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7화
아기……?
테렌스는 아무런 동작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살짝 정신이 나간 듯도 보였다. 잘게 떨리던 입술이 벌어진 건 수 초가 지난 뒤였다.
“정말, 정말 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나?”
“정확히 말하자면, 내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어요. 황궁 기사 월봉 받아 보니까, 애 하나쯤은 내가 책임지고 먹여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왜 아이를 혼자 키울 것처럼 말하지? 나를 못 믿는 건가?”
“둘 다 책임질 수 있으니까 만들자고 하는 거죠.”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한참 동안 불꽃 튀는 사랑을 나눴다. 넓지 않은 공간에 덥고 습윤한 공기가 들어찼다. 발레리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극치감을 누르며 옆에 있는 유리창을 짚었다. 이윽고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면서 배 속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테렌스는 얼른 연인의 입술을 찾아 여린 점막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가늘게 전율하는 발레리의 몸을 더 깊이 끌어안으며.
마무리 키스가 끝나고 둘은 이마를 마주 댔다. 아직 둘은 하나였다.
“기분 탓일까요? 약 안 먹고 하니까 더 야해요.”
“…네 침실로 가자. 여기는 도무지 마음이 안 놓여.”
발레리는 테렌스의 손에 이끌려 파빌리온을 나왔다. 라벤더궁으로 향하는 내내 그가 남긴 흔적이 줄줄 흘러내렸다.
***
두 사람은 시차를 두고 라벤더궁에 들어갔다. 근위병들은 테렌스가 왜 야밤에 여동생을 찾아왔는지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깍듯이 경례하며 그를 들여보냈다.
황태자가 찾은 건 여동생이 아니라 호위기사의 침실인 것도 모르고.
문이 닫히자마자 발레리는 테렌스의 옷을 양파 벗기듯 벗겨냈다. 이미 본인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 위에 올라 엎드린 채 뒤를 돌아봤다.
“바로 시작해요.”
“분부대로.”
사랑을 나누는 목적이 하나가 더 생기자 테렌스는 평소처럼 서너 번으로 끝내지 않았다.
체력이라면 내로라하는 발레리조차 길고 긴 관계에 지쳐 잠들 정도였다.
새벽이 다 끝나갈 때쯤, 그녀는 어딘가가 빠듯하게 벌어지는 느낌에 움찔대며 눈을 떴다.
“으음? 뭐 해요?”
“깬 거 아니었나?”
테렌스의 얼굴이 코앞에 와 있었다. 그는 발레리를 팔꿈치 안에 가둔 채 체중을 실어 온몸을 밀착한 상태였다. 발레리는 기가 찼지만 못 이기는 척 그를 받아들였다. 기분 좋은 충만감과 그의 따스한 체온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아, 발레리.”
몇 번째인지 모를 일이 또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테렌스가 이름을 부르며 키스를 시도하자 발레리는 입술이 닿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아윽, 진짜 짐승 같아. 나 자는데 덮치려고 한 거죠?”
“아니. 난 네가 눈뜬 걸 확인했는데.”
“눈 떴다고 깬 거 아니거든요? 앞으로는 의식 있는지 확인하고 해요. 혼자 좋지 말고 같이 좋자고요.”
그녀의 볼멘소리가 끝나자마자 새벽빛이 소리 없이 창을 투과했다. 재잘거리는 새 소리까지 들린다.
해 뜰 녘까지 이 짓을 하다니. 발레리는 새삼 그의 정력에 감탄했다.
“결혼 약속하니까 아주 폭발하시네요. 무슨 약이라도 먹은 줄 알겠어.”
“좀 줄일까? 네가 힘들다면.”
“그런 말은 아니고요. 생기면 한동안 못 할 테니 열심히 해 두자고요.”
발레리는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동시에 테렌스의 신체가 반응하는 걸 목격했다.
“…와. 어쩜 볼 뽀뽀만 해도 흥분해요?”
“네 눈빛만 봐도 이렇게 되는걸.”
농담을 하는가 했는데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발레리는 그의 중요 부위를 못 본 체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오늘은 더 못 해요. 하인들 출근하기 전에 빨리 옷 입어요.”
“입혀줘. 이제 좀 지치는 것 같아.”
테렌스는 전혀 지치지 않은 기색으로 엄살을 떨었다.
“어휴, 그렇게 해댔는데 안 지치고 배겨요?”
발레리는 바닥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테렌스의 옷을 주섬주섬 집어 들어 그에게 다시 입혀 주었다.
***
결혼 약속 이후 발레리는 부쩍 바빠졌다. 일과 후 예절 수업을 듣게 됐다. 테렌스가 황태자궁 시종장인 바르딘 자작을 예법 선생으로 붙여주었기 때문이다.
기사로서 사교계에 데뷔하려면 귀족 여성을 대할 때 엄격한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이유를 들면서.
“그래, 오늘은 뭘 배웠지?”
테렌스는 밀회 때마다 그녀에게 수업 후기를 요구했다.
“음, 여자한테 춤 신청하는 법, 손등에 키스하는 법, 마차에서 타고 내릴 때 도와주는 법…. 찻잔 내려놓는 법이랑 편지 쓰는 법도 배웠어요.”
“자작 말로는 네가 꽤 잘 따라온다고 하던데.”
“말투만 고치면 된대요. 너무 틱틱 쏘듯이 말하지 말라고. 수업은 재밌고 좋아요. 그냥 여자분들한테 깍듯이 잘해 주기만 하면 되던데요.”
발레리는 남자들의 예법을 배우는 게 훨씬 적성에 맞았다. 작년 가을 무도회를 앞두고 프리다에게 예절을 배우던 때보다 한결 나았다. 책을 머리 위에 얹고 사뿐사뿐 걷는 연습, 음식을 느릿느릿 깨작대는 연습…. 그런 걸 안 해도 된다니 어디인가.
수업을 한 달 정도 받으니 발레리는 제법 몸가짐과 어투가 점잖아졌다. 테렌스의 앞에선 평소처럼 맹랑하게 까불어댔지만.
발레리를 사교계에 정식으로 소개한다는 계획에는 프리다도 합세했다.
프리다는 때맞춰 라벤더궁 정원에서 다과회를 열고 발레리를 대동한 채 등장했다. 발레리는 몸에 꼭 맞도록 새로 맞춘 제복을 입고 황녀를 뒤따랐다.
발레리를 처음 보는 귀족 아가씨들은 부채를 살살 부치며 그녀를 흥미롭게 주시했다. 첫인상만 보면 예쁘장하면서도 날렵하게 잘생긴, 몸까지 좋은 남자니까.
“어머, 황녀 전하. 처음 보는 호위기사네요?”
“잘 지냈어요? 내가 총애하는 기사인데 이참에 인사시키려고 데려왔어요.”
프리다가 손짓으로 신호하자 발레리는 얼른 눈앞의 여성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레이디를 뵙습니다. 황녀 전하의 호위기사 발레리아나 모건입니다.”
“어머나, 이름이 특이하네. 여자분인가요?”
발레리는 프리다와 함께 여러 테이블을 순회하며 귀족 여성들에게 본인을 소개했다.
시나리오는 준비돼 있었다.
모건이라는 남부 지역 상인의 외동딸이다. 군인이 되고 싶어서 남장하고 위장 입대했다가 발각됐다. 가까스로 처벌을 면한 이후 빼어난 실력이 눈에 띄어 황녀의 검술 스승으로 발탁됐다.
테렌스와 프리다가 머리를 맞대고 짜낸 이야기였다. 좀 허술하지 않나 싶었지만 아가씨들은 발레리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었다.
여자가 신분을 숨기면서까지 검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굳이 비위를 맞춰 주지 않아도 귀족 아가씨들은 발레리에게 호의적이었다. 제국 최고의 인기인인 황녀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니면 꽃미남 같은 외모가 먹혀들었는지도 모른다.
“저기, 발레리아나 경. 근위병으로 입대했을 때, 정말 아무도 여자인걸 못 알아봤나요?”
귀족 아가씨 한 명이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 냇가에서 목욕하다 걸리기 전까진 아무도 몰랐습니다. 보시다시피 제 몸매가 좀 중성적인 터라, 잠결에 윗옷이 말려 올라가도 아무도 여자인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아하하하, 하긴, 나도 아까 들어올 땐 남자인 줄 알았어요.”
발레리가 무슨 말을 해도 귀족 여성들은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녀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는 아가씨도 있었다.
“흐음,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아마 황성에 잠시 나붙었던 현상 수배 벽보를 기억하는 듯했다.
프리다는 이제 발레리의 활약을 소문낼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루아나 양, 내가 와이어 숲에서 실종자들을 구하고 돌아온 거, 기사 봐서 알고 있죠?”
“네, 그럼요! 너무 멋있으세요. 황녀 전하께서 여행을 가신다고 했던 게, 목적지가 와이어 숲일 줄은 정말 몰랐다니까요.”
“내가 마왕비가 돼서 지하세계에 한동안 갇혀 있었던 것도 알고 있을 거고요.”
황녀가 와이어 숲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실종자들을 구해 왔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여러 차례 기사화됐다. 10년 만에 잠에서 깨어나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숲이 지하세계와 통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라를 뒤흔들 만큼 큰 충격이었다. 외국으로 여행을 간다던 황녀가 자진해서 마왕의 비가 됐다는 사실도 파장이 컸다.
얼마 후 황녀가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왔다는 기사가 나왔을 땐 온 백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요, 황녀 전하. 하지만 마왕의 목을 치고 당당히 복귀하셨잖아요.”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영영 못 돌아올 뻔했는데, 황궁 병사였던 발레리아나 경이 와이어 숲까지 찾아와서 날 구해 주고, 같이 싸워 주었어요. 그 기간에 탈영한 걸로 오해가 돼서 잠시 현상 수배 벽보가 붙었어요. 황궁에 복귀하고 나서 곧바로 떨어졌지만.”
“어머, 혼자 돌아오신 게 아니었다고요?”
“네. 발레리아나 경이 원치 않아서 아직 공개되진 않았어요. 곧 날 구한 공으로 작위가 내려질 예정이에요.”
프리다의 조곤조곤한 설명을 들으며 발레리는 씁쓸하게 웃었다. 소리 소문 없이 실종된 사형수가 영웅심 투철한 탈영병으로 포장되기까지는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꺼리는 그녀에게 죄책감이 엄습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테렌스와의 결혼과는 상관없이 이젠 정말 과거를 버리고 새 삶을 살아야 했으므로.
발레리아나 모건은 이제 그녀의 진짜 신분이니까.
“경의 용기가 정말 가상하네요. 황녀 전하를 구하려고 그 위험한 숲에 가볼 생각을 하다니. 황궁 기사로 발탁될 만해요.”
“하하하, 별말씀을요. 전 그저 황녀 전하의 사람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발레리는 복잡한 속내를 숨기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웬만한 귀족 영애들이 그녀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으니, 이제 소문이 퍼질 때만 기다리면 된다.
***
곧이어 프리다의 복귀를 기념하는 황궁 연회가 개최됐다. 원래는 한참 전에 열려야 했던 행사지만, 프리다는 복귀 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한여름이 되기까지 일정을 미뤄왔다.
연회에서 단연 주목받은 사람은 황녀가 또다시 데리고 나온 발레리였다. 고작 몇 주 사이 사교계에 그녀에 관한 소문이 파다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실물을 궁금해했다.
이제 발레리는 황녀를 지하세계에서 구해 온 영웅 여기사였다.
훤칠하고 곱상한 외모가 더 이목을 끄는 듯했다.
그녀가 라벤더궁의 마법사 동료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터무니없는 소문도 함께 퍼져나갔다. 이젠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헛소문이었지만.
떠들썩한 연회의 마무리는 무도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