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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53)화 (152/173)

153화


황제와 황후는 침실 벽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침실에는 중앙궁 수석 마법사가 들어와 있었다. 그는 발레리의 목걸이에 있던 비덴티움 속에 빛을 쏘아, 기록을 재생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지하세계로 들어가 프리다를 구해오는 과정이 생생하게 보였다.

부부는 한 장면만을 반복해서 돌려보던 참이었다.

발레리가 대리석 궁전 침실에서 바일론을 상대할 때, 반지에서 갑자기 빛이 나오는 그 부분이었다.

“엘리엇, 저 반지. 엘로이스 황제의 반지 맞죠? 왜 저 아가씨가 끼고 있죠? 그리고 갑자기 덮개는 왜 열리는 걸까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건데. 레베카, 당신이 준 거야?”

“그럴 리가요. 난 작년 겨울 때쯤에 테렌스한테 줬는데요. 마음에 드는 여인에게 청혼하라고….”

둘은 서서히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 보았다.

혹시?

설마?

다음 날 이른 아침, 황제 부부는 황태자궁에 기별을 보내 테렌스를 소환했다.

테렌스는 상당히 피곤한 기색으로 부모의 침실에 나아왔다. 기실 어젯밤에 제대로 못 잔 얼굴이었다.

“테렌스. 그 아가씨 기록을 보는데… 그 반지, 왜 그 아가씨한테 있었던 거니?”

황후가 미간을 좁히며 아들에게 물었다. 테렌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제가 줬습니다.”

“아니 그걸 왜 그 아가씨한테….”

황제가 얼이 빠진 채 물었다. 그 반지는 황태자가 아내 될 여인에게 청혼할 때 쓰는 전통 예물이었다. 본인도 황위에 오르기 전, 형수로부터 넘겨받은 이 반지를 아내 레베카에게 끼워준 기억이 있었다.

테렌스는 뒷머리를 긁었다. 이런 상황에서 연애 사실을 밝히게 될 줄은 몰랐다.

“발레리는 제 연인입니다.”

“뭐?”

황제 부부는 말문이 막혔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지난해 9월부터 제 연인이었습니다.”

“테렌스….”

황후는 뒷덜미를 잡았다.

황제는 이마를 짚었다.

“인정하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너…, 너…!”

황제는 오랑우탄처럼 주먹으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어머니, 아버지. 아직 그 아이를 용서하지 않으신 겁니까?”

부모의 충격 받은 반응을 보며 테렌스는 걱정스레 물었다.

“테렌스, 이건 용서의 문제가 아니라….”

황후는 고개를 뒤뚝대며 어지러워했다.

황제는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꾹 눌렀다. 충격적인 소식에 정신이 아득했다.

물론 두 부부는 발레리에 대해 남은 악감정이 없었다.

오히려 미안했다. 딸을 구출해낸 자의 목숨을 끊어놓으려 했던 것만으로.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프리다를 구해온 걸로 그 아가씨는 죗값을 치렀다. 하지만 테렌스….”

“테렌스, 다시 한번만 생각하면 안 되겠니? 그 아가씨는 신분이….”

현실적인 장벽이 존재했으니까. 황제 부부는 귀족 신분이 아닌 며느리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테렌스는 여태까지 여자 보기를 돌같이 했다.

처음엔 소문처럼 남자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고 밝힌 뒤에는, 정말 눈이 너무나도 높아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것도 그런데 하필이면 딸의 검술 선생에게 반해 있었다니.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신분이라면 큰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발레리는 곧 라벤더궁의 전속 기사로 작위를 받을 예정이니까요.”

부모의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테렌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제 의견을 말했다.

황제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런 허울뿐인 작위를 가지고 황태자비 자리가 가당키나 할까 보냐.

“만나는 건 뭐라 하지 않겠지만, 결혼만큼은 안 된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아직 발레리와 결혼을 약속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

황제 부부는 반쯤 풀린 몽롱한 눈으로 아들을 쳐다봤다.

저 화상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평생 그 아이의 연인으로 살 겁니다.”

테렌스는 이 말과 함께 뒤돌아서 방을 나왔다.

***

발레리는 황궁 내 법정 건물 앞에서 초조한 얼굴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오늘, 켄드릭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피오르탑에서 공식 석방된다.

재판이 오늘 열린다는 건 지난밤 테렌스로부터 전해 들었다.

얼핏 의사봉 소리가 들렸다. 조금 지나 법정 문이 묵직한 소릴 내며 열렸다. 발레리는 건물 안을 빼꼼 들여다봤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켄드릭이 혼자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죄수복 차림은 아니었다. 흰 셔츠에 갈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발레리는 손바닥에 맺힌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걱정부터 앞섰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대뜸 사과부터 하면 안 받아주진 않을까.

켄드릭과 마지막으로 본 건 메이벨 여관에서였다.

그곳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당하던 그 순간, 그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실망했겠지.

아니, 실망을 넘어 환멸감이 들었을 것이다.

가짜 신분으로 황궁에서 지낼 수 있었던 건 켄드릭 덕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황녀의 검술 스승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법정에서 즉결 처분을 당했을 수도 있고, 지하 감옥에서 여생을 보냈을 수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켄드릭이 마음을 표현하며 다가올 때마다 매몰차게 거절했었다. 받아줄 수 없었던 상황이긴 했지만 그에겐 분명 상처였을 것이다.

사죄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발레리? 너 맞아?”

발레리는 먼저 말을 걸 기회조차 놓치고 말았다. 켄드릭이 그녀를 먼저 알아보고 다가왔으니까.

“켄드릭….”

“여기서 나 기다린 거야?”

끄덕.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켄드릭은 그녀를 품에 확 끌어안았다. 동시에 발레리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흐으윽….”

“야, 오랜만에 보는데 왜 울어. 얼굴은 또 왜 이렇게 야위었고.”

켄드릭이 포옹을 풀고 발레리의 양 뺨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발레리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흐윽…. 너한테 정말 할 말이 없어.”

“응, 그 사과 받을게. 너 그런 짓 하라고 가짜 신분 만들어준 거 아니니까.”

사과를 받아주는 그의 태도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사과를 받을 준비를 해온 것 같았다.

“…하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나 때문에 네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

“흠, 내 노예 하는 건 어때?”

“…뭐 시킬 건데? 무슨 일이든 할게.”

풉, 켄드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발레리가 장난을 이리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야, 그런 겁먹은 얼굴로 농담을 받으면 어떡해.”

발레리는 이제야 켄드릭의 눈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눈꼬리가 보기 좋게 휘어 있었다.

사람 좋은 미소는 여전했다.

“넌 밸도 없어? 내가 밉지도 않아? 내가 그런 짓을 했는데.”

“…당연히 많이 화났었지. 그래도 네가 죽는 것보단 나은 것 같아서. 단두대에서 네 목 썰리는 상상하니까 끔찍하더라. 황녀님 모시고 잘 살아 돌아왔으면 됐어.”

켄드릭의 투박한 손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속도 없는 놈.”

“응, 나 속없는 거 하루 이틀 아니잖아. 발레리, 나 형님들 보러 영지 내려갔다가 곧 황궁에 복귀할 거야. 방금 판결로 기사 작위도 원래대로 돌려받았거든.”

“정말… 다행이다.”

“아무튼 복귀하고 보자. 그동안 건강히 지내고 있어.”

켄드릭은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떠나갔다. 발레리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깡통처럼 비어 있던 라벤더궁은 다시 사람 사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프리다의 침실은 그녀의 취향대로 산뜻한 하늘색 레이스로 꾸며졌다.

정원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꽃들이 하나둘씩 심겼다.

샐비어, 라벤더, 글라디올러스, 데이지.

석실에 갇혀 지내던 프리다에게, 발레리가 처음 선물했던 꽃들이었다.

프리다는 라벤더궁 1층 테라스에 앉아 산들바람을 쐬었다.

따뜻한 생강차와 달콤한 쿠키를 앞에 두고.

눈을 지그시 감고 햇볕을 쬐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신록의 요정 같았다.

프리다의 머리 위에는 발레리가 손수 만들어준 장미 화관이 얹혀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황녀를 흐뭇하게 지켜보며, 발레리는 라벤더궁을 빠져나왔다. 마침 다음 호위 순번인 마법사 게일이 교대하러 왔기 때문이다.

그 시각 테렌스는 발레리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타리 너머로 테라스가 엿보이는 라벤더궁 후문 옆에서.

연인을 발견한 발레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인적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게 확인됐다. 그녀는 싱그럽게 웃으며 다가와 테렌스의 왼손을 잡았다.

다른 쪽 손으로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홀로 조용히 봄을 만끽하는 프리다의 모습이었다.

“저기 황녀님 좀 보세요. 엄청 행복해 보이시죠.”

“…그러네.”

“석실에 계실 때도 밝으셨지만, 지금은 진짜…. 모든 일에 의욕이 넘치셔서 제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예요. 검술 수련도 더 열심히 하시고….”

프리다는 검술 수련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호위기사이자 친구인 발레리, 그리고 켄드릭과 함께.

그러는 와중에 들어온 구혼장을 거절했다. 켄드릭의 둘째 형인 프레데릭이 보낸 것이었다.

프레데릭은 지하세계에서 깨어나 프리다를 발견하자마자 단단히 반해 있었다. 실종자들을 전부 풀어주는 대신 본인이 마왕비가 되겠다고 자진했을 때, 그 용기에 매료됐다고 했다.

프리다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시집을 갈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대로의 삶이 행복했으므로.

테렌스는 울타리 너머 여동생의 모습을 대충 흘기며 한숨을 삼켰다.

“내 동생 놀아주느라 네가 고생이 많다. 쟨 언제 결혼하려고 저러는지….”

“딱히 안 하실 것 같은데. 자기는 황녀님이 빨리 결혼하길 바라요?”

“그래야 너랑 있을 시간을 쟤한테 덜 뺏길… 자기?”

테렌스는 이제야 인지했다.

발레리가 아주 새롭고도 낯선 호칭으로 저를 불러주고 있었다.

테렌스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연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발레리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다시 한번 말해봐.”

“뭘요? 황녀님 빨리 결혼하길 바라냐고 물었는데.”

“아니, 그거 말고.”

“그거 말고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넌 표현에 박한 경향이 있다.”

테렌스는 냉엄한 말투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삐죽 나온 그의 입술에 발레리는 쪽— 입을 맞췄다.

한 번 더 입을 맞추려는데, 테렌스가 고개를 반대쪽으로 홱 돌려 버렸다.

“뽀뽀로 때우려 하지 마. 난 분명히 들었어. 네가 날 뭐라고 불렀는지.”

“흐으, 귀는 밝아가지고. 유치하게 왜 이래요?”

“…꼭 날 이렇게 구차하게 만들지. 딱 한 마디만 해 주면 될 것을.”

“아으으, 진짜! 알았어요! 알았어!”

발레리는 양 주먹을 말아 쥐고 부르르 떨며 진저리 쳤다.

사실 그녀는 애칭을 고민했었다.

관계는 자꾸 깊어지는데, 호칭이 딱 세 개뿐이었기 때문이다.

테렌스, 그쪽, 당신.

아, 가끔 너라고도 부르는구나.

아무튼 테렌스는 제 이름 외에 다른 호칭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쪽과 당신 둘 다 정 없게 들린다나 뭐라나.

그래서 ‘자기’라고 한 번 불러봤다. 연인 사이에 제일 흔한 애칭인 것 같아서. 시험 삼아 지나가는 식으로 한 번 뱉어봤을 뿐인데…. 테렌스가 이렇게 집착할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서. 왜 입을 안 열지?”

테렌스는 그녀의 입술만을 주의 깊게 응시하고 있다.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결국 발레리는 눈을 꽉 감고 목청을 높였다.

“자… 자기! 자기! 하, 됐어요?”

“무슨 도자기 부르는 것 같군.”

테렌스가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도 그는 만족했다. 발레리는 천천히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도 이제 곧잘 하고.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말을 침대 위에서만 한다는 거다.

테렌스는 발레리를 품에 다시 끌어안고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여름 냄새가 살짝 배어든 봄바람을 맞으며.

아마 이때쯤이었던가.

이 여자를 처음 마음에 품게 된 계절이.

품 안의 발레리가 고개를 든다. 눈을 감으며 입술을 쭉 내민다.

그래. 알았어.

테렌스는 양 볼에 보조개 꽃을 피우며 그녀와 입술을 포갰다.

한낮에 햇살 아래서 입을 맞추는 건 달콤하고 짜릿한 일이었다.

테렌스는 연인의 숨결을 흠뻑 빨아들이며 다짐했다.

조만간 발레리와의 관계를, 여동생에게 사실대로 털어놓겠노라고.

발레리는 내 연인이고, 나와 더 시간을 보내야 하니 놀아달라면서 여가시간 좀 침범하지 말라고.

저벅.

저벅.

누군가가 정원의 잔디를 밟으며 다가왔다.

“뭐지…? 누가 ‘자기’라고 소리 지른 것 같았는데….”

그 누군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테렌스와 발레리는 여전히 키스 삼매경이었다. 귀에 아무것도 들리는 게 없었다.

“…흐억!”

프리다는 까무러칠 듯 어깨를 들썩였다.

이미 그녀는 목격해 버렸다.

방금 퇴근한 제 호위기사가 오라비와 정신없이 입술을 비벼대는 장면을.

그것도 제 처소 후문 옆에서.

문득 인기척을 느낀 발레리는 연인에게서 입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으헉!”

발레리가 기겁하는 소릴 냈다.

“……?”

테렌스도 그쪽을 쳐다봤다.

프리다가 서 있었다.

석고상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두, 둘이… 지금 뭐 하는 거야?”

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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