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외전 2부
결혼의 조건
발레리가 황궁으로 복귀한 건 늦은 밤이었다. 그녀는 침실에 짐을 풀기도 전에 헐레벌떡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벽을 타고 올라 테렌스의 침실 창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가 연인의 품에 안겼다.
“하하,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나?”
테렌스의 흐뭇한 얼굴은 금세 굳어졌다. 품 안의 발레리가 대답 없이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까맣게 확장된 그녀의 동공은 분노와 공포에 잠겨있었다.
“무서워요.”
“왜 그러지? 오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나?”
그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발레리는 그의 너른 어깨에 뺨을 비비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볼드윈 공작이 내가 펠런인 걸 알고 있었어요. 내가 여기 있는 거 알면 어떡하죠? 나 지하세계 갔을 때 황성에 수배지 붙어 있었잖아요. 나 탈옥한 줄 알고 계속 찾고 있으면 어떡해요….”
테렌스는 착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도 알고는 있었다.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발레리의 신분을 폭로한 게 공작이라는 걸.
“발레리, 진정해. 공작이 네 정체를 알고 있는 건 맞지만, 너에 대한 처분은 황제 폐하께 일임했다. 그리고 공작은 가택연금 상태잖아. 네게 감히 해코지하진 못할 거다.”
“아뇨. 공작은 가택연금 중에도 외부 사람을 써서 저희 동료들을 죽였어요. 그 넓은 후작령에서도 수소문해서 제 정체까지 알아냈다고요. 황성에서 제 행방을 못 찾을 이유가 뭐겠어요.”
“흠….”
테렌스는 한 달 전쯤 에이바가 보내온 서신 내용을 떠올렸다. 전서조를 통해 암호문으로 쓰인 글이 왔었다. 해독한 결과 내용은 이랬다.
「제 아비라는 작자가 두어 달 전에 집사에게 거액의 어음을 끊어준 게 드러났어요.
그 돈이 어디로 들어갔나 추적해 보니까 영지 밖에서 사병들을 굴렸던 모양이에요. 대략 오십 명 정도?
또 크세니아랑 접촉한 건 아닌지 꺼림칙하더군요.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 이젠 집사랑도 말을 못 섞게 방문을 봉쇄해 버렸지요.
그랬더니 뭐라는 줄 아세요? 곱게 키운 딸이 가주가 되더니 저를 죽이려 한다고 아주 야단법석이랍니다. 사흘째 곡기를 끊고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어요.
문에 구멍을 뚫어 식사는 꼬박꼬박 넣어 주고 있으니 죽더라도 제 과실은 아니겠지요. 굶어 죽으면 본인 잘못이니까 전 처벌하지 마시길 부탁드려요.」
두어 달 전이면 발레리의 동료들이 괴한들에게 살해당했던 즈음이었다. 어음은 그 범인, 즉 공작의 사병들에게 청부 살인의 대가를 지불하는 데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테렌스는 생각에 빠졌다.
‘고위 귀족이랍시고 저택에서 집사만큼은 부릴 수 있게 해둔 게 화근이었어. 법관들을 설득해서라도 피오르탑에 가뒀어야 했는데.’
발레리의 말대로 공작의 칼날은 지금 그녀를 향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안전을 위해선 하루속히 파악해야 한다. 공작이 지금도 영지 밖에서 사병을 굴리고 있는지.
“공작저의 집사를 체포해 와야겠군. 발레리, 호위를 붙여줄 테니 한동안 근신해라.”
“제가 호위기사인데 저한테 호위를 붙인다고요?”
“명목상으론 프리다에게 붙이게 될 거야. 당분간 라벤더궁 밖으로는 나오지 마. 밤에는 내가 찾아갈 테니까.”
품 안의 발레리는 아직도 막연한 공포 속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솔직히 테렌스는 그녀의 반응이 다소 과하다고 생각했다. 황궁은 얼마 남지 않은 공작의 사병에게 뚫릴 만큼 경비가 허술하지 않았다. 로저 경은 지하 석실의 경비를 책임지던 때처럼 라벤더궁의 호위 병력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그래도 그녀를 이해하고 보듬었다. 동료들의 죽음을 실감하고 온 발레리에게는 추적당할 가능성 자체가 더없이 큰 공포일 테니까.
“잠시면 돼. 공작은 곧 처리될 거다.”
테렌스는 그녀의 등을 살살 토닥이며 안심시키려 했다. 발레리는 고개를 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직접 처리하게 해 주시면 안 돼요? 동료들의 복수를 하고 싶어요.”
번뜩이는 까만 눈에 살기가 어렸다.
테렌스는 힘줄이 툭 불거진 그녀의 주먹을 잡고 부드럽게 펴냈다.
“…공작은 선황의 독살 혐의를 받고 있다. 폐하께서 증거도 가지고 계시고, 증언도 확보했어. 네 양부인 모건 씨가 조사 중이야.”
“선황 독살이라뇨? 그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전대 황제요?”
“그래. 내 백부님 말이다.”
카메론 3세.
현재 황제인 엘리엇의 죽은 친형이었다.
그는 유약한 군주였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반기를 드는 볼드윈 공작을 두려워하고 기피했다.
당시 황제는 오랜 친구이자 충직한 무관인 프레이저 후작의 뒤에 숨었다. 인사부터 자잘한 잡무까지 후작에게 모든 판단을 의존했다. 알현 시간에도 후작을 옆에 세워두고 의견을 물을 정도였다.
후작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국정을 좌우하는 실세가 됐다. 무기력한 황제가 혼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니 신하 된 자로서 조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법무대신과 군무대신 등의 요직은 후작의 입맛대로 황실에 우호적인 신흥 귀족들로 채워졌고, 귀족파의 득세를 견제하는 정책이 시행됐다.
공작은 치를 떨었다. 황제가 북부 지역의 밀무역 감시를 강화하고, 고의적인 탈세에 대한 가산세율을 대폭 인상하면서다.
눈엣가시 같은 프레이저 후작의 농단을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었다.
—우유부단한 황제라 쥐락펴락하기 쉬운 줄 알았건만. 후작 뒤에 숨어 공신들에게 엿을 먹이겠다? 오만한 것. 황좌에 앉을 자가 너밖에 없을까 보냐.
후작의 종이 인형은 치워버리자는 결심이 섰다. 공작은 황제의 친동생인 엘리엇 황자를 새 황좌의 주인으로 제시했다. 공작을 따르던 귀족들은 모두 수긍했다.
엘리엇 황자는 그때까지만 해도 서부 영지의 바닷가에서 낚시나 하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어차피 정무에 관심 없는 한량이니, 공작은 그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얼마 안 가 카메론 3세가 요절했다. 독살 의혹이 있었으나 증거가 부족해 흐지부지 넘어갔다.
그리고 엘리엇이 즉위했다.
황제가 바뀌자 공작은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다.
—지금 황제가 누구 덕분에 보위에 올랐는데.
황제가 연회를 열 때도 대놓고 “폐하께선 제 덕을 좀 보셨다”며 생색을 냈다.
덕을 본 건 사실이니 엘리엇은 부정하지 않았다. 카메론 3세가 승하하자마자 공작은 엘리엇의 즉위를 발 빠르게 돕고. 귀족파의 지지를 모아주긴 했으니.
그러나 엘리엇 황제는 공작의 기대와 달리 움직였다. 정치에 관심을 내보인 적이 없었을 뿐 판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새 황제는 제 즉위에 힘써준 귀족파의 부정을 적당히 눈감아 주면서도 선을 넘으면 따끔할 만큼의 불이익을 줬다. 친우인 프레이저 후작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으나 조언을 구하는 일은 없었다.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알아서 중심을 잡았다. 황제파라고 해도 귀족은 귀족이니, 공작의 세력과 서로를 견제하며 고발하도록 내버려 뒀다. 그렇게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며 황권을 공고히 해나갔다.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었군.
공작은 예상외로 지능적인 새 황제의 행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유일한 약점인 황녀 프리다를 공략했다. 그녀를 가문의 며느리로 잡아두려고 넣은 청혼서는 두 번 반려당했다. 분통이 터졌다.
외부로 눈을 돌려 크세니아와의 결탁을 꾀했지만 보기 좋게 덜미를 잡혔다. 장남이 모든 처벌을 받았으나 진짜 배후가 공작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장남 사이러스는 할 줄 아는 건 도박밖에 없는 순 건달이었기에.
현재 엘리엇 황제는 발레리의 양부인 필리스 모건에게 지시해 밀수 사건 관련자들을 솎아내고 있었다. 비밀리에는 선황의 독살 사건을 조사하면서.
테렌스는 침착하게 이런 배경 상황을 설명했다.
“…문제의 마력석 장신구 생산시설에 금속과 보석, 부자재를 납품하던 자들을 모건 씨가 모두 파악해 냈다. 공작과 오래 협력해온 사업가들이었지. 생산시설이 건립될 당시 대대적인 투자까지 했더군.”
“네, 그 사업가들 뒤에는 매킬런 백작 같은 북부 똘마니들이 있을 거고요. 크세니아 돈도 적지 않게 들어갔을걸요.”
발레리는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다가 제 의견을 보탰다.
“너도 짐작하고 있었구나. 하긴, 너도 네 양부의 일을 오래 도왔다고 했으니.”
“그래서요? 공작하고 관련된 인간들은 다 쳐낼 거예요?”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그럴 거다. 이미 공작은 명예가 땅에 떨어진 죄인이야. 선황 독살 사건은 30년 전 일이지만, 밀수에 조력한 측근들을 잡아내고 있으니 그의 편에 서는 자는 이제 없을 거다.”
조곤조곤 말하는 테렌스의 가슴 위에 발레리의 두 손이 살포시 얹혔다. 그녀의 시선은 구름 낀 밤하늘처럼 먹먹한 잿빛이었다.
“전하.”
“…왜 그렇게 부르지? 무섭게.”
“저랑 결혼하고 싶은 거 맞죠?”
대뜸 결혼 질문이라니. 반가우면서도 실로 뜬금없었다. 테렌스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선명하게 대답했다.
“그래. 난 네 남편이 되고 싶다.”
“조건 하나만 걸게요.”
“…뭐든.”
그는 금방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발레리와 코끝을 맞댔다.
원하던 애틋한 분위기는 조성되지 않았다. 발레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요구사항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결혼하는 건 좋아요. 단, 공작이 죽은 다음에 할 거예요.”
“결혼을 공작 사후에 하겠다?”
“네. 어차피 귀족파가 쓸려 나가야 편하잖아요. 평민하고 결혼한다고 시비 거는 사람들이 적어질 테니까. 결혼이야 당신 말처럼 애를 먼저 만들든, 중앙궁 알현실에 배 째라고 드러눕든 하면 어떻게든 되겠죠.”
테렌스는 그녀의 의도를 단번에 간파했다.
‘내게 공작을 척살해 달라는 말이구나. 공작이 자연사할 때까지 기다릴 순 없을 테니까.’
그는 냉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내가 일개 몰락 귀족으로부터 너 하나 못 지킬 거라고 생각하나?”
“손에 피 묻히긴 싫은가 봐요?”
그녀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그럴 리가. 너에 대한 위협은 날 향한 위협이기도 해. 당장은 힘들겠지만 파장이 적은 방법을 찾아보겠다.”
“믿고 있을게요. 공작이 살아있는 한 저는 신상을 알릴 수 없어요. 당장 작위 수여식도 미뤄야 할 판이고요.”
테렌스는 발레리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단두대 밑에 엎드려 있을 때조차 지켜내지 못했다.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반복할 순 없었다.
어차피 공작은 합당한 처분을 받을 예정이다. 황제는 이미 그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정했으니까.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도 그 시기를 끌어당길 방법은 얼마든지 존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