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화
발레리에게 무도회는 이번이 두 번째였다. 작년 9월 가면무도회 때와는 감회가 달랐다. 그 당시엔 볼드윈 공작 외에는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그녀를 알고, 또 주목하고 있다.
그녀의 첫 춤 상대는 프리다였다.
여자끼리 추는 춤이었지만 그림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겉보기엔 제복을 입은 기사와 풍성한 연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황녀였으니 말이다.
첫 춤을 마치고 발레리는 두리번거리며 테렌스를 찾았다. 연회 때 가까운 자리에서 식사하던 그는 지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흠, 손이 불편하니 아직 춤추는 건 좀 꺼려지겠지.’
사람을 구경하다 보니 저 멀리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결 고운 갈색 생머리를 높이 틀어 올린 여자.
에이바 볼드윈 공녀. 아니, 지금은 에이바 다미엔 변경백이었다.
에이바는 어머니인 공작부인의 미들네임을 새로운 성으로 삼았다. 볼드윈 가는 사라졌고, 그녀는 다미엔 가의 첫 가주가 되었다.
볼드윈 공작의 불명예스러운 최후 때문일까. 아직 그녀는 귀족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첫 춤조차 추지 못하고 구석에서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었으니.
발레리는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공녀님. 아니, 다미엔 가의 에이바 님.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깍듯이 춤을 신청하는 발레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에이바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와아, 너 제복 진짜 잘 어울린다. 흑발이기까지 하니까 딱 내 취향인데.”
둘은 사이좋게 미뉴에트를 추었다.
곡이 끝나고 마무리 인사까지 마치니 곁에 기다리던 사람이 와 있었다.
테렌스였다. 칼라를 빳빳하게 올려세운 군청색 예복 차림이었다. 절개선과 소매 끝부분을 따라 은사로 화려하게 수까지 놓여 있다. 너무 눈에 띄는 행색이었다. 천장의 샹들리에 불빛이 그의 백금발 위에 찬란하게 부서졌다.
에이바는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살피며 눈치껏 빠져 주었다.
“발레리아나 모건 경.”
테렌스는 발레리를 처음 보는 것처럼 인사했다. 발레리는 기사의 예를 갖추어 그에게 경례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이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각본대로 하는 행동이었다. 둘은 오늘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질 예정이니까.
“내 여동생을 구해주어서 고맙소. 춤을 신청해도 되겠소?”
테렌스는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왼손 중지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 자리엔 호수에서 돌려받은 엘로이스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물론입니다.”
이번 곡은 서로에게 밀착할 수 있는 왈츠였다. 발레리는 테렌스의 오른손을 잡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와 동작을 맞추었다.
황태자가 드레스조차 입지 않은 여기사와 춤추는 장면은 호사가들의 이목을 마구 끌어당겼다.
테렌스는 발레리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곡이 끝나면 저쪽 테라스로 나가는 거야. 잊지 않았지? 오늘 넌 나를 사로잡은 첫 여자가 되는 거다.”
황태자는 여동생의 호위 기사에게 한눈에 반해서, 그녀를 침실로 들여 하룻밤을 보낼 계획이었다. 오늘부로 둘은 공공연한 연인 사이가 되는 것이다.
솔직히 너무 짜고 치는 장난 같아서 발레리는 웃음이 났다. 어제도 침대가 부서지도록 서로를 안았는데, 공식적으로는 오늘이 첫날밤이라니.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테라스로 향했다. 문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쉽게 엿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 왜 이렇게 떨리죠? 꼭 사람들 보는 앞에서 키스해야 해요?”
“오랜만에 부끄러워하는 게 너무 귀여운데.”
테렌스는 왼팔로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고 입술을 포갰다. 명색이 ‘공식적인’ 첫 키스인데 이렇게 당하듯이 하게 될 줄이야. 발레리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에 응했다. 하다 보니 입맞춤은 침대 위에서처럼 진하게 흘러갔다. 둘은 서로의 혀뿌리를 뽑아낼 기세로 집요하게 입안을 탐했다.
그 시각 프리다는 그들이 있는 테라스 쪽으로 귀족 여성들을 유인했다. 밤바람을 쐬면서 담소를 나누자는 핑계로.
끼익, 하고 문이 열리자마자 프리다는 화들짝 놀라는 척을 했다.
“어머나! 이게 무슨!”
프리다를 따라 나온 귀족 아가씨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태자와 황녀의 호위기사가 서로의 입술을 잡아먹을 듯이 난잡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각본대로 상황은 잘 흘러가고 있었다. 발레리와 테렌스는 당황한 척을 하며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두 사람은 당황해서 굳어 있는 귀족 아가씨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함께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둘은 하인들이 이끄는 마차를 타고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주인을 맞이하러 나온 황태자궁 시녀들은 테렌스가 여자를 데려왔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눈치였다. 그중 하나는 발레리의 목욕 시중을 들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발레리는 거부했다. 온몸에 테렌스가 남긴 흔적이 낭자했기 때문이다.
둘은 그대로 침실로 올라가 사랑을 나눴다.
정말 처음인 것처럼.
***
황태자를 사로잡은 영웅 여기사.
며칠 뒤 칼레반 타임스 1면에 대문짝만 하게 실린 머리기사 제목이었다. 삽화까지 있었다. 금발의 황태자가 웬 흑발 기사와 춤추는 모습을 그럴듯하게 그려놨다.
발레리가 황태자의 첫 여자가 됐다는 소문은 황태자궁과 라벤더궁 고용인들의 입을 통해 일파만파 퍼졌다. 무도회 이후 테렌스는 꼭 발레리의 침실이 있는 라벤더궁에 와서 잠을 청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열애설이 가지를 쳐서 크게 부풀려질 때쯤 황제는 그녀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칼레반 타임스에 또다른 기사가 났다.
황태자의 여자 발레리아나 모건이 기사 작위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초상화는 실물과 조금 다르게 그려졌다. 얼굴을 그려주는 화가 앞에서 발레리는 긴 머리 가발도 썼고, 화장도 짙게 했다. 그녀가 도적이었던 시절 지인들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할 목적에서였다.
발레리의 양부인 필리스 모건은 고뇌에 빠졌다. 수양딸이 황태자와 교제한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결혼설까지 돌았다. 발레리가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다니는 게 사람들의 눈에 띄면서다.
자초지종을 알아야만 했다. 필리스는 루카스를 대동하고 라벤더궁에 찾아와 발레리를 추궁했다.
“발레리.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황태자 전하에 관한 소문이 정말로 사실인 거냐?”
“공주님, 진짜 테리 형씨하고 결혼해?”
루카스도 옆에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는 아직도 테렌스를 ‘테리 형씨’라고 칭했다.
마력석 밀수 사건 제보 당시 발레리가 데리고 나온 관리가 사실은 황태자였던 걸 알고 충격을 받은 참이었다.
“엉? 벌써 결혼설까지 돌아? 결혼하기로 한 건 맞는데.”
“말도 안 돼. 내가 황제 폐하와 사돈이 되는 건가. 아니지, 폐하께서 나 같은 중죄인과 사돈을 맺으실 리 없지….”
필리스는 빡빡 깎인 민머리를 손톱으로 박박 긁어댔다. 붉은 자국이 꽤 진하게 남을 정도로.
“하하,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곧 허락받으러 갈 예정이에요.”
발레리가 당당한 태도로 나오자 루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뼉을 쳤다.
“와, 그 형씨가 너 좋아하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진지할 줄이야. 두목, 얘 길거리에서 주워 온 건 정말 횡재였네요.”
“…….”
필리스는 눈앞이 어질거렸다.
10여년 전 거리에서 주워다 기른 수양딸이 황태자를 사위로 데려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
“저는 황태자 전하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켄드릭이 프리다 앞에 놓인 은잔에 사과주를 채우며 투덜거렸다.
“와, 켄드릭 경은 역시 나랑 통하는 게 많아. 테렌스 그 인간 진짜 재수 없죠.”
프리다는 반쯤 풀린 눈을 느릿느릿 깜빡이며 오라비의 흉을 봤다. 봉긋이 솟은 두 뺨이 취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활짝 열려 있는 라벤더궁 응접실 창문 안으로, 어둑어둑 저무는 노을빛이 들어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님. 저는 발레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차갑고 오만하고 콧대 높은 작자가 어디가 좋다고…… 역시 신분이 높은 게 장땡일까요?”
“에이, 발레리는 신분으로 사람 가리는 성격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오빠, 5년 뒤에 황태자 자리 나한테 넘기기로 했어요. 이 나라 이인자 자리에서 완전히 내려온다고요.”
주르륵.
켄드릭이 방금 입에 머금었던 사과주가 그대로 흘러 잔 속으로 떨어졌다.
“크흡,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황위를 포기하신다는 겁니까?”
“그래야 오른손이 낫는다는 신탁이 내려왔어요. 보검의 주인한테 계승권을 넘겨야지만 나을 수 있는 상처라고 하더라고요.”
“오른손…? 황태자 전하께서 오른손이 불편하셨습니까?”
“앗, 술김에 폭로해 버렸네. 난 역시 술 마시면 안 되나 봐….”
프리다는 제 머리를 주먹으로 콩 때리며 배시시 웃었다.
“황녀님. 저 지금 술 다 깼습니다. 지금 농담하신 거죠? 어떻게 그렇게 된 겁니까?”
“아아, 재작년에 오빠가 날 대신해 마왕을 물리친답시고 엘로이스의 보검을 잡았거든요. 보검의 주인이 아니어서 오른손에 영구 화상을 입었고요. 그래서 식사할 때 왼손만 쓰고, 평소에는 장갑 끼고 다니잖아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럼 오른손을 고치시려고 계승권을 황녀님께 넘기는 겁니까?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도 동의하신 거고요?”
“응, 테렌스가 그러겠다고 하니 두 분 다 동의했어요. 남은 5년 동안은 천천히 인수인계 받기로 했고요. 공식 발표는 아마 2년쯤 있다가 할 것 같아요. 이거 완전 비밀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요!”
프리다가 코 옆에 검지를 붙이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린아이 같아서 켄드릭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는 황녀 전하께 줄 서겠습니다. 황태녀가 되셔도 절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래요. 우리끼리 독신 동맹 만들어서 발레리랑 테렌스보다 더 행복하게 살자고요.”
“도, 독신이라뇨. 황녀님. 결혼은 안 하실 생각입니까?”
“켄드릭, 나 이미 한 번 갔다 온 거 잊었어요? 내 결혼식 예도까지 섰으면서 까먹으면 안 되지. 난 이제 결혼에는 흥미 없어요. 앞으로 오빠 따라서 공식 석상 끌려다니다 보면 바빠질 것 같기도 하고. 남자 만날 시간도 없을걸요.”
프리다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어느덧 해가 다 져 있었다. 응접실 테이블에 놓인 촛대 불빛이 바람결에 흐늘거렸다. 프리다를 보는 켄드릭의 눈빛이 걱정으로 그늘졌다.
“황태녀 자리…… 부담스럽지 않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