 명이나 하는 바람에…….」

대충 사정은 알았다.

정말 여러 사정이 복합적으로 일어나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거 출장 중에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제가 믿을 만한 놈으로 보냈어야 했는데…….」

“에이. 지금 일감에 치여 살고 있어서 사정이 안 좋았잖아요. 그 정도는 이해해 줘야죠.”

「정말 감사합니다. 시간 되신다면 사무실에 오실 수 있습니까? 아니면 등기로 계약서를 제가 보내도 됩니다만…….」

나는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그럼 직접 찾아갈게요. 편집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요.”

「별거 없습니다. 하하.」

“그래도요.”

앞으로 내 미래에 대해 천천히 생각한다고 해서 정말 생각만 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움직이고, 보고, 듣고, 찾아봐야 한다.

그것이 천천히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아니, 이건 또 어떻게 알았지?’

뭔가 머릿속에 자기계발서라도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뭐, 도움이 된다면야.’

홍진수가 말했다.

「그럼 모레쯤에 뵙겠습니다.」

“네. 그럴게요.”

***

새벽 5시.

시하는 눈을 떴다.

옆을 보았다.

시혁이 잠들어 있는 모습에 시하가 안심을 했다.

‘형아가 있다.’

시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뚱.

아침이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엉덩이를 한 번 털썩 앉게 되었다.

‘아빠.’

시하가 기어서 거실에 도착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노트북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빛무리는 시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빠.’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시하가 방향을 돌렸다.

향하는 곳은 액정 태블릿이 있는 상자.

그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또 다른 빛무리.

아까의 빛무리가 파란색이었다면 이번의 빛무리는 분홍색이었다.

‘엄마.’

시하가 한참을 그곳을 올려다보았다.

일어나서 손을 뻗었지만, 상자가 울려져 있어서 꺼낼 수 없었다.

입맛을 한 번 다신 시하는 방향을 돌려 시혁에게 갔다.

엉금엉금.

열심히 언덕을 오르듯이 올라서 시혁의 배 위에 안착했다.

가만히 엎드려 귀를 갖다 댔다.

두근두근.

커다란 심장 소리가 마음을 안심하게 만든다.

‘형아.’

안심되는 소리에 시하의 눈이 감겼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는 어딘가 엄마와 닮아있었다.

사르르.

다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몇 분 후.

시혁은 무거운 시하 때문에 신음을 내었다.

“으헉…. 왜 또 여기에…….”

평화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

아침에 배 위에 있는 시하를 떼어내고 씻으러 들어갔다.

일단 시하가 일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머리 감고 세수를 하고 나오면 귀신같이 시하가 일어나 있다.

알람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형아가 머리 좀 말리고 시하도 씻자. 알았지?”

“아아.”

“아니. 잠깐만. 기저귀 갈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시하의 기저귀를 벗겼다.

역시 오줌을 쌌다.

“시하야. 이런 건 말해 줘야지. 앞으로 꼭 말하세요.”

“아아.”

“대답은 정말 잘해. 퍼펙트야. 이제 실천만 하면 되겠다.”

다들 이렇게 애를 키우는가 싶다.

오늘은 KI 사무실을 들르기로 한 날이다.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설 준비를 한다.

“오늘은 좋은 옷 좀 입을까? 회사에 출근하는데 멋진 옷을 입어야지. 그치. 시하야?”

“아아.”

시하가 알아들었는지 어디로 도도도 달려간다.

자기 옷이 있는 서랍을 열고 하나의 옷을 꺼낸다.

그사이 구겨진 옷은 내가 다시 접어 넣었다.

“펭귄 옷 입고 싶어?”

“아아.”

뭔가 인형 탈처럼 후드로 되어 있는 펭귄 옷이었다.

시하가 제일 좋아하고 아끼는 옷이다.

“그래. 그거 입자. 오늘 우리 시하가 거리의 패셔니스타야!”

“아아!”

나는 일체형 옷을 하나씩 입히고 단추를 잠가 주었다.

물론 티랑 바지의 겉에 입혔다.

하나만 입으면 추우니까.

“형아!”

“그래. 오늘 멋지네. 그래도 추우니까 잠바는 입자. 알겠지?”

“아아.”

도리도리.

시하가 잠바를 입기 싫어 도망간다.

이대로 놓칠 수는 없지.

나는 시하를 쫓아갔다.

“거기 서라.”

“아아!”

시하가 힐끗 뒤를 돌아보더니 재빨리 발을 놀린다.

아침부터 레이스 시작이다.

이렇게 한바탕 놀아주면 멈출 걸 알기에 나는 열성적으로 잡으러 갔다.

‘아, 아침부터 체력 딸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시하의 잠바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야. 전쟁.’

벌써 체력전으로 지치면 안 된다.

아직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24시간인 게 미워졌다.

“그럼. 형아도 옷 갈아입을 테니까 짐 챙기고 있어.”

“아아.”

시하가 펭귄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보며 옷을 갈아입었다.

“형아.”

“응? 다 챙겼어?”

어느새 시하가 내 바지를 가져다주었다.

“형아. 입혀 주려고?”

“아아.”

“고마워.”

나는 옷을 받아서 그대로 바지를 입었다.

“그럼 이제 출발해 볼까?”

“아아.”

문을 열고 밖을 나섰다.

시하가 먼저 선두에 섰다.

머리에 펭귄 얼굴인 후드를 쓰고 뒤뚱뒤뚱 걸었다.

등에는 펭귄 가방.

검은 잠바를 입은 펭귄이 거리를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시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 애기 너무 귀엽다!”

“진짜 너무 귀여워!”

“펭귄 옷 너무 잘 어울린다.”

시하를 칭찬하기에 내 어깨가 으쓱거린다.

엣헴.

“아아!”

“꺄아. 손 흔들어주는 것 봐.”

그때 한 여성이 다가와 나에게 말했다.

“저기요. 저 애기랑 사진 한 번 찍으면 안 될까요?”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며 말했다.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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