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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67)화 (167/173)

외전 14화

“하하, 저 망했네요. 황족 살해죄는 공소시효도 없고, 이제 우리 가문 편들어 줄 귀족은 없을 테니까요. 전하한테 괜히 줄 섰나 봐요. 이름만 남은 개국공신 가문을 기어이 멸문시키시려는 줄은 몰랐는데.”

에이바는 정신이 혼미한 듯 한쪽 머리를 꽉 틀어쥐었다. 아비가 선황 독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다면 본인뿐 아니라 일가친척까지 모두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가문의 작위를 폐하고 공녀까지도 반역으로 처분을 받을 수 있겠지. 공작이 재판에 회부된다면.”

‘재판에 회부된다면.’

테렌스는 굳이 이 말에 억양을 넣어 강조했다.

동시에 에이바의 동물적인 생존 본능이 발동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재판에 회부시킬 순 없겠죠.”

“공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

테렌스의 물음에 에이바는 시선을 착 내리깔았다. 얼음송곳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그의 눈빛에서 무자비한 한기가 느껴졌다.

“하아, 전하.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외국에 군사자원 팔아먹은 가문이라고 손가락질받는데, 존속 살해까지 일삼는 희대의 콩가루 집안으로 만들려고 하시네.”

그녀의 앓는 소리에 테렌스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공녀에게 공작의 처분을 맡기는 게 아니야. 그저 공공연한 묵인이 필요할 뿐.”

묵인이라.

에이바는 입을 가리고 엷게 웃었다. 그녀는 철저히 가주의 입장에서 사고했다. 가문이 몸통이라면 어차피 공작은 썩어 문드러진 환부나 다름이 없었다.

목숨과 명예를 지키려면 잘라내는 게 백번 나을.

“그 작자한테 관심 끈 지는 오래니까 어디 마음껏 해보세요. 지금도 음식을 안 처먹어서 아사하기 일보 직전이거든요. 근데 저 정말 가주 자리 사수할 수 있나요?”

“공녀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인데 죄를 물을 순 없지. 다만 심각한 사안인 만큼 가문의 작위가 강등될 거다.”

“어디까지 떨어지는데요?”

“변경백.”

“…나쁘진 않은데 웃기네요. 국경지대 군사 지휘권도 황실이 다 가져간 마당에 허울뿐인 변경백이라니.”

“자치권까지 뺏기고 싶으면 어쩔 수 없고.”

“아,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요. 죄인의 딸이 뭐 어디 거부할 자격이나 있나요. 뜻대로 하세요.”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선황 독살 혐의가 대대적으로 알려져서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것보단 훨씬 나은 선택지였다.

이 시점에서 에이바는 궁금해졌다. 황태자가 어떤 방식으로 공작을 처분할지.

“흐음, 자객을 보내실 건가요? 독이라도 쓰시려나?”

“…아니.”

“그럼?”

“오랜만에 정원 산책이라도 좀 시켜보는 건 어때. 감시병력 붙여서.”

“흐음.”

“폭정에 시달리던 영지민이 반란을 일으킨 걸로 해 두지. 공녀는 안전히 피신해 있어. 이런 일을 언질 없이 벌였다간 공녀도 충격이 클 테니 미리 말해 두는 거야.”

“배려심도 깊으셔라. 장례식 치르고 나서 목이라도 보내 드려요?”

“아뇨, 목 말고요. 왼손을 보내 주세요.”

발레리가 두 사람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며 에이바에게 요구했다.

“응? 왼손을 잘라서 보내 달라고?”

“네.”

왼손을 달라고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발레리가 어릴 적 그에게 남긴 흉터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 굳이 네가 원한다면.”

***

테렌스의 계획은 보기 좋게 완성됐다.

북부 영지민들이 공작저를 습격해 공작을 살해했다는 기사가 일주일 후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얼마 안 가 에이바가 보낸 전령이 무언가를 가지고 와 테렌스의 앞에 바쳤다. 자물쇠로 굳게 잠긴 나무 상자였다.

열쇠는 전서조를 통해 전달받았다. 그러나 테렌스는 상자를 열어보지 않고 기다렸다. 발레리가 밤에 침실로 찾아올 때까지.

“직접 열어 봐.”

테렌스는 발레리의 손에 열쇠를 꼭 쥐여 주었다.

철컥, 하고 상자가 열린 순간.

핏물이 싹 빠져 회백색이 된 공작의 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어릴 적 깨물어서 남긴 흉터가 그대로 있었다.

이로써 공작의 최후가 증명됐다. 목숨이 끊어지는 장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만한 증거는 없을 것이다.

“…정말 이걸로 끝난 걸까요.”

발레리는 왠지 모를 허탈한 기분을 누르며 상자를 다시 닫았다. 테렌스는 그녀의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 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 널 추적했던 자들은 모두 처분해야지.”

테렌스는 에이바가 구금해 둔 공작의 사병들에게 곧바로 처분을 내렸다. 이들은 육지와 멀리 떨어진 한 외딴섬의 소금 광산에 보내졌다.

이제 그녀에게 위해를 끼치려 했던 사람들은 칼레바니아 땅에서 모두 제거됐다.

황제는 공작의 뜬금없는 죽음에 적잖이 당황했으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결론지었다. 공작가는 몰락 직전이니, 불만 가득한 영지민들이 들고 일어나기엔 적기이다.

다만 공작저에 있던 황궁 병력이 영지민의 봉기 당시 왜 손을 놓고 있었는지는 의문이었다.

“테렌스. 좀 이상하지 않으냐? 공작저에 보낸 감시병력이 적어도 이백은 될 텐데, 그 난리 통을 그냥 보고만 있었다니.”

“공작저를 수비하라고 보낸 병력은 아니지 않습니까. 황실의 군대가 죄 없는 영지민들의 행동을 진압할 이유는 없습니다.”

“…업보를 다 치르지 못하고 죽은 건 유감이구나.”

황제는 쓴 입맛을 다셨다.

끝끝내 공작을 재판에 올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폭정을 일삼은 대가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정의로운 결말이었다.

***

공작의 비참한 말로를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귀족파의 3할은 마력석 밀수 사건 관련자로 처분되었다. 이젠 딱히 정적이라 할 자들도 없으니, 황제 엘리엇의 남은 고민은 한 가지였다.

황제는 응접실 테이블에 앉아 금테가 둘린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넘치기 직전의 잔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대신전의 여사제, 셀레스틴이 앉아있었다.

“셀레스틴.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오? 정말 그 망아지 같은 아가씨한테 내 아들을 장가보내야 하는 거요? 엘로이스 황제의 반지가 왜 그 아가씨 손에서 눈을 떴는지 원….”

“신께서 선사하신 성물이 선택한 주인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마음 깊이 사랑하는 여인이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테렌스에게 그 아가씨를 계속 만나고 있냐고 물을 때마다 똑같은 답이 돌아왔다.

—네, 폐하. 보는 눈을 피해서 잘 만나고 있으니 심려 마십시오.

그게 심려 말라며 할 소리인가. 네가 그 아가씨를 만나는 것 자체가 내겐 심려다, 이 자식아.

황제는 제 잔에 포도주를 한 잔 더 따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신의 뜻도 참 가당찮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왕을 사위로 맞아야 했었는데, 이젠 도적을 며느리로 삼으라는 게 말이 되오? 하아, 나는 정말 자식들 결혼복은 하나도 없는 것 같소.”

“폐하, 며느릿감으로 따로 마음에 두신 귀족 영애나 동맹국 공주가 있는 겁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테렌스는 그 아가씨가 뭘 좋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까만 눈이 야무지게 생겨서 봐줄 만은 하다만, 근본이 천하고 배운 것이 없잖소. 사교계에는 어찌 명함을 내밀 것이며 황궁 안살림은 어떻게 돌볼지 원….”

“근본이 무엇이든 사람에게서 사람이 난 것이겠지요. 어찌 되었든 황녀 전하를 구출한 영웅으로, 황궁 기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배움에는 때가 없으니 모자란 부분은 어렵지 않게 채워지리라 사료됩니다.”

셀레스틴은 차분히 대답했으나, 무언가를 꾹꾹 억누르는 듯한 말씨였다. 그녀는 눈앞에 놓인 술잔을 단 한 번도 입에 가져가지 않았다.

“흠, 둘이 지금은 좋다고 해도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 일이니 두고 지켜봐야겠지. 한데 자네, 성녀 칭호를 받을 때도 되지 않았나?”

황제가 대뜸 화제를 바꾸었다.

셀레스틴은 황녀 프리다의 운명을 예언한 사제다. 그녀의 말대로 모든 게 이루어졌으니, 황제의 입김이라면 그녀는 곧 온 백성이 떠받드는 성녀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칼레바니아 황실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주 컸다. 700년 전 나라가 크세니아에서 독립하면서 교단을 따로 세웠고, 그 과정에서 건국 황제 엘로이스의 자본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갔기 때문이다.

황제의 물음에 셀레스틴은 평소처럼 무감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폐하. 저는 곧 성직을 내려놓을 예정입니다.”

“자네처럼 신력이 있는 성직자가 어찌? 성녀가 되면 제국의 그 아무도 자네를 건드리지 못할 텐데.”

“자격이 없습니다.”

“대체 무슨 자격이 필요하지? 마왕과의 계약에 묶여있던 내 딸의 저주를 풀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

셀레스틴은 취기로 벌게진 황제의 눈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황제는 얼른 말해 보라는 듯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저는 순결한 몸이 아닙니다.”

황제의 얼굴에서 붉은기가 살짝 가셨다. 이런 적나라한 대답이 나올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걸 굳이 왜 내게 고하는가? 말 안하면 아무도 모를 것을. 그리고 경험이 좀 있으면 어떤가? 서품을 받고 나선 품행에 문제가 없었던 걸로 아는데. 입바른 소리가 좀 심한 걸 좀 빼면.”

황제는 개방적인 편이었다. 굳이 왜 성직자들이 육체적인 순결을 지키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처녀 여신 시에나의 행적을 따른다는 의미가 있다는 걸 알지만, 아무리 사제라도 인간이다. 인간의 몸뚱이가 어찌 정욕을 이긴단 말인가.

“아이를 낳아서 버렸습니다.”

“…뭐? 언제?”

황제의 입이 떡 벌어졌다.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입니다.”

“그렇다면 스무 살은 넘었겠군. 아비는 누구지? 자네 고향인 이스티아 사람인가?”

“아뇨, 이 나라 사람입니다. 제가 버리고 간 아이를 혼자 키우다 마차 사고로 죽었습니다. 아이도 같이 타고 있었으니 함께 죽었겠지요.”

“사고가 어디서 났는데?”

“남부 던퍼드 인근의 절벽에서 떨어졌습니다.”

“프레이저 후작령이군. 아마 높은 확률로 아이도 죽었겠지만 내가 한번 수소문해 볼 수 있네. 아주 정보력이 발군인 인재를 하나 영입했거든.”

셀레스틴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이는 죽었으니 저는 평생 참회하며 살겠습니다. 성녀 칭호는 필요 없습니다. 지금 운영 중인 보육원에 대한 기부만 늘려 주시기 바랍니다.”

“허허, 자네가 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알겠네.”

황제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신력 좋은 사제라도 제 잇속은 챙길 줄 아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복지사업 명목으로 지원하는 자금은 뒷주머니에 차기 딱 좋은 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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