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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58)화 (158/173)

외전 5화

황제는 두목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네가 그 아가씨를 황궁에 들여보내지 않았더라면, 프리다가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을 수 있겠지. 어쩌면 지금 이 행복은 모든 게 맞물려 나온 결과인지도 모르겠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황제는 우리의 만행을 결과론적 관점에서 해석해 주었다. 황녀님이 지하세계에서 해방돼 안전히 돌아왔다는 사실 그 자체에 의의를 두겠다면서.

그래도 여전히 두목은 죄인이었다. 감옥에서 나왔다 해도 사형수나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며 피의 맹세를 했기 때문이다. 황제를 배신하면 심장이 멎어 끽하고 죽는다.

난 피의 맹세를 어긴 오벨론이 고통 속에 죽어가던 장면을 떠올렸다. 두목이 황제를 배신할 리가 있겠냐마는 그렇게 추하게 죽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어휴, 진짜. 그런 맹세를 왜 하셨어요. 마왕 놈이 그거 어겨서 죽는 걸 내가 똑똑히 봤는데.”

“발레리, 내가 맹세를 안 했다면 황궁 동문 밖에 걸린 건 진짜 내 목이었을 거다. 지금까지 목숨이 붙은 것도 폐하의 은혜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황제에 대한 두목의 충성심은 웬만해선 꺾일 것 같지 않았다.

아, 나도 황녀님에 대한 충성심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출근한 지 일주일째인 바로 지금 당장이 걱정이다.

테렌스와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들켜 버렸으니까. 지금 떠올려 봐도 황녀님은 내게 잔뜩 실망한 기색이셨다.

하아, 내일 황녀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까.

***

똑똑.

키스 장면을 걸린 바로 다음 날.

나는 땀에 젖은 손을 꽉 틀어쥐고 황녀님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곧 시침이 아홉 시를 가리킨다. 검술 수업을 시작할 시간이다.

“…발레리?”

“네, 저예요. 수업 준비되셨을까요?”

황녀님은 여전히 내게 검술 수업을 받고 있었다. 목표를 이미 달성하셨는데도 배움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건국제 무술대회라도 출전하실 기세였다.

덕분에 나는 기사 급료에 검술 수강료까지 얹어서 월봉을 넉넉히 받게 됐다.

당장 오늘 잘릴 위기에 처해 있긴 하지만….

“잠깐만요, 발레리. 곧 나갈게요.”

문 너머로 황녀님의 대답이 들렸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가라앉아 있었다.

아직 화가 안 풀리셨겠지. 그래, 안 풀리는 게 당연한 일이야.

벌컥.

문틈 벌어지는 소리에 괜히 어깨가 움찔 떨렸다.

황녀님은 평소처럼 흰 셔츠에 리넨 바지 차림이었다.

검술 수업이 있으나 없으나 황녀님은 늘 이렇게 입고 다녔다. 와이어 숲으로 출정하기 전에 드레스와 장신구 따위를 모두 팔아 기부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황후 폐하가 주문한 새 드레스와 패물 상자가 도착했지만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안 입던 걸 입으니 불편하다고. 나중에 행사 있을 때나 입겠다고.

아무렴 어떤가. 황녀님은 뭘 입어도 흐뭇하니 보기 좋다.

지금은 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계시지만.

나는 이마에 난 식은땀을 훔치며 황녀님께 씩 웃어 보였다.

“…하하, 오늘은 날씨가 참 맑아요. 간밤에는 잘 주무셨을까요?”

“글쎄요. 그럭저럭 잘 잔 것 같아요.”

“아하하, 다행이에요.”

“늦게 일어나서 아침을 못 먹었는데, 우리 식당부터 갈래요?”

“네, 네! 저도 아침을 부실하게 먹어서 영양보충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사실 내 팔뚝만 한 바게트를 집어먹고 나왔지만 황녀님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다. 나는 잰걸음으로 황녀님을 뒤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안도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런 대역죄인과 함께 식사를 해 주시다니. 무한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단서가 많았더라고요. 내가 눈치가 없었던 거였어요.”

황녀님이 나이프로 닭날개를 썰면서 말했다. 닭의 뼈마디가 우지끈 끊기는 소리가 났다. 괜히 내 관절이 아픈 기분이었다.

“네? 단서라뇨?”

“발레리가 오빠랑 사귄다는 정황이요. 오빠 신붓감 찾는 다과회 한다고 했을 때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그거 언제 하느냐고 물어봤잖아요. 내가 오빠 험담했을 때 발레리가 오빠 편들어 주기도 했고요.”

“아하하, 제가 그랬었…죠.”

“하아, 이제 발레리 앞에서 오빠 욕 못하겠다.”

“아뇨아뇨, 하세요! 마음껏 하세요! 저 그런 거 일러바치는 사람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때도 발레리가 기분 나빠했던 것 같아요. 내가 오빠 얼굴 말고 매력 없다고 했을 때.”

사실이었다. 난 그때 상당히 언짢았다. 티가 나긴 했을 것이다. 나도 스스로 내 언사에 놀랐으니까.

“하하, 제가 그랬었나요….”

“아 맞다, 그럼 그것도 오빠랑 한 거예요?”

“뭘요?”

“키스요.”

“커헉.”

씹어 넘긴 고기가 목구멍에 걸렸다. 난 옆에 놓인 물컵을 집어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황녀님은 날 측은하게 바라봤다.

“…발레리는 참 거짓말에 소질이 없어.”

“죄송합니다.”

“흠, 나한테 키스해 본 적 있냐고 물었던 건 한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혹시 오빠랑 사귀기 전에 키스부터 했어요?”

콜록콜록.

사레가 들렸다. 왜 자꾸 정곡을 찌르시는 걸까.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대답 안 해도 돼요. 어차피 발레리는 얼굴에 다 드러나니까.”

나는 냅킨으로 이마와 목덜미를 닦았다. 방금 마신 물이 전부 땀으로 삐져나오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실망했어요. 반년이면 너무 오래 숨긴 거 아니에요? 그때 우리 후작령으로 외출했을 때, 내가 오빠 얘기했는데 별 반응도 없었잖아요.”

“아아…. 그땐 헤어져 있었으니까요. 제가 테렌스한테 나쁜 짓을 하기도 했고요.”

“이제 이름으로 부르는구나. 그러니까 왠지 나보다 더 친한 것 같아 보여서 질투 나네요.”

이젠 막 눈앞이 팽팽 돌았다.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황녀님, 이렇게 짓궂게 밀어붙일 줄도 아는 분이셨나요.

“하으, 정말 죄송해요.”

“사실 죄송할 것까진 없는데, 너무너무 이해가 안 가요.”

“…네? 뭐가요?”

“대체 오빠가 어디가 좋아요? 그 재미없는 인간이 정말 매력이 있어요?”

황녀님은 테렌스를 아주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이 부분은 불편했다. 테렌스가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이지만 여동생을 얼마나 아끼는데….

“매력 있어요. 그러니까 만나죠.”

“잘생긴 거 말고요.”

“음….”

재미있어요.

네, 침대 위에서 말이에요.

나는 어젯밤의 정사를 떠올렸다. 평소에는 금욕주의자처럼 단추란 단추는 다 채우고 다니는 인간이, 밤만 되면 짐승이 돼서 내게 달려들었다.

그 간극에서 나오는 매력에 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우월한 신체조건을 타고났는데 체력도 뛰어나고—체력은 나도 좋지만— 기술적인 노력까지 하는 인간에게 무슨 수로 안 넘어가겠나.

다만 이런 속내를 차마 황녀님 앞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난 마귀에 쓰인 게 틀림없었다. 왜 자꾸 그쪽으로밖에 생각이 안 나는 걸까.

벌써부터 아래가 축축해지는 느낌이었다. 

하, 그건 그렇고 뭐라고 둘러대야 적당할까.

“음, 매사에 정성을 다 하세요. 하하…!”

언제나 그는 내 몸 구석구석을 탐미하다가 내가 연체동물처럼 흐물거릴 때쯤에야 조금씩 밀고 들어왔다. 움직이는 것도 더럽게 천천히 해서 새까맣게 애가 탈 때가 많았다.

몇 번 짜증을 냈더니 좀 속도가 빨라지긴 했다. 어제는 정말 환상이었는데…… 아무튼 여러모로 심장 건강에 위협이 되는 인간이었다.

“정성? 오빠가 뭘 허투루 하는 성격은 아니긴 하죠…. 근데 발레리,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요?”

그야 음란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양쪽 손등을 귀밑에 대고 온도를 식혔다. 아침 댓바람부터 음습한 회상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 버릴 줄이야. 

똑똑.

마침 식당 문을 누가 두들겼다. 덕분에 시뻘건 망상 속에서 금방 벗어날 수 있었다.

“데비, 밖에 누구 왔어?”

“네, 황녀 전하. 켄드릭 경입니다.”

황녀님의 전속 시녀 데비의 목소리였다.

“들어오라 해.”

문이 열리고 켄드릭이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 주간 호위 당번은 이 녀석이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연무장에 안 계시기에 이리로 왔는데, 발레리와 식사 중이셨군요.”

“이제 다 먹었어요. 발레리도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요?”

“아, 네.”

나는 일찍이 접시를 비운 상태였다.

이제 검술 수업을 하러 가야 한다. 앞서가는 황녀님을 따라 식당 문을 나서려는데, 마침 켄드릭에게 할 말이 떠올랐다.

아마 얘한테도 사실대로 털어놔야겠지.

테렌스와의 관계를.

황제 부부까지 알고 있으니 소문은 삽시간에 퍼질 수 있다. 다른 경로로 알게 된다면 얘도 내게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내 입으로 먼저 말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 같았다.

……설마 얘가 아직도 날 좋아할 리는 없겠지.

“발레리, 왜 얼굴이 빨개? 아침부터 반주했어?”

켄드릭이 내 낯빛을 살피며 물었다. 음탕한 생각에서 비롯된 붉은 기가 아직 안 가셨나 보다.

“미쳤다고 수업 전에 술을 마시냐. 근데 너… 내일 저녁에 시간 있어?”

“내일 저녁? 따로 약속은 없는데. 왜?”

“나랑 술 한잔하자.”

연애 사실을 맨정신으로 털어놓긴 솔직히 좀 부끄러웠다. 술기운을 조금만 빌리고 싶었다. 이전에 술 먹고 낸 접촉 사고가 떠올라 좀 찝찝하지만, 그땐 정말 인사불성이었으니까.

맥주 두어 잔 정도면 괜찮겠지.

“…정말? 발레리, 너 지금 나한테 먼저 술 마시자고 한 거야?”

“어. 싫어?”

“그럴 리가. 나야 너무 좋지.”

글쎄, 너무 좋을 것까지야 있나.

날 응시하는 켄드릭의 눈에 반짝, 하고 빛이 돌았다. 무언가를 기대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맥주보다는 좀 비싼 술을 사줘야 할 것 같다.

***

켄드릭과의 약속 당일.

나는 라벤더궁에서 퇴근하자마자 옷도 안 갈아입고 바로 약속장소로 나갔다.

만나기로 한 곳은 황성 시내 입구의 시계탑 아래.

가만히 팔짱을 끼고 서서 사람 구경을 하자니, 자연히 작년의 맥주 축제가 떠올랐다.

테렌스와 처음 데이트했던 바로 그날 말이다. 그때도 약속장소가 여기였다.

사실 그땐 그게 데이트인 줄도 몰랐다. 테렌스는 축제 시찰 가는 데 호위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댔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냥 날 꼬시려는 개수작이었지만.

전략은 상당히 유효했다. 함께 있는 동안 내 신경은 점점 테렌스에게 쏠렸다. 심장의 이상 반응도 감지했고, 그의 체온이 궁금해지기에 이르렀다. 나는 발칙하게도 그에게 포옹을 요구했다.

테렌스는 내게 그 이상을 선물했다.

첫 입맞춤이었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1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짜릿함을 떠올리면 두 뺨이 화끈거릴 정도로 가슴이 벌떡댄다.

“발레리, 늦어서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뒤에서 들린 켄드릭의 목소리에 바로 회상이 걷혔다. 나는 뒤를 돌아 그에게 인사하려 했다.

뭐지?

나는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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