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66)화 (166/173)

외전 13화

「공작의 시중을 들던 집사를 체포해서 내게 넘겨.」

테렌스의 요구에 에이바는 충실히 응했다. 저택에 유일하게 남은 아비의 수족은 그녀의 눈에도 거슬리는 존재였으니.

공작저의 집사는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되어 황궁으로 끌려왔다. 나흘 내내 검은 천을 쓰고 있던 터라 제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다.

그가 눈을 뜬 건 황태자궁 지하의 한 밀실이었다.

의자 팔걸이에 사지가 단단히 묶여있었다. 얼마나 세게 묶었는지 피가 안 통해서 양손이 허옇게 질릴 정도였다.

저벅, 저벅.

흰 제복을 입은 금발 남자가 걸어 들어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살고 싶다면 지금부터 묻는 말에 잘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저, 여기가 어딘지….”

오랜만에 빛을 본 집사는 눈을 정신없이 끔뻑거렸다.

“그건 알 바 없고. 이 여자를 알고 있나?”

테렌스가 옆에 선 여자를 가리켰다.

집사의 뿌연 시야에 그녀가 잡혔다. 눈이 크게 벌어졌다. 마치 구면인 사람을 발견한 것처럼.

“바, 발레리 로빈슨…?”

“바로 알아보는군. 지금도 공작이 사병을 풀어서 이 여자를 찾고 있나?”

집사는 이제야 금발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보고 사색이 됐다. 단단히 묶인 사지가 발발 떨렸다.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 여자는 탈옥했다가 다시 붙잡힌 거 아니었습니까? 대체 왜 전하와 함께 있는지…?”

집사의 질문에 테렌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현상 수배 벽보가 붙었다가 프리다가 귀환하자마자 떨어졌으니, 탈옥했다가 붙잡힌 줄로만 알고 있었군. 기사로 채용된 사실은 아직 모르는 것 같고.’

대신 허리춤의 검을 뽑아 그의 목 앞에 들이댔다.

“상황파악이 덜 됐나? 죽기 싫으면 묻는 말에만 대답해. 공작이 아직도 영지 밖에서 사병을 부리고 있는지.”

“아, 아닙니다. 사병들은 그… 펠런 두목이 잡혀서 사형당한 이후엔 철수했습니다. 공작님이 찾던 건 그 사람이라….”

테렌스와 발레리는 속으로 깊이 안도했다.

공작의 사병들이 뿔뿔이 흩어졌다니. 집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발레리는 혹시 모를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럼 지금은 사병을 아예 굴리지 않는다는 건가.”

“네, 네.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게, 공작님은 지금 침실에 완전히 유폐되어 계십니다. 공녀가 저조차도 들어갈 수 없게 막아 두었으니까요….”

“이 상황에서도 공작에게 공대하는군. 꽤 충직한 가신이었나 본데. 공작가가 몰락하는 걸 보고도 그 집에 남을 생각을 했나?”

“저, 전하, 공대는 그저 버릇이 돼서…. 볼드윈 가에 남은 건 저희 집안이 대대로 일을 해온 곳이라….”

집사는 겁에 질려 횡설수설했다. 테렌스는 그를 무감하게 응시하며 또 다른 혐의를 꺼냈다.

“이미 공작은 프레이저 후작령에서 스무 명을 청부 살해했지. 사건 발생지 인근에서 그들을 목격했다는 증언만 일곱이다. 넌 공작의 청부 살인 행위에 가담했다. 살인 방조죄로 기소할 테니 그리 알고 있어.”

“저, 저, 전하. 오해십니다. 공작님은 그저 도적들을 소탕하려는….”

“도적 소탕은 치안대가 할 일이지, 공작의 사병이 남의 영지까지 쳐들어가서 할 일은 아니다. 월권도 참 가지가지로 하는군.”

“…….”

집사가 침묵하자 이번엔 발레리가 입을 열었다.

“내 신상 아는 사람, 당신하고 공작, 공녀, 사병들, 또 누가 있어? 혹시 다른 귀족도 알고 있어?”

“아, 아뇨. 공작님이 가택 연금된 이후에는, 다른 귀족들이 공작님하고 교류를 완전히 끊어 버린 터라… 딱히 정보가 오간 적이 없습니다.”

마력석 밀수 사건이 발각되자, 공작과 엮이고 싶지 않은 귀족들이 연락을 끊었다는 말이었다.

귀족회의는 공작의 작위 박탈까지는 안 된다며 그의 편을 들었지만, 혹시 불똥이 튈까 봐 사건과는 모두 거리를 두려 했었다. 공작과 친분을 과시하던 귀족파들도 쥐죽은 듯 조용하게 지냈다.

발레리는 새삼 사건을 제보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공작의 밀수 혐의가 적발되지 않았다면, 그녀의 신상은 전국 귀족들의 탐색망 안에 있었을 테니까.

“그래. 레이븐, 이 자를 지하 감옥에 가둬라.”

“네, 전하.”

집사의 뒤에 서 있던 레이븐이 의자에 묶인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저, 전하, 제가 바른대로 모든 것을 고했사온데 참작은 없는 것입니까?”

궁지에 몰린 집사는 뒤돌아선 테렌스를 향해 간절히 호소했다.

“글쎄. 네가 내 여자의 신상을 아는 이상 살려두긴 힘들 것 같구나.”

테렌스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하실을 나섰다.

***

테렌스는 에이바를 은밀히 황성으로 불러냈다.

베스타 틸리스, 이전에 발레리가 바람 현장으로 오해해 깽판을 부렸던 그 밀실 술집으로 찾아오라고.

가주가 된 에이바는 이제 공작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황성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황궁에서 붙여준 보좌관—이라고 쓰고 감시인이라고 읽는다—과 동행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지만.

테렌스는 에이바에게 만나기 전까지 해 오라며 숙제를 내주었다.

「공작이 부렸던 50명의 사병. 신원을 모두 파악해 내게 넘겨라.

그리고, 과거 공녀의 가문에 이런 이름의 고용인이 있었는지 확인을 부탁한다.

‘아네타 크로스비’」

약속 당일, 에이바는 테렌스가 있는 밀실로 안내를 받았다.

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검은 가발을 뒤집어쓴 테렌스, 그리고 아주 낯익은 흑발의 여인.

“전하를 뵙습니다. 어머, 발레리? 너 탈옥했다가 붙잡힌 거 아니었어? 전하께서 애인이라고 사면 시켜줬니?”

역시 에이바 또한 그녀가 탈옥했다 붙잡힌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그래. 수배지 붙었다기에 정말 황궁에서 뭘 훔쳐갔나 했는데, 무사하다니 다행이네. 근데 전하는 얘 도둑 출신인 거 알고도 만나시나요?”

테렌스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본론부터 제시했다.

“공녀. 발레리의 신원은 공작으로부터 알게 된 거겠지?”

“네, 아버지가 황제 폐하께 서신을 보낼 때 저한테 전서조를 빌렸었거든요. 빌려주는 대신 서신 내용을 열람하게 해달라고 했어요. 발레리의 신원을 폭로하면서 처분을 요구하는 내용이더군요. 얘가 아버지의 철천지원수인 도적단 소속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쾅.

발레리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거세게 내리쳤다. 에이바가 어깨를 움찔 떨며 그녀를 토끼눈으로 쳐다봤다.

“어마, 깜짝이야, 왜 그래?”

“공작은 제 동료 스무 명을 죽였어요. 두목도 찾아서 죽이려고 했고요.”

“알고 있어. 정말 유감이니까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마. 나도 그 작자가 가택연금 중에 그런 짓을 벌일 줄 몰랐단 말이야.”

에이바는 따갑게 와닿는 발레리의 시선을 피하며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테렌스의 앞에 내밀었다.

“아버지가 부렸던 사병 오십 명은 신원 파악 완료했어요. 체포해 가신 집사네 집에 목록이 있더라고요. 혹시나 해서 전부 잡아들여 저택 창고에 묶어 놨는데요. 언제 배달해 드리면 될까요, 전하?”

“행동력이 뛰어나군. 어차피 해체한 집단이라 신원 파악만 요구한 거였는데, 신병까지 확보해준 덕분에 일 하나가 줄었다.”

“저는 전하한테 줄 섰잖아요. 하나를 시키시면 열을 해 드려야죠. 목도 따서 보내드려요?”

“아니, 산 채로 보내. 목을 따도 내가 따겠다.”

테렌스와 에이바가 살벌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발레리는 두 사람을 차례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두 사람이 은근히 죽이 잘 맞는 것 같다고.

“그래, 공녀. 다른 숙제는 해 왔고?”

“아유, 그럼요. 아네타 크로스비. 이 여자, 어머니의 하녀였어요. 30년 전에 죽었고요.”

“거기까진 알아. 특이사항은?”

“남편인 길버트 크로스비도 저희 가문에서 일했었더라고요. 아버지의 잔심부름꾼으로요. 근데 남편도 30년 전에 죽었어요.”

“잔심부름꾼?”

“네, 잔심부름꾼인데 죽기 직전에 수당을 꽤나 많이 받았더라고요. 명목을 보니까 무슨 갈라반트 대륙에 출장을 다녀왔다고 비용처리가 돼 있었어요.”

“잔심부름꾼을 갈라반트 대륙에까지 출장을 보내다니. 공작이 시킨 일인가?”

테렌스가 짚이는 게 있는 듯한 표정으로 에이바에게 되물었다.

“그럼 누가 시키겠나요? 그 사람들 딸이 살아있다길래 불러서 추궁을 좀 했어요. 어릴 적이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아버지가 몇 달 동안 갈라반트 대륙에 갔다가 무슨 식물 씨앗 같은 걸 엄청 가지고 왔었다고 하던데요.”

“씨앗이라고….”

“네, 그걸 보고 어머니가 기함을 하면서 아버지를 타박했다는데, 한바탕 부부싸움이 있었나 봐요.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요.”

“딸의 신원은.”

“그럴 줄 알고 가져왔죠. 근데 왜 알아보라고 하신 거예요? 30년 전에 죽은 사람들 일을.”

에이바는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더 꺼내 테렌스의 앞에 내보였다.

“공작은 또 기소될 거야.”

“…또요? 도적단 살해 사주한 혐의로요?”

“그건 부차적인 거고. 30년 전의 일로.”

“하, 그 작자가 30년 전에 또 뭘 했는데요?”

그녀는 제 아비인 공작을 남보다 못한 사람처럼 호칭했다.

“그 씨앗. 여기 센토스 대륙에선 멸종된 레퀴나스다. 선황이 돌아가시면서 보인 증상이 레퀴나스 중독 증세와 일치했었지.”

밀실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발레리는 촉각을 곤두세우며 테렌스와 에이바를 번갈아 쳐다봤다. 솔직히 놀랐다. 테렌스가 공작의 혐의를 공녀에게 그대로 이야기할 줄은 몰랐으니까.

“선황 독살이라. 증거 있어요?”

에이바는 뻔뻔하게 턱을 치켜들며 물었다.

“아네타 크로스비가 흥신소에 제보를 했더군. 깊은 숲속에 레퀴나스가 재배되고 있으니 모두 불살라 달라고. 그땐 이미 일정량이 황궁에 보내진 시점이었지만.”

“하아….”

“레퀴나스는 신선한 상태에서 즙을 짜야 제대로 된 독성이 발휘되지. 씨앗째로 들여와 직접 재배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아으, 시발, 미친 거 아닌가. 그 증거가 지금껏 남아 있다고요?”

에이바는 이성을 잃고 험한 욕설을 내뱉었다. 아마 제 아비를 향한 것이리라. 그녀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흥신소를 운영하던 자가 모든 증거와 표본까지 가지고 있다.”

“어머, 그게 그 레퀴나스라고 어떻게 확신하시나요? 다른 사람이 재배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멸종한 독초를 재배하는 게 공작의 악취미에 불과했다면, 한창 젊은 나이였던 부부가 비슷한 시기에 의문사할 이유도 없었겠지.”

“…전부 전하께서 조작한 사건이라고 해도 유죄판결은 확정이겠죠?”

“조작이라고 믿고 싶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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