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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64)화 (164/173)

외전 11화

나는 휴가를 내고 후작령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죄책감이 들었다. 죽은 동료들을 잊고서 그동안 너무 안온한 일상을 보낸 것 같아서.

황실에 더없이 감사했다. 내가 뭐라고, 두목이 뭐라고, 이렇게 동료들을 추모할 기회를 주다니. 황궁 문턱에 엎드려 이마를 쾅쾅 찧고 싶을 정도였다.

황녀님을 무사히 구출해 온 대가라고는 하지만 모든 게 너무 과분하게만 느껴졌다.

출발 전날 밤, 테렌스는 먼 길 무사히 다녀오라며 손수건 한 장을 쥐여 주었다.

“동행하고 싶었는데, 모건 씨가 한사코 마다하시더군. 부담스러우시다고.”

“…황태자가 뜬금없이 도적들 장례식에 참석하는 건 그림이 이상하잖아요. 명분도 없이.”

“명분은 충분하지. 내 아내가 될 여자를 키워 준 은인들인데. 아쉬운 대로 마차와 호위 인력을 준비해 뒀으니 편히 다녀와라.”

나는 깊고 진한 입맞춤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이제 결혼 얘기는 익숙해져서 대꾸할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아침 일찍 두목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가는 길에 비가 좀 내려서 후작령까지 나흘이 넘게 걸렸다.

테렌스의 말대로 아지트가 있던 플라타너스 숲 한가운데에 작은 공동묘지가 조성돼 있었다.

루카스와 케빈, 대릴 등 칼레바니아에 잔류한 동료들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봉을 마치고 그들과 함께 비석 앞에 나란히 섰다. 차가운 느낌의 대리석 위에 죽은 동료들의 이름이 유려한 필기체로 새겨져 있다.

헌화와 묵념이 끝나자 프레이저 후작가의 고용인이 두목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모건 씨, 유감스럽지만 뼛조각 몇 개 말고는 전부 소실되었습니다. 넋이나마 기릴 수 있게 비석이라도 세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어디입니까. 후작가에서 신경 써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 지시하신 일인데요.”

고작 뼛조각 몇 개라니. 침통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인간은 불에 탈 때 가장 큰 고통을 느낀다고 들었다. 나는 속으로 빌었다. 제발 오두막이 불길에 휩싸이기 전에 동료들의 목숨이 끊어져 있었길. 가는 길에 고통스럽지 않았길.

묘비에는 로이의 이름도 있었다.

그는 아지트 습격 사건이 있기 훨씬 전에 죽었지만, 이미 뒷마당에 묘비가 있어서 로이의 것도 다시 썼다고 했다.

“로이….”

로이는 삼촌뻘 되는 아저씨 단원이었다. 두목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였다. 우리 도적단에 서열 같은 건 딱히 없었으나 다들 그를 부두목 정도로 생각하고 따랐다.

내가 열두 살 때쯤이었나. 그는 손바닥만 한 나무상자를 가져와서 날 앞에 앉혀 두고 온종일 머리를 땋았다.

어깨에 간신히 닿는 짧은 머리카락을 작은 갈래로 땋고, 땋고 또 땋아서 갈아 놓은 논밭처럼 만들어 놨다.

머리를 만지는 정성 어린 손길에 나른해져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 어깨가 뜨거워서 깼다. 로이가 머리를 땋다 말고 내 어깨에 눈물을 쏟고 있었다.

—베키, 베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난 위로하는 법을 몰라 가만히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가끔 나를 베키라고 불렀다. 그럴 때마다 난 “발레리거든!” 하고 역정을 부렸다. 그가 내 생일에 선물이랍시고 내민 분홍색 드레스는 단 한 번도 입어주지 않았다.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옷은 딱 질색이었다.

비가 오는 밤이면 로이는 내게 어린애처럼 졸라댔다.

—한 번만 아빠라고 불러 주면 안 되겠니?

나는 싫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내겐 죽어도 어색한 호칭이었다. 아빠라니. 그런 게 있었어 봐야 입으로 꺼내는 법도 알았을 것이다. 날 거둬온 두목에게도 아빠라 부른 적이 없는데 무슨.

베키. 그건 로이의 죽은 딸 이름이었다. 열한 살에 열병을 앓다 죽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내가 그 또래에서 한참 벗어난 뒤였다.

로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 일이 가장 후회가 됐다. 어쩌면 잠깐이라도 난 그의 베키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빠. 고작 두 음절이면 잠시나마 그의 상실을 위로할 수 있지 않았을까.

겨우 말 한마디에 왜 그리 인색했을까.

로이 말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랬다. 난 그들에게 충분히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니 온통 고마운 것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어깨너머로 세상을 배웠다. 도둑질도 배우고, 싸우는 법도 배우고, 사람 챙기는 법을 배웠다.

누군가의 기준에서 그들은 악랄하고 염치없고 문란하고 방탕한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사실 그들이 썩 자랑스럽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래도 누가 내게 가족 비슷한 거라도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들뿐이다.

지난날을 돌이키자니 목 뒤에서 울음이 벌컥벌컥 솟구쳤다. 날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로이, 그리고 동료들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난 테렌스가 챙겨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열심히 찍어냈다. 그러던 중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굳이 장례식 예배를 집전해 주겠다고 찾아온 대신전의 사제였다.

셀레스틴.

참 자주 보게 되는 사람이다.

사제는 날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언제나 냉정한 인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온화한 구석도 있는 것 같다.

날 보는 사제의 눈빛에서 나는 또다시 로이를 떠올렸다. 무언가를 한없이 그리워하는 듯한, 그런 애틋한 눈빛이었다.

여기까지 와 주다니 참 고마운 사람이다. 나는 그분께 보답의 의미로 씩 웃어 보였다.

장례식은 조촐히 엄수됐다.

성전 문턱이라곤 한 번도 안 밟아본 단원들도 사제 앞에서 엄숙히 고개를 숙이고 성호를 그었다.

사제는 의식을 마친 뒤 내게로 다가왔다. 난 부은 눈으로 그녀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가끔 이 사제는 날 너무 자세히 관찰하는 듯해서 부담스러웠다. 사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도 눈동자 색이 진한 게 신기했다.

아무튼 이분께도 감사 인사를 해야 했다. 황성에 있어야 할 분이 고생해서 먼길 내려오신 거니까.

“사제님 감사해요. 꽤 높은 분인 것 같은데 저희 단원들 장례식도 치러 주시고. 황태자 전하께서 부탁하셔서 어쩔 수 없으셨겠지만….”

“전하께 부탁받은 적 없습니다.”

“예? 그게 아니면요?”

“고인들이 편안히 쉬길 바랍니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고맙습니다.”

“네? 뭐가 고마우시다는 건지….”

내 물음에 사제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은은한 미소를 띨 뿐이었다.

“사제님, 매번 중요한 시기마다 절 도와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보답해야 할까요? 덕분에 목숨도 건졌고, 죄인 신분에서도 벗어났고….”

“아뇨, 그건 아가씨가 주어진 일을 해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가 구하지 않았어도 형은 집행되지 않았을 거고, 아가씨는 어떻게든 황녀님을 구하러 갔을 겁니다. 전 그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고요.”

하긴, 테렌스가 형장에 레이븐을 보내 두었다고 하긴 했었다. 그 마법사라면 사람 꽁꽁 묶는 데는 일가견이 있으니 집행관과 참관인들을 포박시키고 날 탈출시킬 수도 있었을 테지.

그래도 세이렌의 피리가 가장 나은 선택지긴 했다. 루카스가 날 데리고 빠져나가는 장면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으니까.

“…절 살려주신 건 맞잖아요. 가진 건 없지만 어떻게든 답례를 하고 싶은데요.”

“그냥.”

“네?”

“행복하기만 하세요.”

사제는 덤덤한 목소리로 덕담을 건넸다.

왜일까. 사제의 웃는 얼굴은 눈물범벅인 내 얼굴보다도 더 슬퍼 보였다.

내게 위로를 건넨 사람은 사제였지만, 어쩐지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녀 같았다.

***

장례식을 마치고 두목과 나는 장물아비 요제프를 찾아갔다.

일찍이 손을 털고 지금은 방앗간을 운영하는 아저씨인데, 의뢰 보상품으로 얻은 장물만큼은 감쪽같이 잘 처리해 주곤 했다.

“발레리! 무사했구나! 오, 시에나 여신님. 이게 얼마나 다행인지.”

요제프는 날 보자마자 두 손을 맞잡더니 펄펄 뛰었다. 신앙은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 시에나 여신부터 찾으니 좀 의아했다.

“왜 그래요, 요제프? 내가 죽는 꿈이라도 꿨어요?”

“하아, 널 찾는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있었어.”

그의 말에 두목의 얼굴이 무섭게 그늘졌다.

“요제프, 그자들의 행색이 어땠는지 낱낱이 말해 보게.”

“아, 피어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북부인이 열 명 남짓 찾아왔었네. 억양도, 외모도, 옷도 전부 북부 계통이었어. 발레리의 초상화를 보여주면서 알고 있느냐고 묻더군.”

불길한 예감에 나는 두목과 눈길을 주고받았다.

“요제프, 그래서 안다고 했어요?”

“미안하다. 목에 칼을 들이대는 턱에 그만….”

하아, 볼드윈이 내 정체를 알게 될 줄이야.

일이 이렇게 된 걸 요제프만을 탓할 순 없었다. 아마 여러 곳을 뒤지다 보면 내 정체는 밝혀졌을 것이다. 우리 도적단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후작령에 몇몇 더 있으니까.

“요제프, 그 사람들이 절 찾은 게 언제쯤인데요?”

“글쎄, 3월 하순 정도였던 것 같은데…. 흐흑, 미안하다, 발레리.”

3월 하순이라면 내가 황녀님을 유괴해 이곳 후작령으로 데리고 왔던 시기다. 황궁으로 잡혀 들어갈 당시 황제는 내가 도적단 소속인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때 공작이 알고 폭로한지도 모르겠다.

훌쩍이는 요제프를 뒤로하고, 두목과 나는 말 없이 방앗간을 빠져나왔다.

무도회 때 볼드윈이 날 의심스러워하긴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뒤로 내 정체를 캐고 다녔을 줄은 몰랐다.

하긴 고작 평민 병사가 황녀의 대리인으로 서신까지 읽고, 황태자의 첫 춤 상대까지 됐으니 수상하다고 생각했겠지.

두목은 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발레리, 아무래도 작위 수여식은 좀 미뤄야 할 것 같다. 네 행방이 알려지면 볼드윈의 표적이 될 수 있어.”

“하아, 공작 새끼 그냥 죽여 버리면 안 돼요? 어차피 가택 연금된 거, 밤에 몰래 들어가서 멱을 따 버리면….”

“그건 안 된다, 발레리.”

“뭐가 또 안 되는데요? 두목은 분하지도 않아요? 그 새끼 때문에 단원들 절반이 죽고, 나도 죽을 뻔했는데 가만히 있어야 하냐고요!”

나는 악에 받쳐서 따졌다. 지금 이 판국에 되고 안 되고를 따질 때인가. 난 지금이라도 칼을 들고 그놈의 저택에 잠입할 준비가 돼 있었다.

두목은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선 볼드윈에게 중대한 혐의를 씌워서 재판에 올리려 하셔. 귀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실 생각인 거다.”

“본보기로 먼저 죽이면 되잖아요.”

“사형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합당한 벌을 받을 거다. 발레리, 황궁은 그래도 안전할 거야. 황녀님 모시면서 조용히 지내고 있으렴.”

두목은 아직도 그 고루한 원칙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물건은 훔쳐도 사람의 목숨은 해하지 않는다는.

그건 그렇고… 황궁이 과연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황녀님의 호위기사로 채용됐다는 소문은 황궁에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나와 군 생활을 함께한 동료들은 1년 복무를 채우고 진작에 제대했지만, 내 상관이었던 클린트 하사와 근위대 장교들이 내 특진 소식을 알고 있었다.

병사시절 내 면접관이었던 장교—날 황태자궁에 배치한 장본인—는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라벤더궁에 배치됐으니 이왕이면 잘 해보라며,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갔었다.

이미 내 근황은 공작의 귀에 들어가 있을지도 몰랐다.

가택 연금된 후에도 남의 영지에서 사병을 부리던 놈이니, 황궁에 사람을 보내서 날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좋다고 두 다리 뻗고 지내고 있었다.

오금이 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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