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외전 1부
발레리의 새로운 일상
우리는 현행범으로 붙잡혔다.
라벤더궁 후문에서 테렌스와 입 맞추는 장면을 고스란히 발각당했다.
그것도 무려 황녀님께.
가벼운 입맞춤이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운이 나빴다. 내가 인기척을 느낀 시점은 이미 테렌스의 아랫입술을 쪼옥 빨아당기던 순간이었다.
자세 또한 망측했다. 테렌스의 왼손은 내 허리와 골반 사이의 애매한 지점에 걸쳐져 있었다. 그나마 최악의 시점까지는 아닐지도 모른다. 테렌스의 손은 내 엉덩이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미끄러지고 있었으니까.
아무튼 딱 걸렸다.
우리는 어정쩡한 자세로 얼어붙었다. 그야말로 빼도 박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 잠깐 나 좀 봐.”
황녀님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명령한 뒤 라벤더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린 그 냉랭한 뒷모습을 꼼짝없이 뒤따랐다.
테렌스와 내가 끌려온 장소는 2층 응접실이었다.
황녀님은 우리를 맞은편 소파에 앉혀두고 한참 말이 없었다. 먹구름처럼 우중충한 침묵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무거운 적막에 어깨가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그새 벽시계 분침이 여러 번 돌았다. 가히 영겁처럼 느껴지는 공백이었다.
“…두 사람, 언제부터 만난 거예요?”
드디어 정적이 깨졌다. 황녀님은 우리를 찬찬히 번갈아 보았다. 시선은 더없이 차분하고 건조했다.
모골이 송연했다. 한동안 자유를 만끽하며 행복에 겨워하던 분이 이렇게까지 정색하는 모습을 보자니.
황녀님은 화가 나면 냉정하고 침착해지는 분이다. 메이벨 여관에서 내 정체를 고백했을 때도 얼핏 비슷한 얼굴을 하고 계셨던 것 같다.
황녀님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아마 배신감이겠지. 그때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와중에 테렌스는 내 손을 잡고 조몰락대고 있었다. 여동생의 불편한 심기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 나는 황녀님의 눈치를 보며 손을 확 빼버렸다. 이 남자 입술을 빨다가 걸린 마당에 친밀한 모습을 계속 과시하고 싶진 않았다.
테렌스는 황당하다는 듯 나를 빤히 응시하다 황녀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프리다, 많이 놀랐겠지. 네게 곧 말하려 했다. 숨기려던 건 아니고.”
“언제부터인지나 말해, 얼른.”
황녀님은 오라비를 향해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작년 9월.”
“아뇨, 2주 됐어요.”
나는 테렌스의 대답을 잽싸게 부정했다.
작년 9월부터라니. 어이가 없었다. 연애 기간에 대한 셈법이 이렇게 다를 줄이야.
나는 과거의 우리가 완전한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가짜 신분을 뒤집어쓴 채 모두를 속이고 있었으니까.
내 기준에서 테렌스와의 진짜 연인 관계는 최근에야 시작됐다. 황녀님을 데리고 이곳 황궁에 돌아와 재회한 그날 밤. 그러니까 딱 2주 전이다.
“뭐야…? 발레리, 왜 오빠랑 말이 다른 거예요?”
황녀님의 고운 눈썹이 물결쳤다. 짜증이 나신 게 분명하다.
작년 9월부터면 거의 여덟 달이다. 8개월과 2주의 차이는 상당하다. 이 오차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내 말은 거짓이 된다.
“아 그게, 음, 중간에 헤어져서 그런 건데요….”
미치겠다. 뭐든 그럴듯한 말을 덧붙여야 설득력이 생길 것 같은데.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고 턱관절이 녹슨 듯 삐걱댔다. 평소엔 잘만 떠드는 주둥이가 이런 순간만큼은 제 기능을 못 했다.
테렌스는 날 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내 발언이 명백한 오답이라는 듯이.
“발레리, 우린 작년 9월 무도회 날 연인 관계를 맺지 않았나?”
“3월에 헤어졌잖아요. 그동안 제가 신분을 속이고 있기도 했고요.”
“아니, 난 한 번도 헤어졌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난 이별에 합의한 적 없다. 그리고, 가짜 신분이었다고 연애가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테렌스가 내게 따지듯 반박했다.
하, 이 인간은 갑자기 왜 이럴까. 지금 황녀님을 앞에 두고 말다툼이라도 하자는 건가.
그의 말을 끊어낸 건 황녀님이었다.
“시끄러워, 오빠. 무도회 때부터 3월까지면 그래도 반년은 만난 거네. 둘 사이, 또 누가 알고 있어요?”
황녀님이 내 쪽을 향해 물었다.
난 속으로 머릿수를 셌다. 일단 테렌스 밑에 있는 초록 마법사가 아는 눈치다. 그 작자는 나랑 마주칠 때마다 실눈을 뜨고 실실 쪼개곤 했다. 우리 사이를 모른다면 그럴 리가 없지.
그리고….
에이바 볼드윈 공녀도 알고 있다. 지난겨울 그 밀실 술집에서 내가 깽판 치는 걸 두 눈 똑똑히 봤으니. 하, 그때만 생각하면 아주 그냥 자다가도 벌떡증이 난다.
아무튼 두 명 정도로 추려졌다.
그래, 딱 두 명밖에 없다고 대답을 하려는데….
“부모님도 아신다.”
뭐?
테렌스가 나도 처음 아는 사실을 아주 담담히 꺼냈다.
와, 나는 정말 몰랐다.
언제 불었냐 이 인간아. 우리 사이 비밀로 하자던 약속은 어디로 내팽개쳤냐고.
“…나, 참. 그분들이 어떻게 알아요?”
나는 뒷덜미가 빳빳하게 굳는 기분을 느끼며 테렌스에게 물었다.
황제 부부까지 알면 벌써 네 명이다. 이 인간의 부모님까지 아는 이상 더는 비밀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말씀드렸어. 먼저 상의하지 않아서 미안하다, 발레리.”
테렌스는 내게 사과했다. 반성하는 기색이긴 한데….
방금 그의 말이 황녀님의 화를 더 돋운 것 같았다.
“어머니 아버지도 아는 걸 내가 몰랐다는 거야? 발레리는… 내 사람인데?”
아.
정신이 번쩍 드는 말이었다.
이건 황녀님께 내가 백 번이고 사과해야 하는 일이었다. 무조건 내 잘못이었다.
나는 황녀님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이자, 황녀님의 사람이니까.
“황녀님,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진짜 꼭 말씀드리려고 했었는데…. 이 사람이랑 다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해서….”
난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조아렸다. 댈 핑계라고는 시간 하나밖에 없었다.
“프리다, 네 말에는 어폐가 있다.”
열심히 용서를 구하던 차에 테렌스가 대뜸 끼어들었다. 그것도 아주 삐딱한 태도로.
“…어폐? 그게 무슨 소리야?”
“발레리가 왜 네 사람이지? 냇가에서 처음 발견한 것도 나고, 발탁해서 채용한 사람도 나인데.”
이 인간은 지금 황녀님께 시비를 걸고 있었다. 이 화상아. 지금 여동생 말꼬리 붙잡고 늘어질 상황이니….
“하, 테렌스.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 발레리는 내 밑에 있는 기사고, 내 스승이자 내 친구야. 그럼 당연히 내 사람이지.”
황녀님은 테렌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아니었으면 발레리는 네 스승이자 네 친구가 될 일도 없었을 텐데. 그리고 발레리는 내 여자다. 언젠간 나와 결—”
나는 얼른 테렌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별안간 입이 막힌 테렌스는 흠칫하며 고개를 뒤로 뺐다.
“…왜 입을 막는 거지? 내가 무슨 못할 말이라도 했나?”
네. 안 하느니만도 못할 말을 하셨습니다.
나는 무작정 고개를 흔들며 그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어우, 좀 가만히 좀 있어 봐요! 황녀님 울먹이는 거 안 보여요?’
정말 황녀님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하윽, 나만 바보 됐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하….”
으으, 어떡하지. 목구멍이 아찔하게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난 얼른 황녀님에게 다가가 등에 손을 얹었다.
탁.
황녀님이 내 손을 뿌리쳤다.
이건 정말 심각한 상황이다. 난 테렌스 쪽을 다급히 쳐다봤다. 오라비가 됐으면 뭐라도 좀 해보라고.
내 눈빛을 본 테렌스는 황녀님께 저벅저벅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참으로 무심하고 성의 없는 손동작이었다. 밤새 내 몸을 어루만지던 그 손이 맞나 싶었다.
“미안해, 프리다. 절대 널 속이려고 했던 건 아냐. 그렇다고 대뜸 내가 발레리와 연인 관계라고 밝히면 너도 당황했을 거고…. 아무튼 기회가 없었다.”
테렌스는 나보다도 변명에 소질이 없었다.
아니, 아예 변명할 의지조차 없는 것 같았다.
황녀님은 오라비의 왼손을 더 매몰차게 쳐냈다. 눈가에 가득 고인 물방울들이 유리 파편처럼 날아와 내 가슴에 박혀버릴 것만 같았다.
짙푸른 눈동자가 나와 테렌스를 교대로 훑었다. 난 속이 쓰라려 고개를 숙였다. 빌어먹게도 난 정말 말재간이 없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면목이 없어요.”
“하아… 일단 좋은 일이니 축하할게요. 나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만 가볼게요.”
황녀님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곧장 응접실을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분을 돌려세울 만한 말이 없었다.
아, 망했다.
입이 온몸에 달렸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위로, 사과, 변명…. 난 말로써 무언가를 풀어내는 데엔 왜 이렇게 재주가 없을까.
이러다 라벤더궁 기사 잘리는 거 아닌가. 아직 약식으로 서임식만 치렀지,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작위를 받기 전이었다.
그전에 짐 싸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두목도 황제 밑으로 들어간 마당에, 나가서 뭐 해 먹고 살지. 할 줄 아는 건 도둑질하고 칼질뿐인데. 용병단에라도 들어가야 하나.
이 와중에 밥그릇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게도 환멸이 났다.
휴.
이제 응접실에는 테렌스와 나, 둘만 남았다.
단둘이 남은 지 얼마나 됐다고 테렌스는 바짝 다가와 내 허리에 왼팔을 감았다. 입을 맞추려는지 점점 얼굴이 가까워졌다.
뺨에 입술이 달라붙기 전에 손바닥으로 막아 버렸다.
“아으, 쫌. 이 상황에서 뽀뽀가 하고 싶어요?”
“…부모님께 말씀드린 건 어쩔 수 없었어. 비덴티움 속의 기록을 보셨으니까.”
“갑자기 뭔 비덴티움 얘길 해요?”
“네 손에서 빛나던 그 반지 말인데.”
설마 그 반지 말하는 건가. 내 손에서 한동안 안 빠지던, 지하세계에서 날 지켜준 그 반지 말이다.
그 반지는 테렌스에게 반납한 지 오래였다. 테렌스는 다시 가져가라 했지만 내가 거부했다.
무려 이 나라 건국 황제의 유품이다. 내겐 쓸모를 다한 물건이니 계속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 반지가 왜요?”
“그 반지는 사실… 청혼 용도다. 황태자가 정혼자에게 주는.”
뭐라는 거야.
그럼 그 대단한 반지를 그냥 내 손에 무작정 끼워버렸던 거야? 내가 술집에서 깽판 친 날, 쪽팔려서 울던 나를 달랜답시고?
아무튼 그 반지가 그런 의미심장한 용도라면 황제 부부가 놀랄 만도 했다. 아마 비덴티움 속 기록을 보고 테렌스에게 추궁했을 것이다.
저 계집애가 저 반지를 왜 끼고 있느냐고.
이 남자 성격이라면 있는 그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겠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