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500)

7화

“시하야. 잠시만. 전화. 전화.”

나는 시하의 엉덩이에서 얼굴을 뗐다.

“아?”

시하는 뭐가 엉덩이에 닿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얼굴을 뗀 상태라 시하가 눈치채지 못했다.

주르륵.

남은 미끄럼틀 구간으로 내려온 시하는 다시 움직여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미끄럼틀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 전화 받아야지.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010-XXXX-XXXX]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네. 이시혁 씨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KI 미디어 홍진수 과장이라고 합니다. 제게 샘플을 보내셨죠?」

“네. 맞아요.”

「아침에 전화했는데 안 받으시더라고요.」

“아. 저는 모르는 번호면 안 받아요. 폰 번호면 받고요.”

「아, 그래서 안 받으셨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교수님의 소개로 일감을 드리려고 합니다.」

교수님과의 인연에 의해 일감을 준다는 명확한 주장.

나는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샘플을 봤다고 해도 신인이며 초보 번역가였다.

있는 사람들을 쓰면 되는데 굳이 나를 쓰는 것은 아마 교수님의 소개 덕분일 것이다.

「그래도 샘플에서 기본은 하시는 것 같아서 일을 주는 거기도 합니다. 오로지 인맥으로 일을 주는 건 아니라는 거죠.」

“감사합니다.”

「조금 그렇겠지만 매절 계약은 단가의 반 정도밖에 못 드립니다.」

“이해해요. 다른 번역가들도 이렇게 시작한다고 알고 있어요.”

이것보다 더 심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 역시도 알고 있다.

반절이라면 첫 시작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보통 번역가로서 자리 잡는 데 2년은 걸린다고 하니까.

책으로는 10권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이번 책을 잘해 주시면 다음에 단가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생각보다 괜찮은 제안이었다.

이번 책에서 실력을 잘 발휘하면 단가를 인상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시하에게 장난감 하나 더 사줄 수 있겠지.

“좋네요. 제대로 보여드릴게요. 아, 혹시 계약서는 언제쯤 작성할까요?”

「일단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요. 괜찮은 시간으로 문자나 톡을 주세요.」

“알겠습니다. 스케줄 확인하는 대로 문자 남길게요.”

「네. 좋은 하루 되세요.」

“홍 과장님도요.”

통화가 끝나자 시하가 미끄럼틀에서 내려왔다.

“형아.”

“그래. 우리 시하 열심히 탔구나?”

“형아.”

이제야 부르는 것을 보니 통화가 끝난 것을 기다렸나 보다.

시하가 내 다리를 잡아당겼다.

“좋아. 그대로 미끄럼틀 타러 가자.”

나는 시하와 함께 미끄럼틀을 탔다.

엉덩이 공격을 몇 번 당하기는 했지만, 굉장히 즐거웠다.

“시하야. 이제 들어가서 놀자.”

“아아.”

나는 시하의 손을 꼬옥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낯설지 않게 하려고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건 아는데 무엇을 하고 놀아주면 될까?

“형아.”

그 답은 시하가 가지고 있었다.

내 몸을 끌고 오더니 피아노를 가리켰다.

“피, 피아노?”

“아아.”

“형아는 피아노를 못 치는데?”

“아아.”

“알고 있다고?”

“아아.”

“알고 있으면서 쳐달라는 거야?”

“아아.”

그때 뒤에서 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걸로 대화가 통해요?”

“아, 뭐. 대충은요.”

왜 저렇게 해괴한 표정으로 보실까?

내가 뭔가 잘못했나?

“제가 보기에는 시하가 형이랑 같이 치고 싶어 하는 거 같은데요?”

“아, 그런가요? 시하야 그래?”

“아아.”

“그렇다네요.”

원장 선생님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하를 들어서 함께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덮개를 열고 건반에 손가락을 올렸다.

솔솔 라라 솔솔미 솔솔 미미레.

어릴 때라면 한 번 들어본 ‘학교 종이 땡땡땡’이었다.

시하가 음악이 나온 게 신기했는지 눈이 1mm쯤 커졌다.

이건 놀란 표정이었다.

“형아!”

“그래. 이렇게 피아노를 치는 거야.”

뭔가 사기 치는 것 같지만 아마 시하에게는 내가 피아니스트처럼 보이지 않을까?

이렇게 어릴 때 형아의 위엄을 보여줘야지.

나중에 크면 다 들키겠지만.

지금이라도 이 선망의 시선을 즐기고 싶다.

“자. 우리 시하도 함께 쳐 볼까?”

“아아!”

똥땅똥땅.

피아노 소리가 신기한지 시하가 열심히 치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열정에 불타서 ‘학교 종이 땡땡땡’을 계속 쳤다.

이번에는 솔미레미도까지 완주했다.

우리 둘은 그렇게 피아노 앞에 앉아서 한참 동안 똥땅거렸다.

***

우리는 맡겨뒀던 노트북을 찾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시하는 이미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 노트북을 켜봤다.

‘왜 또 안 켜져?’

그래. 이건 이상한 일이다.

내가 오늘 겪은 일도 이상한 일이고.

머릿속에서 문제가 되는 건 아버지의 노트북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노트북을 켰다.

지이이잉.

“아빠!”

그때 시하가 각티슈를 휙 내팽개치고 내 다리에 찰싹 붙었다.

“아빠.”

“어? 어어. 그래. 아빠의 노트북이지.”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다가오는 걸까?

“형아가 하나 실험해 볼 게 있거든. 그래서 말인데 시하가 좀 도와줄래?”

“아아.”

“여기 아빠 노트북을 잘 보고 있어.”

“아아.”

나는 내 노트북을 들고 문밖으로 나갔다.

다시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지이이잉.

팬이 돌아가며 화면이 나오기 시작했다.

“된다…….”

이 신비한 현상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대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걸까?

저 노트북에 무슨 큰 비밀이 있는 것일까?

나는 노트북을 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노트북의 화면이 먹통이 되었다.

‘나 이외의 노트북은 인정하지 않는다. 뭐 그런 느낌일까?’

노트북에 지성이 있다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결국, 이 노트북을 써야 한다는 건…….”

띠링.

손에 들고 있던 노트북 화면이 불쑥 나타나기 시작했다.

[업데이트 중. 근처 기기와 연동 시작. 1%… 2%…]

“이게 뭔.”

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시작된 업데이트 화면에는 Window도 아니고, 노트북 업체 로고도 아니었다.

무슨 업데이트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평범한 일상에 비일상이 끼어든 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오늘의 기점으로 내 인생에 비일상이 끼어든 걸지도.

“형아. 아빠.”

시하가 식탁 위와 내 손 위를 번갈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빠. 아빠.”

그 순간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하는 왜 내 노트북도 아빠라고 하는 거지?

여기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99% …100%]

[업데이트가 완료되었습니다.]

그걸로 다시 노트북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이제 집 안에 있어도 이 노트북은 켜진다.

나는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해봤지만 별수 없었다.

‘해킹은 아니야.’

이렇게 티 나게 해킹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니었다.

심지어 어디 이상한 사이트를 들어간 적도 없고, 보통 레포트나 웹서핑 정도 하는 게 다였다.

나는 노트북을 내려놓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대었다.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노트북이 되게 해준 건가?’

여러 파일을 뒤져봤지만, 안에 내용은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혹시 몰라 사이트를 들어갔지만, 이 역시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대체 뭔…….’

그 순간.

사이트의 글자들이 내 시야에 순식간에 떠올랐다.

마치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글자들은 순식간에 다른 언어로 변환했다.

그것은 영어였다.

그냥 클릭한 뉴스 기사가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영어로 변환됐다.

껌뻑껌뻑.

나는 눈을 비비며 다시 화면을 보았다.

홀로그램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변화는 확실히 있었다.

지금 한글로 되어 있는 기사가 아주 손쉽게 영어로 변환할 수 있다는 것을.

뇌 속에 모든 문장이 들어 있었다.

한글인데 영어로 읽히는 신기한 기분.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시하만이.

“형아!”

평소처럼 나를 부르고 있었다.

***

KI 미디어.

홍진수 과장은 일에 치여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 일이 줄어들지 않네.”

“과장님. 제발 사람 좀 뽑으면 안 될까요?”

옆에 있던 대리 역시도 앓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KI 미디어를 퇴사한 두 사람 때문에 일이 밀려버린 것이다.

홍진수 역시도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그렇게 구하기 쉬웠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그건 그렇죠. 아, 진짜.”

그때 한 사람이 굳은 얼굴로 홍진수에게 다가왔다.

“과장님.”

“어. 한 주임. 왜 그래?”

“이번에 맡길 소설 있지 않습니까. 그거 제게 맡기려고 한 거 아니었습니까? 저도 번역 작업하고 싶었는데요.”

“아, 그거. 지금 상태를 봐라. 너 다 할 수 있겠냐?”

“전…….”

“딴사람에게 맡기려고. 지금 일이 바쁘잖아.”

“하지만 그 작가분은 제가 꼭 하고 싶었습니다.”

“알지. 그런데 일이 그렇게 딜레이되면 안 좋아. 너도 이해하지? 이거 사람 구해지는 데 짧으면 한 달이야. 내가 봤을 때 3개월은 걸릴 것 같지만.”

한태성 주임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부딪쳐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뻔히 사정을 알면서 고집을 부릴 수 없는 법이었다.

“혹시 번역가는 누굽니까? 제가 좋아하는 작가라 신경 쓰여서요.”

“아, 이번에 알아본 신입에게 맡겨보려고.”

“예? 신입에게요?”

“어. 문장이 유려하더라고. 맡겨도 될 거 같아.”

“아니, 무슨.”

한태성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신인에게 무슨 소설을 맡깁니까?”

“내가 편집자로 붙어서 신뢰를 좀 쌓을 생각이야. 알고 보니 꽤 대단한 아버지를 두었더라고. 이장혁 선생님 알지?”

“설마 이장혁 선생님이 번역을 맡는 겁니까? 아니지. 신인이라고 하셨잖아요.”

홍진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혁 선생님은 돌아가셨어. 내가 맡기려고 하는 사람은 아들이야.”

이장혁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한태성의 말문이 막혔다.

조금의 침묵 뒤에 한태성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번역 능력까지 물려받았을 리가 없잖아요. 이건 경험의 문제인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홍진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생겼다.

“어쩌면 물려받은 걸지도 모르지. 이장혁 선생님의 전직이 통역사였잖아. 아들을 데리고 다녔거나 교육을 그렇게 했을 거야.”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샘플을 봤는데 완벽하더라고. 군더더기가 없었어. 너도 볼래?”

홍진수가 프린트해 놓은 A4 용지를 건넸다.

한태성이 그걸 읽어보더니.

“기본은 됐네요.”

“그치? 그리고 문체도 적합하게 썼어. 근데 대화문을 보면 또 다르거든.”

“그러네요.”

“이 정도면 맡길 만하지?”

“네. 그렇네요.”

한태성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대표가 와서 홍진수를 불렀다.

“이봐. 홍 과장.”

“네. 대표님. 왜 그러시죠.”

“너 오후에 어디 좀 가야겠다.”

“아, 안 돼요. 저 계약 미팅 있다고요.”

“그거 다른 애들에게 넘겨.”

“다들 바쁜데 누구에게 넘겨요. 안 그래도 지금 일을 떠넘겨져서 통화하랴 서류 처리하랴 바쁜데. 편집하는 데도 야근까지 해야 할 정도라고요.”

대표가 뒤를 힐끗 보더니 한태성을 가리켰다.

“일어서 있는 한 주임 보내. 한가해 보이네.”

“아니. 뭔데 이렇게 난리세요.”

“택수 작가님이 신작을 내신다고 하더라. 그런데 널 좋게 봤는지 콕 집더라니까.”

“저요? 하하. 그저 농사일 좀 도와준 게 다인데.”

“그게 먹힌 거지. 그러니 지금 미팅 좀 가봐. 내가 금방 내려 보낸다고 했어. 스케줄 잡기 쉬운 줄 알아?”

“그건 그런데 약속이.”

“어이쿠. 답답아. 지금 사람 모자라서 시간이 금이야. 빨리빨리 일 처리를 해야 그나마 돌아갈 거라고. 사실 택수 선생님만 아니었으면 미팅도 안 보내려고 했다.”

홍진수도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홍진수가 말했다.

“한 주임. 네가 나 대신 갔다 와라. 리틀 카페에 표준 계약서 들고 가면 될 거야. 단가는 반 정도에 측정해 뒀으니까. 부탁 좀 할게.”

“알겠습니다.”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 전화는 해 둘게. 나도 일이 바쁘니까 도저히 시간 내기 힘드네. 그쪽도 일감이 급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며 홍진수는 옷을 입고 사무실을 나갔다.

한태성이 턱을 긁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표준 계약서를 창에 띄우고 단가를 고쳤다.

‘흐음. 이시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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