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화
“발레리.”
“엉?”
“오늘 즐거웠어. 먼저 만나자고 해 줘서 고마워.”
“고마울 게 뭐가 있어? 술 한잔하는 게 뭐 대수라고.”
나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타이밍을 쟀다.
아마 지금 말하는 게 좋겠지?
“으음… 나, 나 할 말 있어.”
“응? 뭔데 말을 더듬어?”
켄드릭의 천연한 얼굴을 보자니 왠지 입을 열기가 버거웠다. 나는 바짝바짝 타는 입을 우물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꺼내기 어려운 말이야? 발레리, 돈 필요해?”
“아니.”
“그럼 뭔데. 말해 봐.”
나도 빨리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꿀 덩어리를 한 움큼 집어삼킨 것처럼 목청이 잠겼다. 아니 대체 왜? 못할 말도 아닌데? 스스로가 답답했다. 가슴을 치고 싶을 정도로.
켄드릭은 머뭇거리는 날 보며 어딘가 목마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문득 나는 오른손이 그에게 잡혀있는 걸 깨달았다.
“발레리, 그럼 내 할 말 먼저 할게.”
“…….”
“너랑 입 맞췄던 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나. 너 나한테 키스 못한다고 구박했었잖아.”
“…어?”
그때 얘기가 대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나는 켄드릭에게 잡힌 손을 얼른 빼냈다. 그러자 별안간 내 어깨에 커다란 손이 툭 얹혔다.
“한 번만… 키스해봐도 돼? 나 혼자 연습 많이 했는데. 명예회복 좀 시켜줘.”
“취했냐? 갑자기 웬 망발이야. 싫어.”
나는 어깨에 붙은 그의 손을 거칠게 떼어냈다.
켄드릭은 풀죽은 얼굴로 내게서 반 발짝 물러섰다.
“…미안. 이번엔 내가 실수한 것 같네.”
그가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나는 그에게서 얼굴을 살짝 돌렸다.
실수는 무슨. 오히려 실수를 한 건 내 쪽이었다. 이렇게 막바지에 와서야 이놈의 속내를 알아버렸으니.
돌이켜 보니 이유야 뻔했다. 이 녀석이 왜 그 요란한 식당을 예약했는지. 왜 그 비싼 돈을 내고 날 대접하려 했는지. 왜 내 주변을 맴도는 게일을 신경 쓰는 듯이 말했는지.
착잡했다. 말할 기회를 놓친 대가는 참혹했다. 벼랑 끝까지 그를 밀고 가서 어깨를 떠미는 기분이었다. 얘는 대체 왜 날 아직도….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켄드릭.”
“응, 발레리.”
“나 그 사람 좋아해.”
“…….”
“누군지 말 안 할게. 네가 아는 사람이니까.”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야?”
“응, 나 황태자 전하랑 만나. 서로 좋아하는 사이야.”
할 말을 다 뱉고 나서야 켄드릭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다. 깊은 녹안이 여리게 진동하고 있었다. 눈가에 물기가 점점 들어찼다.
아 제발, 제발 울지 마.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의 얼굴에선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하아, 발레리. 내가 축하해 주길 바라? 그래서 말하는 거야?”
“…아니, 넌 나랑 제일 친한 사람이니까. 이런 일은 먼저 말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어.”
켄드릭은 제 뺨에 흐른 눈물을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난 차라리 그가 날 원망하거나 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너, 그럼 황태자비가 될 생각인 거야?”
“아니.”
“…그럼 그 사람 정부가 되겠다는 거야?”
그가 고개를 저으며 내게 물었다. 슬픈 건지, 화가 난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정부.
한때 나는 그 단어에 알레르기가 있었다. 켄드릭의 전 약혼녀에게도, 에이바 볼드윈 공녀에게도 같은 오해를 산 적이 있기 때문이다.
—너, 발레리라고 했었지. 프레이저 후작가에 정부로 들어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정부가 되더라도, 정식으로 지위를 인정받는 일은 없을 거야.
그땐 완강히 부정했었다. 상대가 켄드릭이든 테렌스든 누군가의 비공식 연인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어쩌면 내게 딱 맞는 위치인지도 모르겠다.
지난날의 과오와 현재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모르겠어.”
마침내 입에서 튀어나간 대답이었다.
나는 테렌스를 사랑한다. 그래도 그와 연인 이상의 관계가 되는 건 아직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제 그는 내게 아이를 먼저 낳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계획에 없던 생명까지 끌어들이면서 그의 곁에 서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발레리, 제발 다시 생각해. 난 절대 축하 못해.”
“축하받을 생각으로 한 말 아니야. 그냥 사실을 말한 거야.”
“그래, 네가 그 남자랑 서로 좋아한다고 쳐. 그럼 그 남자가… 다른 여자랑 결혼해서 애 낳고 오순도순 사는 꼴 볼 수 있어?”
“…….”
“그것도 뒷배경 빵빵한 귀족 가문 영애나 이웃 나라 공주랑. 그런 본부인 있는 남자의 그림자 속에서 평생 살 자신 있냐고. 네가 사생아라도 낳는다면 그 여자가 널 가만히 놔둘까?”
켄드릭은 맹렬한 기세로 내게 따져 물었다.
……테렌스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상상.
안 해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상상은 오래 이어지진 못하고 늘 빠르게 걷혔다. 내 정신력이 견디질 못해서.
다정하고 세심한 그 사람이, 나 말고 다른 여자와 가정을 꾸리고 아이까지 낳는다면….
아, X같네.
결론을 생각하기도 전에 눈시울이 화끈거렸다. 확 젖어 든 눈가를 얼른 훔쳐냈다.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우린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마주 보며 울고 있다.
와락.
어깨에 두 팔이 감겼다.
켄드릭이 나를 품에 끌어당겨 안아버렸다.
“발레리. 난 너 하나만 보고 지금까지 왔어. 어리석게 한눈팔았지만, 마음만큼은 늘 널 향했어. 그때 실수 더 이상 반복 안 할 거야. 내 옆자리는 오롯이 너만을 위해—”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일단 밀어내려고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스릉.
가까운 어딘가에서 차가운 금속음이 들렸다.
칼 뽑는 소리였다.
“떨어져.”
굵직한 음성이 복도에 낮게 깔렸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나는 여전히 켄드릭의 품에 속박된 채 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테렌스였다.
그가 켄드릭의 뒷덜미에 칼끝을 들이밀고 있었다. 기시감이 엄습했다. 내 목도 이렇게 그의 칼날 앞에 놓인 적이 있었으니까.
내 몸을 감싸던 켄드릭의 팔이 스르르 풀렸다. 켄드릭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목 뒤에 칼을 들이댄 사람이 누군지, 목소리만 듣고도 알아챈 듯했다.
“떨어지라고 했을 텐데.”
얼른 나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아마 켄드릭에게 한 말이겠지만 내가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켄드릭은 그저 우뚝 서 있었다. 한쪽 이마에 핏대가 툭 불거져 있다. 온 힘을 다해 화를 억누르는 게 보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가 천천히 뒤를 돌며 테렌스에게 인사했다. 꼭꼭 짓씹는 발음에서 분노가 묻어났다.
테렌스는 그를 고깝게 쳐다보며 검을 검집에 꽂았다.
동시에 경고했다.
“내 연인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
“…….”
“듣자 하니 착각이 심한 것 같아 한마디 하지.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할 일은 없다. 아이를 낳을 일은 더더욱 없고.”
켄드릭의 눈이 가늘어졌다.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발레리를 정비로 맞이하시겠다는 겁니까?”
“발레리가 허락만 한다면 그럴 거다. 우리 관계는 경이 멋대로 상상하면서 함부로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다.”
“…….”
“더 할 말 없으면 자리 좀 비켜주지. 나는 내 연인과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서. 발레리, 네 방에 들어가도 괜찮겠나?”
솔직히 당황했다. 테렌스가 내 방 앞까지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밤의 밀회 장소는 언제나 황태자궁이었기에.
나는 두리번거리며 복도의 인적을 확인한 뒤 대답했다.
“…그러세요.”
그리고 난 켄드릭 쪽을 보며 작별인사를 했다.
“켄드릭, 오늘 즐거웠어. 잘 들어가.”
말을 맺자마자 나는 뒤를 돌아 문을 땄다. 궁지에 몰린 켄드릭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 단호해야 했다.
덜컥.
드디어 방이다.
테렌스는 나를 따라 들어오자마자 문을 굳게 잠갔다. 손동작이 거칠었다. 일부러 들으란 듯이 소리를 낸 것 같았다.
“저자와 입을 맞췄다고.”
“…처음부터 다 들었어요?”
“언제 그런 발칙한 실수를 저질렀지?”
테렌스가 엄지로 내 입술을 꾸욱 문지르며 물었다. 누르는 힘이 너무 강했다. 입술에 그의 지문이 찍힐 것 같았다.
“아윽, 입술 터지겠네.”
“얼른 말해. 나 미치는 꼴 보기 전에.”
나는 고개를 들어 테렌스의 눈을 쳐다봤다. 얼음처럼 투명한 눈동자에 선득한 광기가 흘렀다. 가히 위압적이었다.
“9월 초중순…? 건국제 기간에요.”
바른대로 고하지 않았다간 왠지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냇가 사건을 제외하면 위협 같은 건 한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이럴 땐 정말 무서웠다.
“그렇다면 무도회 전?”
“네… 우리 안 만날 때예요.”
사귀기 전이니 눈감아 달라고 말해도 될까, 눈치를 봐선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테렌스는 내 턱끝을 살포시 잡고 위로 들어 올렸다. 아직도 살벌한 눈빛에 괜히 흠칫했다. 지하세계 동굴에서 본 그 지옥 불이 떠올라서.
“저자랑은 아무것도 없다면서.”
“없어요. 제가 싫다고 거절하는 것도 들으셨잖아요.”
“너는 마음에 없는 자와… 하, 그래. 넌 내가 마음에 없을 때도 나와 입 맞췄었지.”
그가 슬프게 조소했다. 나는 그에게 턱을 잡힌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뭐가 아닌데.”
“마음에 없지 않았어요. 마음에 있는 사람이 입 맞추니까 받아들인 거고요. 어제 말했잖아요. 이 흉터 생겼을 때 이미 좋아하고 있었다고.”
나는 내 오른뺨에 있는 흉터를 가리키며 해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쟤랑 사고 친 날엔 술 먹고 완전히 인사불성이었어요. 머리끝까지 취한 상태였는데 어둡기까지 해서, 당신인 줄 알고….”
“나인 줄 알고…?”
“네, 자기인 줄 착각했어요. 미안해요.”
나는 눈을 휘면서 어색하게 애칭을 섞었다. 간지러움을 참는 건 고역이었지만 다 끝난 문제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
사과 한마디에 테렌스의 얼굴이 점차 녹았다. 드디어 그가 내 턱을 풀어주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과할 건 없어. 그땐 나와 연인도 아니었는데, 굳이 네가 그 사건을 내게 말할 필요는 없었겠지.”
이때를 틈타 나는 그의 몸통을 꼭 끌어안고 등판을 쓸었다.
“테렌스, 내가 거절하는 거 봤잖아요. 왜 거절했겠어. 알잖아요.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야.”
쪽, 쪽, 볼에 입도 맞췄다. 얼른 보조개가 패는 걸 보고 싶었다.
“…더 말해줘.”
“사랑해요.”
“얼마나.”
“내가 나 자신이기를 부정하고 싶었을 만큼. 차라리 내가 진짜 발레리 로빈슨이어서, 죄책감 없이 당신 곁에 남길 바랐을 만큼.”
그의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읊어 주자, 테렌스의 입가에 내가 기다리던 꽃이 피어났다.
이럴 때 보면 참 단순한 사람이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또 어린아이를 보았다.
테렌스는 이제야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못난 모습 보여 미안해. 하지만 난 저자가 너무 신경 쓰여 미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