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그래, 나는 황녀님의 조언대로 정말 진심을 다해 해명했다.
소문의 진원지인 라벤더궁 하녀들부터 공략했다. 하녀들의 검술 강습 시간을 틈타서 의혹을 열렬히 부정했다.
“레티샤, 제인, 캐시. 오늘 수업 시작하기 전에 확실히 해 둘게요.”
“무얼요?”
“저는 게일 님과 아무 사이 아니에요. 그분은 제 방에 한 발짝도 들어온 적 없고요. 앞으로도 아무 사이 아닐 거예요.”
나는 목검을 한 손에 들고 엄숙하게 말했다. 황녀님께 충성 맹세를 할 때 보다 더 진지한 얼굴로.
“에헤이, 뭘 변명까지 해요. 남녀가 서로 좋으면 하룻밤 정도는 보낼 수 있지 뭘.”
“…그런 적 없어요, 레티샤. 제발 헛소문은 내지 말아 주세요. 스토커도 처리해 드렸는데 은혜를 이렇게 갚으시면 안 되잖아요. 그쵸?”
“저희는 전해 듣기만 했지 소문을 내진 않았어요. 근데 발레리아나 경은 소년미 있는 남자를 좋아하나 봐요. 게일 마법사님은 뭐랄까, 수줍은 피터팬 같잖아요.”
“…그런 취향 아니에요, 제인.”
“이상해요, 경. 둘이 분수대 앞에서 꽁냥대는 걸 제가 똑똑히 봤는데 왜 자꾸 아니라고 그래요?”
“아니니까요. 캐시, 그건 게일 님이 일방—”
…적으로 날 짝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면 게일의 꼴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흐음, 알았어요. 경이 아니라면 아닌 거겠죠, 뭐.”
젠장.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라벤더궁 사람들은 날 믿어주지 않았다. 다들 본능적으로 아는 걸까? 내가 이 나라 황실을 1년이나 속인 도적 출신 황녀 납치 미수범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선임 기사인 그레이 경은 출근길 계단에서 마주치자마자 시비를 걸어왔다.
“야, 발레리. 너 게일 먹고 버렸다며.”
“네? 뭘 먹고 버려요?”
나는 게일이라는 이름의 음식이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넓고 안 먹어본 음식은 많을 테니.
근데 난 그런 걸 먹어본 기억이 없는데.
“게일 걔가 요즘 기운도 없고 축 늘어져서는 정신을 못 차리잖아. 듣자 하니 네가 기력만 쪽 빨아먹고 버려서 그런 거였어.”
“…그분 기력을 제가 왜 빨아먹어요?”
젠장. 음식 얘기가 아니었나 보다.
“비실비실하니 밤일도 못하게 생긴 걸 뭐 좋다고 꼬셔서는. 혹시 마법이라도 써서 기분 좋게 해 주디?”
와, 뭐라는 거야?
손이 칼자루에 올라붙을 뻔했다. 이딴 개소리를 끝까지 들어준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이 인간 귀족 출신 기사 맞나? 양아치 루카스보다 입버릇이 저급한데.
“입 닥쳐요, 그레이 경. 그거 후배 성희롱인 거 아시죠? 그리고 안 잤다고요! 아오!”
“와아, 너 선배 치겠다? 거 농담 좀 한 걸 가지고….”
“그딴 말도 농담이라고 하세요? 하나도 재미없는데요.”
“아이고, 뉘에뉘에. 후배님 무서워서 말도 못 걸겠네. 분부대로 난 닥치고 물러갈게!”
제가 잘못한 건 아는지 그레이 경은 달아나듯 내 시야를 벗어났다.
뒤통수에 대고 쌍욕을 박아주려다 참았다.
설마 선배한테 좀 개겼다고 황녀님이 날 자르진 않겠지. 라벤더궁 인사권은 황녀님께서 쥐고 계시니 말이다.
다음 날엔 서무실에서 근무 일지를 더듬더듬 작성하고 있는데 로저 경이 말을 걸어왔다.
“그, 저기. 발레리 경. 미들턴 백작가에선 별말 없나?”
“미들턴 백작가가 어디… 아 게일 님네 가문이구나. 거기가 왜요?”
“가문 쪽에서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말야. 이런 소문이 나면 여자 쪽이 손해잖아. 이참에 그냥 시집 가서—”
“아오! 로저 경도 왜 그러세요?! 안 잤다고요 진짜아아아!”
한동안 나와 거리를 두던 켄드릭도 어이가 없어서 내게 말을 먼저 걸 정도였다.
“발레리, 도대체 왜 게일이랑 소문이 났어? 차라리 나라면 모를까.”
“몰라, 젠장. 혀 깨물고 싶다. 아니라는데 아무도 안 믿어줘. 근데 게일 님은 왜 요즘 안 보이지? 부정도 쌍방이 해야 좀 믿어줄 텐데.”
“음, 게일 일주일 병가 냈어. 이거 가지고도 얘기가 또 만들어졌더라. 너랑 하룻밤 보낸 뒤에 무참히 버림받아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나 뭐라나.”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창밖의 하늘이 노란색으로 물드는 것만 같았다.
“…세상은 왜 이렇게 지랄이 풍년인 걸까?”
“축하해, 발레리. 라벤더궁 공식 난봉꾼이 된 걸. 하녀들에 이어 황태자랑 연하의 마법사까지 사로잡았네. 이제 기사인 나까지 꼬시면 4관왕인가?”
빠악.
팔꿈치로 명치를 시원하게 가격해 줬다. 흠씬 얻어맞고 싶다고 돌려 돌려 말하니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밤에 테렌스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사건의 원흉인 그는 고개를 푹 떨어뜨리며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내 불찰이야. 동료와 그런 추문이 날 줄은 몰랐다.”
“후, 그러게 왜 쓸데없이 존댓말로 이상한 쪽지를 써 놔요? 다들 신나서 나만 보면 놀리려고 난리란 말이에요.”
“결과는 내가 책임지겠다.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자는 내게 고발해. 필요하다면 게일을 다른 곳에 발령낼 수 있어.”
테렌스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본인이 잘못한 건 알고 책임을 지려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럴 것까진 없어요. 어차피 애인 있는 건 알릴 생각이었으니까. 이렇게 떠들썩하게 알려질 줄은 몰랐지만요.”
“하, 아무래도 청문회를 열어야겠어. 적어도 내 여자가 난봉꾼이라는 오명은 벗겨야지.”
나는 당황했다. 이 인간, 지금 여론전에 정면으로 나서겠다는 건가. 별것도 아닌 헛소문 가지고.
“청문회라뇨. 라벤더궁 고용인들 다 불러놓고 게일이랑 같이 ‘우리 안 잤습니다’ 선언하고 질문까지 받으라고요?”
“그냥 나랑 잤다고 해. 실제로 너랑 자고 나서 버림받은 건 나 아닌가?”
“…….”
이 인간은 왜 예고도 없이 정곡을 찌르고 난리일까.
이 사람을 버리고 떠나던 날 밤이 떠올라 입을 꾹 다물었다. 바늘 같은 죄책감이 가슴 한구석을 꿰뚫고 지나갔다.
“…이걸로라도 널 잡고 싶어서 꽤나 애썼던 것 같은데.”
그가 본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홀린 듯 다가가 입술을 문질렀다.
나는 왜 이 사람의 벗은 몸만 보면 부나방처럼 달려들게 되는 걸까. 그날 이 인간을 방에 안 들이고 황태자궁으로 돌려보냈다면 이 사달은 없었을 텐데.
나는 되지도 않는 후회를 하며 그의 속살을 입에 머금었다.
***
라벤더궁 기사 생활은 이전보다 왁자해졌다. ‘난봉꾼 여기사 발레리아나 경’이라는 오명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불리면서 지내기로 했다.
해명을 포기하니 편했다. 나만 결백하면 됐다는 생각으로 무슨 소문이 나든 한 귀로 흘렸다.
어차피 뭔 말을 해도 안 믿으니 기력을 낭비하지 않기로 한 거다. 내가 반응이 없으니 얘기가 좀 잦아드는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좀 웃긴다. 고작 남자 동료 한 명이랑 잤다는 소문 하나로 ‘난봉꾼’이라는 칭호가 붙었다는 게.
내가 여자라서 난봉꾼 자격 기준이 낮은 걸까? 남자들은 난봉꾼 소리 들으려면 루카스 정도는 돼야 할 텐데 말이다. 걘 일주일에 두세 번씩 하룻밤 상대를 갈아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다.
그놈에 비하면 난 정말 사생활이 깨끗한 편이다. 23년 평생 자본 남자라곤 테렌스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 같은 일편단심 민들레에게 난봉꾼이라니 어폐가 심하다.
“발레리아나 경, 다음에는 누굴 침실로 들일 건가요?”
오늘 출근하자마자 하녀 레티샤에게 받은 질문이다. 나는 이제 헛소문을 농담으로 받아칠 만큼의 여유도 생겼다.
“글쎄요. 황태자 전하 정도는 돼야겠죠?”
“푸하핫! 경은 농담도 참 재밌게 해.”
“진짠데요. 제가 눈이 좀 높거든요.”
“하핫, 알았어요 알았어. 응원할게요!”
오로지 진실만으로 이뤄진 농담이었지만 레티샤는 내 등짝을 치면서 까르르 웃었다.
난잡한(?) 사생활이 까발려지니 유명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내게 별 관심이 없던 라벤더궁 시녀들—콧대 높은 귀족가 영애들이다—도 이젠 날 보면 한마디씩 했다.
“발레리아나 경, 평민 출신이라 연애관이 개방적인가 봐요. 다 좋은데 켄드릭 경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요. 내가 콕 찍었거든요.”
예, 바라던 바입니다. 하루빨리 그놈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저따위는 잊게 해 주세요.
“미들턴 백작가 꽤 알부자 가문인데, 왜 굳이 마다해요? 게일 마법사님 정말 그렇게 못해요? 아니면 거기가 별로인가?”
글쎄요, 게일 님의 거시기는 제가 본 적이 없네요.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난들 어떻게 압니까? 백번 양보해서 안다고 쳐요. 근데 그걸 왜 레이디께 말해야 할까요?
좀 귀찮긴 했지만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의외로 유쾌한 일이었다.
범죄자로서 신분을 속이고 있던 작년과는 감회가 달랐다. 그땐 이름이 알려지는 게 거북하기만 했는데, 이젠 슥 지나가기만 해도 호기심 어린 시선이 모이는 게 왠지 우쭐한 기분까지 든다.
지금은 라벤더궁에서만 유명 인사지만, 다음 달쯤 내 이름은 전국구로 알려지게 된다. 황제로부터 공식적으로 기사 작위를 받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새로 작위를 받는 사람은 칼레반 타임스에 초상화와 함께 프로필이 실린다. 전국적으로 신상이 알려진다는 거다.
뭐, 나는 이제 당당하게 새 신분을 하사받았으니 세간의 관심을 좀 즐겨 볼까 싶다. 황태자와 황녀의 탁월한 안목으로 발탁된 칼레바니아 최초의 여자 기사로서.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으나 이름 팔리는 건 너무 부담스럽고 싫다. 황녀님께 “신문에만큼은 안 나오고 싶다”고 간절히 호소했으나 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기사 월봉 받으려면 이 정도 유명세는 감수해야죠. 기사 작위 받는 사람이 신문에 실리는 건 백 년도 넘게 이어진 관례예요.
똑똑똑.
퇴근하자마자 한숨을 푹푹 쉬고 있는데 누가 찾아왔다.
“누구세요?”
“나다, 발레리.”
문을 열자마자 눈이 확 부셔서 움찔했다. 빡빡 깎인 두목의 머리가 창밖의 저녁놀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아, 두목, 아니 아버지 오셨어요.”
난 이제 두목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젠 도적도 아니고, 호적상으로도 진짜 양아버지긴 하니까.
“쉬고 있었구나. 다름이 아니고 애들 묘비가 완성됐다고 한다. 고맙게도 대신전의 사제님 한 분이 동행해 주시기로 해서, 장례식도 번듯하게 치를 수 있을 것 같아.”
반가운 소식이었다. 죽은 동료들을 제대로 추모할 수 있게 되었다니.
“…이제 마음 편히 보내줄 수 있겠네요. 범인은 알아볼 것도 없이 볼드윈 공작 맞죠?”
“그럴 가능성이 크긴 한데, 후작령에 가는 김에 직접 증언을 수집해 보려고 해. 같이 한번 다녀 보자.”
“네, 그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