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외전 3부
마지막 신탁
“마법사님이 여긴 웬일이세요?”
해가 막 기울기 시작한 저녁이었다. 발레리는 퇴근하자마자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이븐을 발견했다.
“이거 받으세요, 아가씨. 전하께서 전해 주라 하셨어요.”
그는 두꺼운 양피지 봉투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지. 그냥 만나서 주면 되는 걸 왜 굳이 마법사님한테 시켰대요?”
“전들 알겠나요. 전하의 깊은 속은 저도 헤아리기 힘들 때가 많답니다.”
레이븐은 이전보다 훨씬 정중한 태도로 인사한 후 뒤돌아 떠나갔다.
“저 인간 요즘은 좀 덜 깝죽거리네. 철들었나?”
발레리는 그의 뒷모습을 흘긋대며 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내용물이 꽤 두둑했다.
뭐지.
발레리는 얼른 방에 들어가 편지를 봉한 밀랍을 칼로 제거했다.
내용물을 펼쳐 드니 종이가 꽤 여러 장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연인 발레리아나 모건 양에게.」
“으억, 이 호칭은 뭐야.”
발레리는 서두를 읽자마자 종이 귀퉁이를 틀어쥔 채 얼굴을 붉혔다. 틀린 호칭도 아니건만, 괜히 콧잔등이 간지러워 재채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테렌스로부터 이렇게 정식으로 편지를 받는 건 처음이었다. 1년 전 드레스와 함께 쪽지 같은 걸 한 장 받은 적은 있어도.
“예전보다 글씨가 많이 나아졌네. 연습 정말 많이 했나 보다.”
그녀는 간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차분히 글을 읽어 내려갔다.
「아마 조금 놀랐을 것이라 짐작한다. 만나서 이야기하면 되는 걸 굳이 왜 글로 전달하는지 의문이겠지.
나는 말로서 생각을 표현하는 것보다, 글로 정리해서 전달하는 게 훨씬 적성에 맞는 것 같아.
네게 말로 애정을 표현할 때마다 넌 감동하기보다는 민망해하며 고개를 돌리곤 하지.
나의 눌변은 경험 부족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전에 누군가에게 밀어를 속삭인 경험이 없으니, 무슨 말을 해도 어색하게 들리는 건 당연할 거야.
그래서 이렇게 글로써 대신한다. 참 다행이야. 네가 글을 쓰는 건 싫어해도 읽는 건 그나마 괜찮다고 하니 말이다.
두서없지만 그동안 네게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펜을 들었다.
네가 날 버리고 떠나던 날을 기억하나? 네가 내게 입 맞추며 흘려 넣은 약 때문에 나는 열흘간 의식을 잃고 누워있었지.
그 열흘 동안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눈을 떴을 땐 새하얀 방 안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나를 심각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어.
—뭐야. 나한테 약 처방 받으러 온 놈이 아닌데? 머리 색이며 생김새 하며 전부 다르구먼.
노파는 코허리에 걸쳐진 안경을 고쳐 쓰며 눈을 몇 번이고 부릅떴다.
—당신은 누구지?
—누구긴 누구야. 약 처방해준 마법사지. 왜 약을 엉뚱한 사람이 먹은 건지 모르겠는데… 총각, 무슨 약을 먹었는지는 알고 있수?
나는 알고 있었다. 너는 내게 정신적 트라우마 치료제를 먹였다고 말했다.
—기억을 지우는 약으로 알고 있다.
—거 참, 이상하다. 처방받으러 온 남자는 총각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었는데. 뭐,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무슨 기억을 지우고 싶어서 먹었수?
—여기가 어디인지부터 대답해.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부터 알아야겠다.
—흐음, 말본새를 보아하니 고위 귀족이 하인을 시켜서 대신 처방받은 것 같구먼. 말하자면 여긴 꿈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총각은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는 여기서 나와 함께 지내게 될 거야. 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봐요. 그때부터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이야기하면, 성심껏 지워줄 테니.
마법약은 일반 약과 다르게 작용한다고 듣긴 했었다. 이렇게 무의식 속에서 마법사를 만나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우는 방식일 줄은 몰랐지만.
나는 가만히 너의 의도를 생각했다.
반년 전이라면 지난해 9월쯤이겠지. 그때 너와 나는 연인이 되었고.
정말 너는 우리가 연인이었던 순간들을 내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었던 거였다.
그렇게 해서 내가 느낄 배신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생각이었을까.
내가 대답이 없자 마법사는 주름진 눈을 접으며 인자하게 웃었다.
—흐음, 상처를 입었거나, 충격을 받았거나, 그런 기억 없수? 다신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면 뭐든 말만 하면 될 텐데.
—지우고 싶은 기억이 없다면.
—그럼 돈 낭비한 거지 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장과 벽면, 바닥이 모두 눈이 부시도록 하얬다. 내가 누운 침대와 마법사가 앉은 의자도 티끌 한 점 없는 순백색이었다. 창문 하나 없이, 조명 하나 없이 밀폐된 공간이 이렇게 밝을 순 없다. 가히 꿈이라고 할 만했다.
네가 내게 먹인 약이 이런 미지의 공간에 날 가둔 것이었다.
마법사는 내게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일러주었다.
—아 참. 반년 짜리 약이니까 명심해요, 총각. 그 이전의 기억은 내가 못 건드리니까.
반년이라니 턱도 없다. 네게 연정을 품은 시점은 그보다 훨씬 전이었다.
내 침묵이 길어지자 마법사는 지루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참 신중한 귀족 영식이구먼. 그럼, 여기 있는 열흘 동안 곰곰이 생각해 봐요. 분명히 있으니만 못한 기억이 존재할 테니까.
첫날은 아무 결론 없이 지나갔다. 내가 놓인 상황 자체가 와닿지 않아서.
둘째 날엔 나를 속인 네가 미웠다.
네 목적이 프리다였을 줄이야.
이상하게 프리다가 걱정되지는 않았다. 네가 프리다를 석실에서 데리고 나갈 방법은 없다고 믿었으니. 아무리 검술 실력이 출중한 너라도 그 지하 석실 문지기들을 물리칠 방법은 없을 테니까.
너의 범죄는 필시 실패할 테지만 난 책임을 묻겠다고 다짐했다.
셋째 날엔 내가 미웠다. 생각해 보니 미심쩍은 부분도 많았고 내 물음을 네가 어물쩍 넘기려고 했던 때도 있었다. 사랑에 눈이 멀고, 귀가 먹었던 것이었다. 날 밀어내던 내게 고집스럽게 다가간 건 전부 나의 의지였다.
넷째 날엔 네가 남긴 말들을 되짚었다. 날 밀어내면서 그랬었지. 후회할 거라고. 지우고 싶어질 거라고. 모든 걸 예상하고 했던 말이었다. 숨쉬기가 힘들 만큼 가슴이 저릿했다.
다섯째 날엔 네 얼굴만 떠올랐다. 내가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슬픈 빛이 감돌던 너의 까만 눈.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여섯째 날부턴 네가 걱정됐다. 초대 황제 엘로이스의 보검을 훔치러 왔다고 했었지. 내 오른손에 영구적인 상처를 남긴 물건이었다. 그걸 만져선 안 될 텐데. 네가 아무리 미워도 네가 손에 상처를 입고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건 싫었다.
일곱째 날부턴 이유 모를 추위에 시달렸다. 온몸을 떨며 앓다 보니 네 온기가 미친 듯이 그리웠다.
네게 죄를 묻겠다고 한 다짐은 그리움 속에 희미해져만 갔다.
마법사는 힘없이 누워있는 날 안쓰러워하며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참다못해 그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너무 괴로워…. 치료해줄 순 없나?
—미안하게 됐구먼.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억을 지워주는 일뿐이라.
의식이 끊어져 갈 때쯤 마법사는 열흘이 지났음을 알렸다. 이 하얀 방을 떠날 때가 온 것이다.
아무것도 없던 벽이 갈라지며 못 보던 문이 생겼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 앞에 다가선 순간, 온몸에 펄펄 끓던 열은 거짓말처럼 식어 버렸다.
—정말 아무것도 안 지울 건가, 총각?
—그래. 그냥 이대로 가겠다.
—후회 안 하겠수?
—후회도 내 몫이겠지.
결국 난 아무것도 지울 수 없었다.
너와의 시간을 없었던 일로 돌릴 수가 없었다. 마음으로, 몸으로, 너와 온기를 나누던 기억들이 사라진다면. 내 심장은 돌처럼 굳어 다신 녹지 않을 것만 같았다.
떠나던 날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울부짖었다. 그 마음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왜 내겐 배신당한 기억마저 소중할까.
미련한 치라고 해도, 미친놈이라 해도 상관없다. 내가 너에게 품을 수 있는 감정은 사랑 하나뿐이었다.
불현듯 장미 화관을 쓴 채 미소하던 네 얼굴이 떠올랐다.
너는 한순간도 가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게는.
문 안으로 한 걸음 내딛는 동시에 나는 침실로 돌아와 눈을 떴다.
여전히 널 사랑하는 채로.
그래, 나는 네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려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이젠 너와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말이기도 하고, 연인들 사이의 흔한 애정표현이기도 하지.
하지만 내 고백엔 다른 의미도 담겨 있다.
난 네게 조건 없이 속박된 남자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네게서 벗어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허락만 한다면 평생, 네 곁을 지키다가 죽고 싶다.
이런 나를 책임져 주었으면 한다.
너의 답은 직접 만나서 들려주길 바라고 있다. 아마도 넌 답장을 쓰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테니.
기상 담당관의 말로는 오늘 밤은 날이 맑아서 꽉 찬 달이 잘 보일 거라고 하는군.
나는 밤 열 시쯤부터 황궁 호수에서 반딧불이를 보며 기다릴 예정이다. 편지를 다 읽었다면, 자정이 넘어도 좋으니 네가 내킬 때 나와 주었으면 한다.
너를 기다리는 시간은 하나도 아깝지 않으니.
너의 연인, 테렌스 엘리엇 린든 켄트웰.」
“…이 사람 이름이 이렇게 긴 줄은 몰랐네.”
발레리는 손끝으로 그의 서명을 쓸어보며 나직이 한숨지었다. 연인의 풀 네임을 이제야 알았다니 조금은 씁쓸했다. 이 남자에 대해 아직 모르는 부분이 한참 남은 것 같아서.
편지가 남긴 여운은 그의 이름만큼이나 길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다가 갈무리를 할 즈음에는 정말 열 시가 되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글을 집중해서 읽은 건 처음이었다. 새삼 글을 배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젖은 뺨을 훔치며 옷장 문을 열었다. 오늘만큼은 조금 다른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나고 싶었다.
***
보스락보스락, 사뿐한 발걸음이 여름 잔디를 밟으며 호숫가로 나아가고 있다.
땅을 가볍게 훑는 드레스 뒷자락에 풀물이 드는 것도 모르는 채 발레리는 저 멀리 내다보며 상큼상큼 걸었다.
개골개골, 호숫가의 개구리 울음소리가 짙푸른 밤공기 속으로 아득히 퍼져갔다. 별 가루 같은 반딧불이가 하나둘씩 나타나 허공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기 그 사람이 보인다.
달빛을 흠뻑 빨아들여 빛나는 머리칼. 호숫가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경직돼있다.
발레리는 뒤꿈치를 세우고 슬금슬금 다가가, 그의 너른 등판을 꽉 끌어안았다.
“테렌스.”
“아. 벌써 왔나?”
갑작스러운 백허그에 놀란 테렌스는 얼른 뒤를 돌아 그녀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발레리는 평소와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은 아니다. 지난해 건국제 무도회, 그러니까 연인이 된 날 입었던 크림색 실크 드레스였다. 그때와 달리 숄을 걸치지 않아 어깨와 등판이 시원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옷은 왜 입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