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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55)화 (155/173)

외전 2화

“하아, 그냥 내가 훔쳐 갔다고 하면 되지. 뭘 또 나랑 만나는 사이였다고 털어놓기까지 했어요?”

“네게 없는 죄를 어떻게 뒤집어씌우겠어. 이제는 너와의 관계를 숨기기 싫다. 다른 여자와 결혼 얘기가 나오는 것도 꺼려지고.”

“에휴, 안 봐도 다 그려지네. 그분들 엄청 싫어하셨죠?”

테렌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내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 말을 아끼는 모양인데, 난 무슨 말이 나와도 상관없었다.

그분들이 날 꺼리는 건 당연하다. 나라도 그랬을 거니까.

죄인 신분에서 벗어났다 해도 죄가 씻긴 건 아니었다. 그분들이 날 정식으로 용서한 것도 아니었다.

황녀님을 무사히 구출해서 돌아왔으니, 내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을 뿐.

무엇보다 나는 근본이 없다. 일 년도 더 된 얘기긴 한데, 냇가에서 체포당해 법정에 섰을 때 테렌스가 썼던 표현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 근본 없는 자에게 가문의 검술을 가르쳤다 이건가.

틀린 말이 아니라서 화가 나지 않았다. 정말로 근본이 없는 걸 어떡하나. 난 정말 내가 어디서 뚝 떨어졌는지 모른다. 누가 날 만들고 낳았는지 아무런 단서가 없으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정식으로 신분을 얻고, 무려 기사로 지위가 상승한 건 순전히 황녀님의 황소 같은 고집 덕이었다.

테렌스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싫어하진 않으셨다. 결혼에 반대하긴 하셨지만.”

“참나, 싫으니까 반대하지. 좋으면 반대했겠어요?”

“너와 만나는 것 자체는 반대하지 않으셨어. 결혼도, 어떻게든 설득할 거다.”

테렌스는 기어이 날 끌어안고 내 이마에 입술을 문질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간지러움을 참았다.

이 사람은 재회한 이후 줄곧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나와의 결혼이 무슨 일생일대의 목표라도 되는 양.

이해할 수 없었다. 정작 나는 그런 걸 바란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말이다.

“무슨 설득을 해요? 나는 댁이랑 결혼한다고 한 적 없는데요.”

괜히 역정이 나서 가슴을 밀어낸 뒤 고개를 홱 틀었다.

“…발레리.”

테렌스의 힘 빠진 목소리가 내 뒤통수를 간질였다.

“당신 부모님도 그렇고 황녀님조차 우리 사이 안 반기잖아요. 지금 이대로가 얼마나 좋아요? 낮에 가끔 이렇게 보고, 밤마다 침대에서 질펀하게 뒹굴면 됐지. 낮에 만나는 건 이제… 자제해야겠지만요.”

난 여전히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대꾸했다.

오늘은 정말 큰 교훈을 얻었다. 한낮의 연애는 달콤한 만큼 위험했다.

분명 키스하기 전에 나름대로 주변을 살폈다. 북쪽 성벽에 접해 있는 라벤더궁 후문 쪽은 공간이 아주 협소하고 인적은 채플만큼이나 드물다. 가끔 정원사들이나 오갔지, 사람보다 토끼가 더 많은 수준이었다.

황녀님께서 어떻게 인기척을 느끼고 다가오셨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었다.

테렌스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아마 잠깐 짬 내서 온 걸 테니 필시 황태자궁으로 돌아갈 시간이 됐을 것이다.

“…나머지 대화는 이따 밤에 하자.”

“미리 경고하는데 아랫도리로 때우려고 하지 마요.”

나는 뒤돌아 그를 노려봤다.

그가 피식 웃었다. 약간의 비웃음이 섞여 있어서 더 언짢아졌다.

“발레리, 그렇다고 안 할 건 아니잖아.”

“…….”

테렌스는 날 너무 잘 알았다. 우습게도 나는 침대 위에서 참 쉽게 무너졌다.

“안 그런가, 자기?”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황제 부부한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25년 전에 사람이 아니라 순 여우 새끼를 낳으셨다고.

***

밤이 들고 황태자궁 뒤뜰에 핀 나팔꽃이 수그러졌다.

나는 담장을 가뿐히 넘어 착지한 뒤 몸을 푹 숙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인적이 없는 걸 확인하고 곧바로 황태자궁 벽을 등반했다. 1층 창틀, 건물 외벽에 붙은 사자 얼굴 장식, 2층 창틀을 차례차례 밟아 올랐다. 이젠 너무 익숙해져서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동작이었다.

좀 놀라게 해 줄 요량으로 창문을 팍 밀쳐 열었다.

“나 왔어요.”

뭐지?

아무 대답이 없다. 드넓은 방이 텅 비어 있었다.

숨바꼭질하자는 건가, 싶었는데 그런 장난을 칠 작자는 아니고.

침대 위를 보니 뭐가 있긴 하다.

흰 셔츠였다. 옆에는 작은 쪽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입고 집무실로」

집무실? 자정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일하고 있는 건가.

그건 그렇고 늦봄이라 더워 죽겠는데 옷을 왜 더 껴입으라는 걸까… 라고 생각하다가 번쩍하고 무언가가 떠올랐다.

똑똑.

복도에 누가 있을세라 아주 작게 문을 두드렸다.

“열려 있다.”

테렌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돌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책상 쪽을 봤는데 주인은 없고 코끼리 인형만 덩그러니 놓였다.

“나 여기 있는데.”

내가 찾던 사람은 긴 소파 한쪽에 앉아 팔걸이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방금 다 마무리 했… 왜 바지를 안 입었지?”

날 위아래로 훑는 테렌스의 눈빛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나는 맨몸에 그의 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었다. 길이가 길어서 가릴 덴 다 가려졌다. 바지는 안 입은 게 아니라 그의 침실에 벗어놓고 온 거다. 이유를 물으신다면 이렇게 대답하련다.

“셔츠 입고 오라면서요.”

“셔츠만 입고 오라는 건 아니었는데….”

“다시 가서 바지 입고 올까요?”

“아니. 여기 누워라.”

제 무릎을 탁탁 치며 테렌스는 묘하게 웃음 지었다. 입가에 보조개가 깊이 팬 게, 내 차림새에 꽤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무릎에 누워 방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벽난로 위에 있는 액자가 바뀐 것 같다.

주황색 장미꽃과 흰색 장미꽃을 말려서 만든 압화였다.

“저 꽃이 든 액자는 뭐예요?”

“…기억 안 나는 건가. 작년 맥주 축제 때 네가 걸어준 꽃목걸이인데.”

“저게 그때 그 장미라고요? 그 꽃이 여태 남아 있었어요?”

“네게 처음 받은 선물이잖아. 제일 오래 보관할 방법을 찾다가 저렇게 만들었지.”

테렌스가 내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간지러워서 어깨를 움츠렸다. 림보 대회 상품으로 받은 저 목걸이는 내가 하고 다니기 거추장스러워서 걸어준 거였다. 딱히 선물이라는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그걸 저렇게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니. 뭐랄까…. 참 예기치 못한 부분에서 감성적인 인간이다.

“발레리. 저걸 걸다가 문득 궁금한 게 하나 생겼는데.”

“네, 뭔데요?”

“너는 날 언제부터 좋아했지?”

음….

정말 뜬금없고 어려운 질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난 정말 오랫동안 내 감정을 부정했었다. 신분을 속이고 있었고, 황궁에 들어온 목적도 불순했기에. 내 안에 그가 뿌리내리는 과정을 계속 외면하기만 했던 것 같다.

당시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은 시점은 있었다. 내 얼굴에 흉터가 생긴 그날. 황녀님과 이 사람의 얼굴을 겹쳐 보다가 오른뺨을 칼에 베였었다.

“…기억 안 나는 건가?”

내 침묵이 꽤 길었나 보다. 테렌스가 내 눈치를 살피는 걸 보니.

톡톡. 나는 내 오른뺨을 검지로 두 번 두드렸다.

“이 흉터 생긴 날. 그때 자각했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거.”

“…음? 생각보다 꽤 이른 시점인데.”

“황녀님 얼굴에 자꾸 그쪽 얼굴이 겹쳐 보여서, 수업에 집중을 못 했거든요. 방심한 순간 칼에 베인 거죠.”

“음, 그날 네 안색이 안 좋았던 기억이 난다. 밥도 안 먹고 방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었는데…. 심경이 많이 복잡했나?”

“네. 끌려서는 안 될 사람한테 자꾸 마음을 뺏기고 있었으니까요.”

“아, 나 때문에 생긴 흉터라는 게 그런 말이었군.”

테렌스는 내 오른뺨을 잡고 엄지로 흉터를 쓸어내렸다. 입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볼 때마다 마음 아픈 흔적이었는데, 이젠 사랑스럽기만 하다.”

이게 바로 이 인간의 특기다. 진지한 얼굴로 낯간지러운 말 하기. 가끔은 본인의 말이 얼마나 느끼한지 짐작조차 못하는 것 같다.

……많이 듣다 보니 적응돼서 괜찮긴 하지만.

“테렌스, 나도 궁금한 거 있어요.”

“물어봐. 뭐든.”

“나랑 언제부터 자고 싶었어요? 처음 키스한 날?”

나는 테렌스의 무릎 위에서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좀 노골적인 질문이었는지 그의 귓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너와 처음으로 밤을 같이 보낸 날이었지.”

“응? 무도회 날 말이에요? 그전에 이미 저랑 물고 빨고 했잖아요.”

“아니, 그날 말고.”

“아, 생각났다! 나 여기서 자고 간 날.”

공교롭게도 우리는 그날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래, 내가 소나기를 쫄딱 맞고 푹 젖어서 이곳에 보고하러 왔던 날 말이다.

당시 테렌스는 벽난로 앞에서 잠든 내게 이렇게 무릎베개를 해 주었다.

“맞아. 그날 네가 지금처럼 내 무릎 위에서 자고 갔었지.”

“그때도 이렇게 자기 셔츠 입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거 입고 오란 게, 그때 분위기 내려고 한 거예요?”

“맞아.”

테렌스가 아주 당당하게 제 의도를 인정했다. 이 옷을 입고 오라는 말에 야한 의도가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튼 발칙한 남자였다.

“흠, 내가 무릎에서 자고 있을 때… 무슨 상상 했어요?”

“맞춰봐.”

“말해 뭐해요. 야한 상상 했겠지. 와, 순수한 저한테 몹쓸 생각을 참 일찍도 품으셨네요.”

테렌스는 피식 웃었다.

“네가 자꾸 내 물건에 얼굴을 치대는데, 안 세우고 배기나?”

“네에? 제가 그랬다고요?”

깜짝 놀랐다. 내가 잠결에 그런 짓을 했다니.

나는 그의 무릎을 벤 채 고개를 돌려, 그의 중심부가 얼마나 가까운지 확인했다.

아. 한 뼘 거리였다. 내 잠버릇이라면 저기에 얼굴이 닿는 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아찔했겠네요. 그래서 무슨 상상을 하셨죠?”

쪽.

그가 고개를 내려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곧이어 그의 손길이 내 턱선을 쓸고, 귀밑의 여린 살과 목 언저리를 어루만지다가 셔츠 단추를 하나, 둘, 세 개까지 풀었다.

긴 손가락이 얇은 천을 비집고 들어와 빗장뼈를 따라 섬세한 직선을 그렸다. 소중한 것을 탐미하는 듯한 손길에 기분 좋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단추가 네 개, 이제 다섯 개째 풀렸다. 그의 서늘한 손바닥이 내 속살을 부드럽게 감싸며 짓눌렀다.

민감한 부분이 살살 문질러지자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하읏.”

테렌스는 움찔거리는 나를 지켜보며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짓궂은 손장난에 온 신경이 첨탑처럼 뾰족해졌다. 나는 소리를 참으려고 입술을 꾹 눌러 닫으며 그의 눈동자를 올려다봤다. 파란 눈이 이렇게까지 뜨거워 보일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점점 내려오던 그의 손은 옆구리를 거쳐 내 허리의 곡선을 매끄럽게 쓸었다. 이제 여섯 번째 단추를 풀고 복근 위의 균열들을 꼼꼼하게 덧그렸다.

“상상 속에서 별거 다 했네요? 흠, 실제로 손 안 댄 거 맞아요?”

“…허락 없이 자는 사람 몸을 더듬진 않아. 짐승도 아니고.”

짐승이 아니라면서 복근의 중심선을 따라 손이 점점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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