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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72)화 (172/173)

외전 19화

“왜 부담이 아니겠어요. 테렌스가 그 자리를 얼마나 굳건히 지켜왔는지 알고 있는데. 늙은 여우처럼 능글맞은 관리들이, 나처럼 사랑만 받고 자란 응석받이를 황태녀로 인정이나 해 줄까요. 아마 내가 황태녀가 돼도 이 나라 실세는 오빠일 거예요. 오빠는 어릴 때부터 황제가 되기 위해 키워진 사람이고, 아버지의 준비된 후계자였으니까.”

한숨 섞인 푸념과 함께 프리다의 어깨가 축 처졌다.

프리다는 쌍둥이 오라비를 남모르게 시샘했다. 테렌스는 어릴 때부터 총기가 남달랐다. 같은 날 태어나 같은 스승 밑에서 배웠는데도 글을 일 년이나 먼저 깨쳤다. 다른 과목은 말할 것도 없었고.

몸도 훨씬 건강했고 발육도 좋았다. 지금도 키는 그의 어깨높이밖에 안 된다. 어릴 땐 본인이 클 키를 테렌스에게 빼앗긴 것 같아서 억울했다. 황실 예법이 뭐라고, 고작 몇 시간 일찍 태어난 그에게 꼬박꼬박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 것도 짜증 났다.

‘오빠는 나보다 사랑은 덜 받았을지 몰라도…… 모두의 인정과 기대를 받았지.’

프리다는 황제 부부와 백성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사랑받는 일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다. 다만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불편했다. 부모는 언제나 그녀를 과보호했다. 석실에 갇혀 있을 때, 발레리를 만나기 전까진 무력감이 너무 심했다. 술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어쩌면 자신은 온실 속의 화초, 혹은 모두의 애착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프리다가 무슨 말을 하면 사람들은 사랑스러워하며 우쭈쭈하기 바빴다. 반면 테렌스가 말을 하면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내용을 경청했다. 가끔은 그 온도 차가 싫었다.

프리다는 본인에게 없고 테렌스에게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 대쪽 같은 성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실리는 무게감. 과중한 업무에도 거뜬한 체력. 나이 든 대신들과의 기 싸움에서 지지 않는 전투력. 국정 전반을 책임지고 돌보면서 쌓아온 권위.

그리고 발레리.

테렌스는 발레리의 사랑을 얻었고, 그녀의 남자가 됐다. 이대로 쭉 간다면 그는 발레리의 반려가 되겠지.

뭐가 어떻게 됐든 지금은 행복하다. 프리다는 발레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벅찼다. 늘 원하던 것처럼 평생 발레리의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술친구 켄드릭과 마찬가지로.

“황태자 전하가 했던 일이면 황녀님께서도 충분히 잘하실 겁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으신다면, 후계는 어찌 되는 겁니까?”

켄드릭이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뒤 조심스레 물었다.

“그 부분에선 오빠랑 협의를 했어요. 오빠의 아이에게 황위를 물려주기로요.”

“그렇다면…….”

“맞아요. 발레리가 첫 아이를 낳는다면 내 양자 또는 양녀로 들일 거예요.”

***

발레리는 테렌스의 에스코트에 따라 중앙궁 만찬장을 찾았다.

드디어 오늘, 황제 부부와 저녁식사를 하는 날이다. 공개 교제한 지는 이제 두 달이 되어 가는 참이다. 이 자리에서 둘은 결혼 의사를 통보할 예정이었다. 허락이 떨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발레리아나 경.”

맞은편에 앉은 황제는 본인이 지어 준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네, 폐하.”

“사교계에서 경의 명성이 자자한 모양이야. 유행까지 주도한다지. 기사 제복을 흉내 낸 바지 여성복이 불티나게 팔린다더군.”

“아, 그렇습니까.”

프리다에게 듣긴 했었다. 요즘 귀족 아가씨들이 기사 제복 같은 정복을 입으려 한다고.

“그야 이 나라 황태자가 제복 입은 여기사에게 반해서 사족을 못 쓴다는 소문이 나니 그런 모양이지만.”

황제가 테렌스를 무심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발레리는 황제의 속내를 읽으려고 노력했으나, 무슨 생각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의 곁에 앉은 황후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발레리아나 양은 드레스 차림도 예쁘지만, 정말 제복이 잘 어울려요.”

마침 발레리는 드레스가 아닌 기사 제복을 입고 와 있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대화가 자꾸 겉돌았다. 곁에 있는 테렌스는 식사도 하는 듯 마는 듯했고, 말도 한마디 하지 않았다. 긴장한 탓이겠지.

이제 본론을 꺼내려는지 그의 목울대가 꿀렁 움직였다.

“아버지, 어머니.”

“그래. 오랜만에 정답게 아버지라고 불러 주니 좋구나.”

“이제 그만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희 둘 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고, 나이도 찼습니다.”

“후우, 만찬에 이 아가씨를 초대해 달라고 할 때부터 내 이럴 줄 알았다.”

황제는 기어이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둘은 공공연한 연인 사이였고 결혼설까지 나돌았다. 황제 부부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니 다들 기정사실처럼 생각했다.

“국혼까지 필요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황태자가 아닌 켄트웰 공작으로서 발레리와 결혼하려 합니다. 발레리도 황태자비 자리를 원하는 게 아니라서 동의했고 말입니다.”

“흠. 나름의 절충안이긴 하구나. 황후와 논의해 보마.”

“그래, 테렌스. 좀 시간을 두고 결정해야 할 것 같아. 우리야 너희들이 오래 만난 걸 알지만, 밖에서 보면 네가 분별없이 결혼을 서두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

황후가 결정을 보류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래도 결혼을 반대하는 것까진 아니라는 데서 테렌스는 안도했다. 사교계에서 발레리에 대한 여론이 긍정적으로 형성된 게 황제 부부에게도 영향을 미친 듯했다.

“알겠습니다.”

테렌스는 옅게 미소하며 대답했다. 그제야 그는 수프를 떠 먹기 시작했다.

발레리도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거 배나 채워야지, 하고 눈앞에 놓인 고기를 쭉쭉 썰었다.

고기의 잘린 단면에서 검붉은 육즙이 흘러나와 흰 접시를 물들였다.

잘린 고기를 푹 찍어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 속 깊은 곳에서 이유 모를 욕지기가 치밀었다.

“우욱.”

그녀는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왜 그러지?”

테렌스가 후다닥 숟가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아윽. 죄송해요. 방금까지도 배가 고팠는데 갑자기 왜 이러지.”

발레리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바라보던 황제와 황후는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황제는 얼른 테이블 위의 종을 울렸다. 식당 밖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애덤, 고든을 불러와.”

“네, 알겠습니다.”

곧이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자주색 망토 차림의 마법사가 들어와 인사를 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고든은 중앙궁에 상주하는 치유 마법사였다.

“이 아가씨가 속이 좀 불편한 모양인데. 진찰을 좀 해 보겠어?”

황제의 요구에 고든은 망토 안에서 짧은 지팡이를 꺼내 발레리의 이마 위에 가져다 댔다.

“체온이 좀 높으시긴 한데. 어디가 불편하실까요, 아가씨?”

“아, 그…. 고기 먹다가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요.”

“구역질? 체한 겁니까?”

“아뇨, 그렇다기엔 먹은 양이 얼마 안 되는데요.”

고든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더니 발레리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 저…. 마지막 달거리를 언제 하셨는지요.”

아.

달거리.

이번 달에 했었나?

발레리는 얼른 기억을 되감았다. 마지막으로 아래에서 피를 본 날이….

잘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한 달은 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니 아마 두 달이 다 되는 것 같은……. 관계를 매일같이 하면서도 날짜를 점검하는 걸 까먹었다. 저번 주였나, 테렌스가 관계 도중 생리할 때가 되지 않았냐고 묻긴 했다. 잠결이라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 저, 괜찮으시다면 아랫배를 좀 제가 봐도 될지.”

그 와중에 고든이 진땀을 흘리며 진찰 허락을 구했다.

“아, 예. 그러시죠.”

발레리는 재킷 단추를 끌러내고 안에 입은 셔츠 자락을 걷었다. 바지 버클의 윗부분도 풀었다. 황제는 민망한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황후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의 냅킨을 꽉 틀어쥐었다.

테렌스는 어쩐지 아까보다 더 긴장한 듯했다. 그의 반듯한 이마를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발레리의 아랫배에 손을 가져다 댄 고든은 한참 마력을 불어넣었다. 왠지 차가운 촉감이 들어서 발레리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임신하셨습니다. 구역질을 하신 건 아마 입덧일 겁니다.”

고든은 활짝 웃으며 통보했다.

“어, 얼마나 됐는데요?”

발레리는 겁에 질린 채 물었다. 제발 얼마 안 된 거였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왜냐면 지난 몇 달간 매일같이 격한 정사를 했기 때문에….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두 달은 되신 것 같습니다.”

“으악, 어떡해.”

그녀는 시뻘게진 얼굴을 가리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 증상이 없으니 임신한 줄도 모르고 짐승처럼 해댔다. 태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갔을 수 있었다.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말을 꺼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예비 시부모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아이의 상태는 어떻지?”

테렌스가 고든에게 물었다. 발레리가 왜 당황해하는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건강합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 아가씨가 워낙 건강 체질이라.”

“그래, 알았으니 그만 물러가 봐, 고든.”

황제는 얼른 고든을 밖으로 물렸다. 마법사 고든도 발레리가 테렌스와 어떤 사이인지 당연히 알고 있을 터. 발레리의 임신설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다.

“발레리아나 경, 아무래도 배부르기 전에 식을 올리는 게 좋겠네.”

때아닌 손주 소식에 황제는 흥분해서 상기된 표정이었다.

“여보, 우리 드디어 손주 보는 거예요? 아흑, 어쩜 좋아.”

황후는 기대 가득한 얼굴로 황제의 손을 꽉 잡았다.

발레리는 머쓱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기야 고마워. 그 난리 통에도 건강하게 버텨 줘서. 못된 엄마가 네가 있는 줄 모르고 네 아빠랑 짐승처럼……. 아흑, 미안해.’

곧이어 황제는 테렌스와 발레리의 결혼예정일을 공표했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50여일 뒤였다.

관료 사회도 발칵 뒤집혔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황태자가 평민 출신 여기사와 결혼한다니.

그나마 관리들은 발레리가 황태자비가 아니라 공작부인에 봉해진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듯했다.

“전하, 그럼 황태자비 자리는 공석 아닙니까? 공작부인은 정부라고 보면 되겠지요?”

“아닙니다. 발레리아나 경은 내 인생의 유일무이한 배우자입니다. 따로 황태자비를 들일 생각은 없으니 그리 알아 두었으면 합니다.”

“그럼 그 여기사가 낳은 아이로 후계를 이으실 겁니까? 황손이라고 해도 공식 신분은 공자나 공녀일 텐데요.”

“그리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당장 그러진 않겠지만, 프리다의 양자로 들이면 황위 계승서열이 부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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