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화
켄드릭은 상당히 낯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일단 어깨까지 오던 긴 머리가 짧게 쳐져 있었다. 한쪽 머리는 포마드를 발라 옆으로 넘겼다.
“…너 머리가 왜 그래?”
“곧 여름이잖아. 어때, 잘 어울려?”
며칠 뒤면 6월이긴 하다. 그런데 고작 여름이 온다고 10년 넘게 유지하던 장발을 싹둑 하다니. 조금 의아했다. 더운 날에는 단정히 잘 묶고 다녔으면서 말이다.
“음, 안 어울리진 않는데 뭔가 허전하고 어색하네.”
“그래? 별로야…?”
켄드릭은 머쓱한지 뒷덜미를 문질렀다. 본인도 짧은 머리가 어색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복장도 평소와 달랐다. 오늘 분명 휴무였을 텐데, 크라바트까지 꽉 졸라매고 위에는 꽤 그럴듯한 재킷까지 걸쳤다.
“아니, 머리 좀 잘랐다고 잘난 인물이 어디 가겠냐. 근데 옷은 또 왜 그렇게 본격적이야?”
“왜? 혹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냥 어디 결혼식이라도 다녀오나 해서 그러지.”
“평일에 무슨 결혼식이야. 넌 근무 끝나고 바로 왔나 보네. 제복 차림인 거 보니까.”
켄드릭이 내 행색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어. 옷 갈아입기 귀찮아서.”
“…그래. 배고프지? 일단 식사부터 할까? 괜찮은 데 예약해 뒀어.”
이게 무슨 소린가 해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식사 장소를 본인이 예약했다는 건가. 분명 먼저 만나자고 제안한 건 나였는데…?
“예약을 왜 해? 나 그냥 아무 데나 가려고 했는데.”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켄드릭은 내 손목을 꼭 붙잡았다.
“아무 데나 가는 건 내가 싫어. 일곱 시 다 돼 간다. 얼른 가자.”
나는 꼼짝없이 그의 경쾌한 발걸음을 뒤따랐다.
이놈은 대체 왜 이렇게 들떠있는 건지 모르겠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라고 생각했다.
도착한 곳은 웬 요란뻑적지근한 레스토랑이었다.
나는 간판 앞에 멀거니 서서 상호부터 읽었다. S로 시작하긴 하는데… 심각하게 꼬부랑거리는 필기체라 눈에 잘 안 들어왔다.
에이, 알 게 뭐야. 오늘 이후로 다신 안 올 것 같은데.
문을 열고 건물 안에 들어갔다. 거울처럼 매끄럽게 닦인 대리석 바닥이 우릴 반겼다. 층고도 높았다. 홀 한가운데 달린 샹들리에는 중앙궁 그랜드볼룸에 달린 걸 4분의 1 크기로 축소해놓은 것 같았다. 참 부담스럽게 휘황찬란하다는 뜻이다.
테이블 사이의 간격도 매우 넓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열 명 남짓한 음악단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건너 테이블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종업원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광택이 흐르는 감색 조끼에 붉은 나비넥타이 차림이었다.
손님들도 하나같이 말쑥하게 빼입고 있었다. 켄드릭이 왜 이런 복장을 하고 왔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나는 평상복으로 안 갈아입고 나온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암적색 기사 제복이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비싸고 그럴듯한 옷이니까.
음, 생각해 보니 작년 무도회 때 입었던 드레스가 옷장에 있긴 했다. 작년 무도회 날 황태자궁 침실에 벗어두고 온 그 크림색 드레스인데, 테렌스가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 돌려주었다. 깨끗이 세탁돼 있긴 하지만 한 번도 입은 적은 없다.
여긴 그걸 입고 왔었어야 그나마 어울릴 장소였다.
댕.
켄드릭이 입구의 종을 울렸다. 콧수염이 북슬북슬한 남자 종업원이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아, 켄드릭 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창가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종업원은 켄드릭과 나를 번갈아 보며 번드르르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안내받은 자리는 명당이었다. 활짝 열린 창 너머로 뒤뜰의 장미 정원이 내보였다. 저녁노을 아래 무성하게 핀 장미에는 따스한 붉은 기가 흘렀다.
내가 바깥을 구경하는 동안 켄드릭은 종업원에게 주문을 넣었다. 무슨무슨 코스를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음식 이름 같긴 한데,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단어가 연달아 나왔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미디움 웰던… 고기 굽기였다.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 예산을 초과할까 봐서. 나는 종업원이 물러가자마자 켄드릭에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야, 나 300갈렌 갖고 나왔는데 여기 이걸로 되냐?”
“300갈렌이면 코스 1인분 값이네.”
“미친! 이런 데 올 거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그래야 돈을 더 갖고 나오든 했을 거 아냐!”
울컥 짜증이 났다.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이렇게 비싼 데를 오다니. 이런 반칙이 있나.
오늘은 당연히 내가 사려고 했다. 내가 먼저 시간을 내 달라고 한 거고, 또 얘한테는 진 빚이 어마어마하게 많으니까.
그리고….
다소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오늘 만남의 목적은 그에게 시원하게 털어놓는 것이다. 테렌스와 나는 연인 관계라고.
그건 그렇고 1인분에 300갈렌이라니. 나는 그냥 아무 펍에나 들어가서 돼지 바비큐와 감자튀김을 시키고 브랜디 한 병을 딸 생각이었다. 보통 그렇게 먹으면 아무리 많이 나와도 200갈렌을 좀 넘는 정도인데….
“발레리, 부담 갖지 마. 오늘은 내가 사려고 했어.”
“왜 네가 사? 내가 사야지! 아, 안 되겠다. 당장 주문 취소해야—”
내가 의자에서 궁둥이를 떼자, 켄드릭이 얼른 내 어깨를 꾹 눌러 다시 앉혔다.
“발레리, 여기 와인이 정말 맛있어. 코스 구성도 좋고. 내가 먹고 싶어서 온 거니까 너도 같이 맛있게 먹어 줘. 부탁할게.”
퍽 간곡한 말투였다.
이놈은 내가 부탁에 약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사실 여기서 식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난 이제 얘한테 얻어먹고 다닐 처지가 아니니까. 이래 봬도 황궁 기사다. 나 먹을 음식값쯤은 부담할 수 있다.
“하, 그럼 내 몫은 내가 낸다. 여기 300갈렌.”
나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 켄드릭에게 내밀었다. 그는 처음엔 됐다며 거절했으나, 내 성화를 이기지는 못했다.
켄드릭의 말대로 이곳의 음식 맛은 끝내줬다. 나는 막입이라 웬만큼 맛있으면 잘 먹지만 여긴 진짜였다. 지난겨울 테렌스의 부모님, 그러니까 황제 부부랑 중앙궁에서 만찬을 했을 때도 이 정도로 맛있진 않았다.
그땐 자리가 불편해서 맛을 잘 못 느낀 것도 있었겠지만.
고기로 말할 것 같으면 육질이 매우 보들보들하고 촉촉했다. 무슨 공법으로 만들었댔는데… 수비… 뭐였지. 아무튼 엄청난 맛이었다. 음미하는 동안 켄드릭이 하는 말을 간간이 귓등으로 흘려 넘길 정도로.
“음, 테이블 매너가 많이 점잖아졌네. 황녀님한테 배운 거 안 잊어버렸구나.”
“…….”
“발레리, 내 말 듣고 있어?”
“엉? 방금 뭐라고 했어?”
“…아니야.”
디저트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해바라기 모양의 레몬 타르트가 나왔다. 크러스트는 바삭하고 고소한 버터향이 났으며 커스터드 크림 안에 싱싱한 레몬 과육이 콕콕 박혀 있었다.
“이야, 여기 황태자궁 주방보다 요리 잘한다.”
나는 입술에 붙은 부스러기를 냅킨으로 슥 닦아냈다. 아주 흡족스러웠다. 300갈렌을 내는 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휴, 다행이다. 너 진짜 정신없이 먹기만 하는 것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고마워, 켄드릭. 이런 데 알려 줘서.”
“아직 고맙다기엔 일러. 이제부터가 진짜거든.”
그가 말을 맺자마자 종업원이 다가와 디저트 접시를 치웠다.
빈 테이블에는 와인 한 병과 함께 온갖 종류의 치즈를 얹은 나무 플레이트가 서빙됐다.
켄드릭은 유리잔을 내밀며 건배를 제의했다.
챙—.
맑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우린 첫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크으, 술맛도 장난 아니네. 근데 300갈렌에 술값도 포함이야?”
켄드릭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마셔. 너 여기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앞으로 자주 올까?”
“자주까진 됐고 가끔 오자. 아무리 맛있어도 정도란 게 있잖아. 월급쟁이한테 한 끼에 300갈렌은 좀 과하지.”
“그래. 근데 발레리, 요즘 게일이랑은 별일 없어?”
“게일? 그 마법사는 왜?”
“자꾸 집적거리는 것 같아서. 너한테 말 한마디라도 더 붙이고 싶어서 아주 전전긍긍하던데.”
게일은 라벤더궁에서 함께 황녀님을 호위하게 된 직장 동료다. 요즘 내게 부쩍 말을 많이 걸었다. 그래봤자 대화 주제는 별 거 없었지만.
—발레리 경, 잘 잤어요? 먹구름이 잔뜩 꼈는데, 오늘은 실외 말고 실내 연무장에서 수업하는 게 좋을 거예요.
—오늘 식당의 아침 메뉴는 아주 보들보들한 오믈렛이었어요. 발레리 경도 좋아하죠?
—황녀님께서 요즘 조금 지루해하시는 것 같아요. 가끔은 같이 나가서 바람 좀 쐬어 주세요.
날씨나 식당 메뉴, 황녀님의 근황 이야기 정도였으니까.
일전에 내게 호감을 보인 적이 있는 사람이긴 하다. 그래도 단칼에 거절한 뒤에는 더 내게 접근하지 않았다. 다시 만나 직장 동료가 된 이후엔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먼저 사근사근 말을 걸어주니 나도 마음 놓고 편히 대했다.
“집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마법사랑은 시시콜콜한 얘기밖에 안 해. 또래 직장 동료끼리 대화 주제는 뻔하지.”
“흠, 너랑 호위 순번 겹치는 날에만 30분 먼저 일찍 출근하는 건 이유가 다 있지 않을까.”
“엉? 나랑 겹치는 날에만 그래? 그냥 성실한 사람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내 말에 켄드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흔들었다.
“…게일은 석실 문지기 시절에도 밥 먹듯이 지각하던 덜렁이야. 지금도 나랑 겹칠 땐 자주 늦어. 성실하고는 거리가 먼 작자라고.”
에이, 설마.
나한테 말 붙이자고 30분 먼저 출근하는 게 말이 되나.
“야, 사람이 가끔 일찍 나오고 싶을 때도 있는 거지. 이상한 오해 하지 마.”
“흠,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우리는 와인 한 병을 금방 다 마셨다. 켄드릭이 한 병 더 시키려고 손을 들자 얼른 말렸다. 얘랑은 사고를 친 전적이 있으니 취할 때까지 마시는 건 금물이었다.
켄드릭은 음식값을 치르자마자 황궁으로 같이 돌아가자고 했다.
“아, 기사 휴게실에 뭘 두고 왔네. 겸사겸사 너 바래다주지 뭐.”
“…제 물건은 야무지게 잘 챙기는 놈이 라벤더궁에 뭘 두고 왔는데?”
“글쎄. 내 마음?”
“오오, 다시 황녀님이랑 잘해 보는 거야?”
내 물음에 켄드릭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아니. 형님이 한눈에 반해서 청혼까지 한 분이랑 어떻게 사귀어.”
아 맞다. 얘네 둘째 형이 황녀님께 구혼장을 넣었다가 거절당했었지.
켄드릭이 황녀님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둘째 형과의 관계가 다소 미묘해질 것 같긴 하다.
“발레리, 황녀님은 이제 나한테 관심 없으셔. 너도 보면 알잖아.”
“흠,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지.”
우리는 평소처럼 농담을 따 먹고 말장난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보니 라벤더궁까지는 금방이었다. 얘는 날 따라 계단을 올라 3층의 방문 앞까지 왔다.
그리고 나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테렌스와의 관계를 털어놓지 못했다.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하다 보니 제일 중요한 게 뒷전으로 떠내려가 버렸다.
이놈의 기억력을 진짜.
나는 방문 앞에 켄드릭과 마주 섰다. 몇 시간을 같이 떠들다 보니 짧아진 머리가 적응되는 것도 같았다.
음, 어떻게 화두를 던져야 매끄럽게 본론으로 갈 수 있을까.
“발레리.”
선수를 놓쳤다. 켄드릭이 살짝 입맛을 다시며 먼저 내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