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6화
“흠, 예쁘다고 감탄할 줄 알았는데 반응 별로네요.”
“넌 뭘 입어도 아름다우니 굳이 말할 필요성을 못 느낀 거다.”
테렌스는 자세만큼이나 굳어있는 말투로 해명했다.
“하핫, 그건 그러네요. 근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서 있어요? 밖에서 만나니까 긴장돼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편지는 다 읽었나?”
“다 읽었으니까 여기 와 있겠죠?”
그녀는 까만 눈을 말똥거리며 테렌스의 입술을 주시했다. 애꿎은 아랫입술을 꽈악 깨무는 게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아마 본론부터 이야기하긴 힘들겠지.
발레리는 호숫가로 눈을 돌렸다. 수면 위를 따뜻이 밝히는 무수한 반딧불이들이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며 춤추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잔영이 남을 만큼 선명하고 환했다.
“……황궁 호수의 반딧불이는 정말 밝고 예뻐요.”
“이전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치던 곳이었는데, 네가 이곳의 반딧불이가 예쁘다 한 게 기억나서 와보고 싶었다. 취미가 반딧불이 잡기라고 하지 않았나?”
“와, 그거 작년 겨울쯤에 했던 말인 것 같은데 기억하네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같이 여름 호수에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야 넌 나와의 끝을 상정하고 있었으니까. 반딧불이를 잡은 건 아마 폐하의 무기고에 잠입하기 위해서였겠고.”
테렌스는 반딧불이를 잡아보려는 듯 왼손을 허공에 내밀며 그녀의 과거를 언급했다.
“한 마리가 삐져나와서 거기 남았을 줄 누가 알았나요. 난 정말 내가 뒤처리 깔끔한 천생 도적인 줄 알았는데, 그냥 허당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네가 황궁에 와서 제대로 훔쳐낸 건 내 마음밖에 없군.”
“푸하핫, 그러네요. 황녀님하고 보검은 훔치다 말았으니까.”
테렌스는 호숫가에 한 걸음 더 다가가 손을 휘저었다. 반딧불이는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한 마리가 손에 닿았지만 손가락 틈새로 날래게 빠져나갔다.
“이렇게나 많은데도 한 마리도 안 잡히는구나.”
“에이, 손으로는 잡기 힘들어요. 저도 막대 끝에 망사 주머니 걸어서 채집했는데요. 근데 여기 반딧불이 잡으러 온 거 아니죠?”
발레리가 그에게 본 목적을 상기시켰다.
테렌스는 얼른 몸을 돌려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여기 있는 반딧불이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빛나는 사람을 잡으러 왔지.”
“어우,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워요? 책 읽으면 나오나?”
발레리는 닭살이 돋는다는 듯 제 팔을 연신 쓰다듬었다. 평소처럼 너스레를 떠는 그녀를 보며 테렌스는 안도했다.
“네가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아 다행이다.”
공작과 그 잔당들이 최후를 맞이한 뒤 발레리는 왠지 모를 허탈감에 빠져있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그녀를 해칠 만한 사람이 모두 제거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도록 그녀는 웃지 않았다. 복수의 뒷맛은 그리 깔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서였을까. 아무리 원수의 죽음이라 해도 죽음은 죽음이니, 그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리 없겠지.
“하하, 제가 최근에 좀 뭐랄까… 가라앉아 있긴 했었죠.”
“사실은 피를 보기 싫었던 거였나?”
“아니에요. 공작이 죽는 건 나도 바라는 일이었어요. 그런 놈한테 자비 베풀어서 뭐 해요? 다만 그게 생각보다 너무 쉽고 빨라서 좀 놀랐던 것뿐이에요.”
발레리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고요한 호수 표면을 바라보았다. 반딧불이가 평소보다 많아 보이는 건 수표면에 모든 게 반사돼서 그런 것 같았다.
“……너에 대한 위협은 조금도 허용할 수 없었어. 혹시 내 잔혹한 면모에 실망했나?”
“그 잔혹한 걸 해달라고 한 건 저인데요. 결혼까지 조건으로 걸고서. 저의 잔혹하고 계산적인 면모에 실망했어요?”
“그럴 리가. 오히려 더 반했다. 삭막한 황궁에서 내 여인으로 있으려면 더없이 필요한 면모지.”
테렌스는 그녀의 오른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얼른 반지 끼워 줘요.”
발레리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앞에 왼손을 들이밀었다. 테렌스는 재킷 안에서 반지를 꺼내어 그녀의 약지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엘로이스의 반지. 한때 손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던 원수 같은 물건이, 다시 그녀의 손에 돌아와 있다. 고양이 눈 같은 샛노란 보석이 달빛 아래 이채를 띠었다.
“청혼 멘트도 안 했는데 반지부터 끼워 달라니. 낭만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너무 정석대로 하면 재미없잖아요.”
발레리는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따뜻한 감촉이 테렌스의 입술 위에 폭신하게 눌렸다. 얕고 부드러운, 조심스럽기까지 한 키스였지만, 어쩐지 침대 위에서보다 가슴 속이 더 요란해지는 기분이었다.
“테렌스.”
“응.”
“내 남편이 돼 줘요.”
“……기꺼이.”
그의 연푸른 눈동자가 깜빡일 때마다 얇은 수막을 덧입었다. 눈가에 조금씩 이슬이 맺혔다. 발레리는 얼른 손끝으로 그의 눈물을 쓸어 닦았다.
“아, 좋은 날 울지 말고요. 황태자비가 되는 건 전혀 안 내키고 사교계도 토 나오게 싫지만 뭐 어쩌겠어요. 이제 우린 서로의 체온 없이는 잠들지도 못하잖아요.”
“……발레리.”
테렌스는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황태자비가 되지 않고도 나와 결혼하는 방법이 있다.”
“음, 설마 황태자 자리를 버리고 자연인으로 살겠다는 건 아니겠죠? 사랑의 도피야 난 좋지만 당신 부모님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혹시…… 내가 황성 켄트웰의 공작도 겸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
“갑자기 웬 작위 자랑이에요?”
발레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편지 속 그의 서명에 ‘켄트웰’이 들어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게 공작위를 뜻하는 거였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칼레바니아 황태자로서가 아니라, 켄트웰의 공작으로서 널 부인으로 맞이할 수도 있다. 그편이 네겐 더 나을 수 있어. 공작의 결혼은 국혼이 아니니 식도 훨씬 조촐하게 할 수 있을 거다. 황태자비가 아니니 외교 석상에 동행하지 않아도 되고, 황태자궁 안살림을 맡지 않아도 되고.”
솔깃한 말이었다. 발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을 모았다.
“오, 정말 그게 가능해요? 공작부인도 저한테는 어울리진 않지만 그래도 황태자비보단 훨씬 부담이 덜할 것 같아요.”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추진하자. 나도 최대한 너의 부담을 줄이고 싶으니까.”
테렌스는 그녀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술을 문질렀다.
발레리와의 결혼은 이미 다각도로 계획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시점부터 그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으므로.
“널 사교계에 정식으로 소개할 방편 또한 생각해 두었어. 네가 레이디로서 사교계에 데뷔할 일은 없을 거다.”
“정식으로 소개한다면서, 데뷔할 일은 없을 거라고요? 앞뒤가 안 맞는데요?”
“너는 프리다를 지하세계에서 구해 돌아온 영웅이자, 라벤더궁의 충직한 기사로서 사교계에 첫 발을 내딛게 될 거다.”
“…….”
발레리는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며 한 발짝 물러섰다.
황녀를 구출해 낸 사실은 웬만하면 알리기 싫었다. 공이라면 공이겠지만, 지은 죄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었기에.
“…윽, 그걸 꼭 알려야만 해요? 좀 민망한데.”
“그 정도는 돼야 사람들이 납득하지 않겠나? 일국의 황태자를 가질 여자라면 그만한 공은 세워야지.”
“하하하, 제 과오는 덮고 공만 밝혀 주려고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좀 기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네 공을 드러내고 과를 감추는 건 남편으로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진중하게 말하는 테렌스의 얼굴엔 온화한 기품이 흘렀다.
믿기지 않았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황홀한 이 남자를, 평생 내 것으로 묶어둘 수 있다니. 모든 장애물이 치워지고, 이 남자의 곁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날이 오다니.
발레리는 감격에 찬 눈으로 그를 지그시 응시했다. 테렌스는 그녀가 좋아하는 깊은 보조개 미소를 만들어 화답했다.
초여름의 산들바람이 호숫가에 심긴 버드나무 가지를 스쳐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그때 발레리의 눈에 밟힌 건 호수 뒤편에 지어진 흰색 목조 파빌리온이었다.
덥석, 그녀는 테렌스의 손을 잡고 그쪽으로 이끌었다.
“어딜 가는 거지?”
“오래 서 있었으니까 좀 쉬자고요.”
파빌리온은 비를 피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듯했다. 빗물이 미끄러져 내리도록 지붕은 경사져 있었고, 사방은 유리창이 달린 나무 벽으로 막혔다.
작은 테이블과 두세 명이 앉을 수 있는 나무 벤치도 마련돼 있었다. 발레리는 벤치 쪽을 가리키며 테렌스에게 명령했다.
“앉아요.”
“남편이 아니라 개를 들이고 싶은 건지….”
테렌스는 작게 툴툴거리면서도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발레리는 긴 치마를 허벅지 위까지 걷은 뒤 다리를 벌려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얼굴을 마주 보는 자세로.
이제야 테렌스는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다.
“밖에서 다 보일 텐데.”
“밖에 반딧불이밖에 없는데요?”
“야외에서 하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다.”
“문 닫았으니까 실내죠.”
정말 못 말리는 여자다. 테렌스는 마지못해 웃으며 그녀의 뒷덜미를 당겨 키스했다. 혀끝을 둥글리며 그녀의 입술을 핥고 치열을 훑었다. 벌어진 잇새로 그녀의 달콤한 숨결이 흘러나와 입안을 뭉근히 덥혔다.
젖은 살덩이끼리 부딪치고 얽혔다. 축축한 물소리가 귓가를 데웠다. 서로를 탐하는 거친 호흡이 입안을 녹일 듯 뜨겁게 뒤섞였다.
발레리는 그와 입술을 붙인 채 양쪽 어깨끈을 쭉 내리며 상체를 드러냈다. 테렌스는 얼른 두 손으로 그녀의 속살을 가렸다. 장갑을 낀 오른손까지 쓰면서.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가려요?”
“침실 가서 하면 안 될까.”
테렌스는 사방의 유리창을 불안한 눈길로 응시했다. 물론 인기척은 없다. 고요한 호수 위에 반딧불이가 노란 은하수를 만들고 있을 뿐.
“아뇨, 침실 가서 하면….”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테렌스의 왼손을 치마 속에 집어넣었다.
“…이거 다 말라버릴 텐데요.”
테렌스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재킷 속 주머니에서 낯익은 금속제 플라스크를 꺼냈다.
“뭐야? 나랑 밖에서 할 줄 알고 가지고 온 거예요?”
“아니. 네 침실에서 하게 될 줄 알고 가져온 건데. 네 방에는 약이 없으니까.”
발레리는 플라스크를 그의 손에서 확 채가더니 허공에 던져 버렸다. 물건이 포물선을 그리며 거친 나무 바닥과 요란하게 부딪혔다. 충격으로 뚜껑이 열려 푸른 내용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왜…?”
테렌스의 두 눈이 흔들리며 깜빡였다. 그사이 발레리는 그의 위에 천천히 내려앉으며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하으, 오늘따라 눈이 예뻐요.”
발레리가 엄지로 그의 눈가를 쓸었다. 저 밖의 호수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에 밤하늘의 별빛이 콕콕 박혀 있다.
갑자기 왜 눈 얘기를 할까. 테렌스는 꽉 죄어드는 감각을 참으며 그녀의 뒷말을 기다렸다.
“우리 아기도 이런 눈이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