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73)화 (173/173)

외전 20화

결혼식은 번갯불에 콩 볶듯이 진행됐다.

테렌스와 발레리는 ‘어차피 국혼도 아니니 최대한 조촐하게 식을 올리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황제 부부는 알았다며 받아들였다.

속도위반 결혼이니 일단 빨리 치르고 보는 게 우선이었다.

고로 둘은 중앙궁 그랜드볼룸이 아닌 황궁 채플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바로 프리다의 지하 석실이 있던 그 건물 말이다.

결혼 준비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발레리가 드레스와 부케 따위에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모두 시누이인 프리다의 선택이었고 발레리는 그대로 따랐다.

그녀는 새하얀 이스티아풍 실크 드레스에 은방울꽃 부케를 들었다.

어차피 형식적인 결혼일 뿐인데, 테렌스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정말 목각인형처럼 뚝딱거렸다. 발레리는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결혼식 맨 앞자리에서 피어스, 아니 필리스 모건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진짜로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인 양. 뒷자리에는 황실 직속 정보기관 ‘펠런’ 소속 요원들이 자리했다.

하객으로는 고위 관리들과 귀족들이 참석했다. 그들 사이에는 테렌스의 최측근인 마법사 레이븐이 못마땅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에휴, 속도위반은 안 된다고 했건만, 기어이 이렇게 장가를 가시네.”

결혼 증인으로는 대신관이 직접 나섰다.

“이로써 켄트웰 공작 테렌스 엘리엇 린든과 모건 가의 발레리아나 양이 성혼하였음을 엄숙히 선언합니다.”

대신관의 성혼 선언으로 두 사람의 결혼식은 마무리되었다.

신랑 신부가 개방형 마차를 타고 황성 시내를 행진하는 관례는 따르지 않기로 했다.

임신 중기에 이르렀으니 최대한 몸을 조심하자는 판단에서였다.

발레리는 식을 마치자마자 휴직계를 냈다. 자도 자도 졸리고 몸이 찌뿌둥해서 도무지 호위를 설 수가 없었다.

***

이듬해 봄, 황성에 장미꽃이 만발할 때쯤 발레리는 출산을 했다.

제아무리 건강한 체질이라지만 산고를 견디는 데는 초인적인 힘이 필요했다. 진통이 찾아올 때마다 눈앞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런 미친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단두대로 보내 달라고 외치고 싶었다.

발레리는 이를 빠드득 갈며 다짐했다. 

‘절대, 다신, 앞으로 아기 안 낳을 거야.’

와락 터지는 아기 울음소리와 함께 발레리는 혼절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테렌스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레리. 정신이 드나?”

“애는요?”

“잘 있어. 지금 몸 상태는 어떻지?”

테렌스에겐 발레리의 건강이 우선이었다.

“아직도 죽을 것 같아요. 못 일어나겠으니까 애 얼굴이나 좀 보여줘요.”

테렌스의 뒤에 서 있던 유모가 얼른 요람에서 아이를 데리고 와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불그죽죽하고 쭈그레한 핏덩이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고 있었다.

“으억. 왜 이렇게 주름지고 못생겼어요?”

“아하하, 부인. 원래 신생아는 다 그렇답니다. 잘 울지도 않고 아주 순한 공녀님이에요. 황태자 전하를 쏙 빼닮았죠?”

아이는 이제야 엄마와 눈을 맞춰주었다.

발레리는 제가 낳은 아이를 유심히 관찰했다. 정수리에 옅은 금발이 보송보송하게 나 있다. 눈동자에는 푸른 기가 감돌았다. 테렌스처럼 밝은 하늘색 눈은 아니지만, 파란 물감과 검은색 물감을 반반 섞은 것 같은, 해가 막 뜨기 전의 새벽하늘 같은 눈이었다.

그나마 눈 색이 어두운 게 그녀를 닮은 부분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테렌스에게서 나온 것 같았다.

“하아, 내 배 아파서 낳았는데 남편만 닮은 것 같네.”

발레리는 불만스럽게 입을 비쭉 내밀었다. 테렌스는 그녀가 평소처럼 툴툴거리자 마냥 행복하다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채신머리없어 보일 정도로.

“첫딸은 아비를 닮는다는 말이 있잖아. 정말 고생했다, 발레리.”

곧이어 황후가 찾아왔다. 그녀는 아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감탄했다.

“어마, 프리다 어릴 적하고 판박이네.”

밝은 금발과 푸른 기가 도는 눈동자. 황실의 혈통을 상징하는 외모다. 의심할 것 없이 테렌스의 아이였다.

테렌스는 딸에게 ‘첼리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악기인 첼로에서 따온 이름이라나 뭐라나.

발레리는 특유의 회복력으로 빠르게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 출산한 지 석 달 만에 라벤더궁 호위기사 겸 프리다의 검술 스승으로 복귀했다.

이제 라벤더궁 고용인들은 난제를 맞닥뜨렸다. 황태자와 결혼한 여기사 발레리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황태자비 전하. 어찌 복귀할 생각을 다 하셨는지….”

“하하, 예전처럼 불러 주실래요? 결혼했다고 직업 바뀌는 것도 아닌데 호칭은 그대로 해 주세요.”

발레리는 고용인들을 만나자마자 호칭을 얼른 정리했다. 테렌스와 결혼했다는 이유 하나로 경칭을 듣긴 싫었다.

“야, 발레리 경! 귀한 따님은 유모한테 맡기고 온 거야? 황태자 마누라가 애나 키우지 무슨 일을 한다고 출근을 했냐.”

얄미운 선배 그레이 경이 또 시비를 걸어왔지만 그마저도 그녀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결혼과 출산 여부와 상관없이, 이렇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발레리는 마음 깊이 감사했다. 황제 부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궁 기사로서 복귀하는 데 힘써 준 남편 테렌스에게.

테렌스는 기사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발레리를 굳게 지지해 주었다.

—넌 검을 잡을 때 가장 너다우니까. 아이 돌볼 사람은 많으니 걱정하지 마.

아이 돌볼 사람이 정말 많긴 했다. 황후도 아이를 직접 보겠다고 나섰고, 프리다 또한 첼리나를 제 새끼처럼 예뻐했다. 황궁에 상주하는 유모가 있는데도 말이다.

그동안 딸이 귀했던 황실이니 다들 예뻐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운이 좋게도 발레리는 근무 중에도 첼리나와 함께할 수 있었다. 프리다가 일정이 없을 때는 본인이 육아를 담당하겠다고 선언하면서다. 발레리는 시누이와 딸의 호위를 서면서 둘의 정다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봤고, 첼리나가 엄마를 찾을 때마다 젖을 먹이고 품에 안아 재웠다.

하녀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일도 그대로 이어갔다. 오랜 친구인 켄드릭과 함께.

그러다 보니 라벤더궁 앞뜰엔 또다시 쨍한 여름이 찾아와 있었다.

발레리가 테렌스와 결혼한 이후, 기사단에 입단하겠다는 귀족 여인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었다. 전국 각지의 검술 도장에는 검의 길을 걷겠다는 여자아이들로 넘쳐났다.

황녀를 구한 용감한 여기사가 황태자를 차지했다는 동화에 매료된 이들이었다.

일각에서는 여군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황제는 관련 주장을 담은 신문 사설을 읽으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정말 여자 병사나 여자 기사들을 공개 모집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며느리가 하는 걸 보면 여자라고 해서 못할 일도 전혀 아닌데 말이야.”

“안 그래도 발레리가 하녀들을 상대로 검술을 가르치고 있더라고요. 여성 검사들의 교육사업을 맡겨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래. 이따 같이 손녀 보러 가서 이야기해 봐야겠어.”

기사로 복귀한 발레리는 일과 육아에 모두 충실하며 황제 부부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

다신 아이를 안 낳겠다고 그리 공언했건만.

산고의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발레리는 또 출산했다. 첼리나와 연년생인 남자아이였다.

아이는 발레리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과 테렌스의 하늘색 눈동자를 물려받았다.

이번에도 이름은 테렌스가 지었다. 그는 발레리가 임신할 즈음에 꿈에서 비취로 지어진 궁전을 봤다고 했다. 그래서 ‘제이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발레리와 테렌스는 밤마다 함께 아기를 재웠다. 마침 오늘은 제이든이 태어난 지 백 일째 되는 날이었다.

제이든은 지금 테렌스의 품에 안겨 색색 잠들어 있다. 딸 첼리나를 키워본 경험으로 그는 이제 오른손이 닿지 않게 아기를 잘 안았다.

양손으로 아이를 안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오겠지.

그는 잠든 아이를 조심조심 요람에 눕혔다. 그리고 옆에 선 발레리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부부는 아기의 통통한 손가락이 꼼지락대는 걸 흐뭇하게 내려다봤다.

“발레리.”

“네.”

“넌 내가 황태자가 아니었어도 사랑했을 건가?”

“갑자기 뭔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내가 음… 루카스 메이필드처럼 평범한 남자였다면.”

지금 루카스는 테렌스의 밑에서 정보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성 편력은 여전했다. 일이 적성인 것 같은 게, 위장용 장교 신분을 부여받자마자 사교계 귀부인들을 꼬드겨 수많은 고급 정보를 얻어왔다.

“걔가 평범하단 말은 살면서 처음 듣는데요.”

“예시가 잘못됐군.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남자였다면 말이다.”

발레리는 상상의 나래를 열심히 펼쳐봤다. 평민인 테렌스의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워낙 분위기가 귀족적이어서 그런 걸까.

“글쎄요, 그럼 우리가 만날 일이 있었을까요?”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테렌스는 기대하는 답이 있는 것 같았다. 가끔 그는 답이 정해진 질문을 하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듣고 싶은 말 해 줄게요. 꼬셨으면 아마 넘어갔을걸요? 그 얼굴에 그 몸에 그 거시기면 어떤 여자가 안 넘어가요.”

“그래. 신분을 제하고도 내 껍데기는 꽤 볼 만하긴 하지.”

자기 자랑을 너무 담담하게 하니 조금 우스웠다. 발레리는 피식 웃으면서 자는 제이든의 뺨을 꾹 눌렀다. 어쩜 이렇게 살이 말랑할까. 내가 낳은 아기지만 너무 귀엽다.

“하지 마. 아기 깨면 다시 재우기 힘들다.”

“알았어요.”

발레리는 아쉬워하며 아기에게서 손을 뗐다.

아기의 방에 유모가 들어오자,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침실로 향했다.

둘만의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테렌스는 그녀에게 열정적으로 입을 맞췄다. 부부가 된 지도 2년이 다 돼 가건만, 갓 연인이 됐을 때와 달라진 점이 전혀 없었다.

발레리는 그와 이마를 맞댄 채 속삭이듯 이렇게 물었다.

“그거 알아요?”

“글쎄, 말해야 알지.”

“나 입대하기 전까지 황태자 이름도 몰랐던 거.”

“…황실에 정말 무관심하긴 했군.”

“근데 사실 지금도 황태자한테는 관심 없어요.”

“부인,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건가?”

장난이란 걸 알면서도 테렌스는 입꼬리를 뒤틀었다. 발레리는 쿡쿡 웃으며 코끝을 그에게 문질렀다.

“삐지지 말아요. 테렌스라는 남자 자체가 좋다는 말이니까. 황태자가 아니라 나라 팔아먹을 도적이었어도 사랑했을 거야.”

“흠. 그 말은 침대에서 증명해 봐.”

“접수.”

발레리는 테렌스를 침대 위에 밀어 눕혔다. 곧이어 두 사람의 체온이 한데 뒤섞였다.

여전히 그들의 밤은 낮보다 뜨거웠다.

/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외전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