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밤이 깊었다.
발레리는 지금 황태자궁 침실 창문으로 향하는 벽을 올라타고 있었다.
빌린 물건을 돌려놓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창틀에 걸터앉아 창문이 잠겼는지 확인했다.
“열렸네. 다행이다.”
끼익.
경첩이 미미한 소리를 냈다. 침실에 들어온 발레리는 조용히 창문을 닫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왼손 약지에서 반지를 빼냈다.
프리다를 구출해낸 이후, 이 반지는 거짓말처럼 손가락에서 빠질 수 있게 됐다.
사제 셀레스틴의 말대로였다. 쓰임새를 다한 이후엔 뺄 수 있다고 했었으니.
덮개가 제거된 반지는 이전과는 다른 화려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샛노랗고 영롱한 보석이 박혀있을 줄은 몰랐다.
딱 제 취향이었다. 욕심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 건 아니니까.’
발레리는 테렌스의 머리맡을 향해 슬금슬금 기어갔다.
드르륵.
침대맡에 놓인 협탁의 서랍을 열었다.
발레리는 그 자리에 반지를 고이 집어넣고 서랍을 도로 닫았다.
이제 명목상의 할 일은 끝났다.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린다.
테렌스가 이불을 덮은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발레리는 잠자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아직도 그의 얼굴은 수척했다. 아마 늘 그랬던 것처럼 일에 파묻혀서 지내고 있었겠지. 여동생을 지하세계로 떠나보내고, 부모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테니 혼자 많이 바빴을 게 짐작이 갔다.
그래도 변함없이 잘생긴 얼굴이었다.
한때는 같은 이불을 덮고 옆에 누워 이 모습을 지켜보곤 했었다.
발레리 로빈슨, 그의 비밀 연인이던 시절엔.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괜찮다. 곧 일하게 될 라벤더궁에 그도 가끔 찾아올 테니까. 멀찍이서 얼굴을 보며 설레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의 매끄러운 피부가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났다.
‘한번 만져보고 싶어.’
발레리는 그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탁.
“흐억!”
발레리는 깜짝 놀라 숨을 멈췄다. 테렌스는 깨어 있었다. 지금 그녀의 손목은 그의 손아귀에 꽉 잡혀 있다.
테렌스는 상체를 세워 앉았다. 여전히 발레리의 손목을 잡은 채.
“내 기억까지 훔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네?”
“난 아직 널 용서하지 않았어.”
“저기, 저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고작 트라우마 치료제로 기억을 지울 수 있다 생각한 건 아니겠지.”
트라우마 치료제. 실연에 특효약이었다. 연인의 배신을 알게 됐다거나, 고백했다가 무참히 차였다거나, 그럴 때 생긴 상처들을 잊게 해 주는 효과가 있었으니.
다만 그 효과가 작용하는 범위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작용했다. 특히 복용자의 정신력에 달려 있었다.
이 약은 본디 복용자가 자발적으로 먹도록 설계됐다. 복용자가 아픈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다는 뜻이다. 고로 복용자가 상처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지극히 테렌스의 입장에서, 발레리는 약으로 지우고 싶을 만큼 큰 상처를 준 적이 없었다. 적어도 연인이 된 이후에는.
“아니, 내가 약 먹인 걸 어떻게 알아요?”
“네가 네 입으로 털어놓지 않았나? 내게 약을 먹였다고.”
“헉, 그 기억까지 지워져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엄청 충격적인 말 다다다 쏟아냈는데?”
“충격이긴 했지. 하지만 딱히 나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어. 내가 다른 경로를 통해 네 정체를 알았다면 모르겠지만…. 넌 네 입으로 술술 털어놨잖나? 네가 날 속였다는 사실을.”
“아, 뭐 그렇지만….”
발레리는 그때 자신의 발언을 떠올렸다. 약 먹이고 나서 할 말 못 할 말 다 뱉어낸 것 같은데. 그게 상처가 안 됐다니.
생각보다 이 남자는 단단한 사람이었나 보다.
“물론 배신감은 들었지.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화도 났고. 특히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내 기억을 지우려 했다는 게 미웠다.”
“…네. 그러셨을 거예요.”
“하지만 상처로 남진 않았다. 전후좌우 사정을 더 파악해야 상처를 받든 말든 하지. 뭘 더 묻기도 전에 넌 날 약으로 재워 버렸으니까.”
“하, 그 약 정신력이 강하면 안 통하는 거였나.”
테렌스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신력이 강하다기보단… 정말 모르겠나? 네가 한 말이 상처가 되지 않은 이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당신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도 아니고.”
“얼른 기억해 내는 게 좋을 텐데. 이별 통보하면서 나한테 했던 말.”
발레리는 입을 꾹 다물고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었지.
분명 무슨 말을 하면서 몸을 치댔던 것 같은데….
—사랑해, 테렌스.
—사랑해.
“끄아아악!”
발레리는 괴성을 질렀다. 이제야 모든 게 기억이 난다.
“기억났나? 그래. 사형 전날 감옥에서도 했던 말이니, 기억 못 하면 안 되지.”
“아…. 감옥에서도…. 내가 그랬었죠….”
그동안 하도 정신이 없다 보니 망각하고 있었다.
테렌스에게 사랑을 고백했었다는 사실을.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발레리는 초점을 잃은 채 멍하니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지금 테렌스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그나저나, 발레리. 넌 내가 고백하며 했던 말을 잊은 건가?”
“네? 무슨 말을 하셨었죠…?”
“널 선택한 대가와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했잖아.”
선명하고 또렷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손목을 감싸 쥐고 있던 테렌스의 손이 오른뺨으로 옮겨졌다. 발레리는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한 촉감에 눈을 감았다.
이러고 있자니 기억이 난다. 테렌스가 무도회 날 발코니에서 했던 말들이.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신분과 죄목이 낱낱이 드러나 있었다. 모든 걸 알아버린 테렌스가 저를 선택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대가와 책임은 제가 져야죠. 저는 죄인인데요.”
“네 죄가 없다고는 하지 않겠다. 실망했고, 또 절망했어. 상처가 아예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프리다가 그곳에 갇혔을 땐 정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좌절했다.”
발레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용서를 바랄 만큼 가벼운 죄가 아니었다.
테렌스는 엄지로 그녀의 흉터를 쓸어내리며 담담히 제 심정을 꺼내놓았다.
너를 미워하려고 노력했다.
내 여동생을 해할 목적으로 황궁에 들어온 사람이니까. 오랜 시간 동안 신분과 본 목적을 속인 채 우리를 기만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증오하고 또 원망해야 마땅할 터인데….
냇가에서 체포된 널 감옥에서 빼낸 것도, 프리다의 검술 선생으로 영입한 것도, 네 매력에 이끌려 다가간 것도, 날 거부하는 네게 연인 관계를 제안한 것도, 전부 다 내가 스스로 벌인 짓이더라.
돌이켜 보면 모두 내 의지와 결정에 따른 일이었어. 내가 책임을 돌릴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던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저히 네가 죽는 것만큼은 못 보겠더군.
무엇보다 네가 마지막에 남긴…. 사랑한단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참 우습지. 심란한 와중에도 기뻤다.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네가 나를 오랫동안 밀어내고, 사랑한다는 말에 답하지 않았던 이유를 한참 동안 생각했다. 아마 너도 죄책감으로 힘겨웠겠지. 그저 내 추측일 뿐이지만, 그게 끝내 네가 목적을 포기하고 스스로 잡혀 들어온 이유가 아닐까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진심이었어. 프리다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결국 너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어.
내가 선택한 사람이, 내가 처음으로 품은 여자가, 결코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일 순 없을 거라고.
이런 내 믿음이 맹목적이라 해도 할 말은 없다.
네 처형 집행일에 나는 황태자궁에 잠시 유폐됐었다. 아버지의 명령을 받은 중앙궁 근위기사들이 내 침실을 막고 있었지. 내가 형 집행을 막는 걸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일찍이 나는 레이븐을 처형장에 파견해 두었다. 하지만 광역 포박 마법을 쓰려던 순간, 현장에 있던 모두가 잠들어 버렸다더군.
그날 너는 처형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소식을 듣고 나는 안도했어. 차라리 네가 영영 도망가길 바랐다. 네가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견딜 수 있을 것 같아서….
혼자 프리다와의 추억을 떠올릴 때도, 늘 그 애 곁에 네가 있었던 게 생각났다. 그 애가 웃을 땐 항상 네가 함께 있었던 것 같아. 당연한 일이지. 네가 석실에 들어오기 전에는 웃음을 잃어버렸던 아이니까.
석실에 갇혀 맥없이 말라가던 프리다에게, 물을 주고 햇빛을 주어 웃음꽃을 피워낸 건 너였다.
가벼운 운동조차 힘들어하던 그 아이를 검사로 키워낸 것도 너였고.
나는 직접 갈 엄두도 나지 않는, 그 음험한 지하세계에서 그 애를 구해온 것도 너였다.
가족이자 오라비인 나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프리다와 함께 돌아온 용사가 너와 체격이 너무 비슷해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그 용사를 바라보면서, 제발 너이기를 간절히 기도했어.
그리고 신께선 내 소원을 들어주셨다.
네가 얼굴을 드러낸 순간 내가 얼마나 환희에 젖었는지 넌 모르겠지.
고맙다. 살아있어 줘서.
다시 돌아와 줘서.
이렇게 내 침실에 다시 찾아와줘서.
테렌스는 은은한 미소와 함께 말을 맺었다. 엷게 팬 볼우물에 달빛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묻겠다.”
“…….”
“아직도 날 사랑하—흐읍.”
입술로 입술을 꽉 틀어막았다.
발레리는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그 말을 맨정신으로 어떻게 하냔 말이다. 그땐 정말 궁지에 몰렸으니까, 상황이 절박하니까 진심을 토해냈던 거고….
테렌스는 발레리의 키스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숨이 가빠질 무렵, 발레리는 이미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감싼 천들을 정신없이 풀어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서로의 나신을 마주했다. 이들은 숨을 섞던 것도 잊고 놀라서 바짝 굳었다.
둘 다 이전의 몸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마른 거지?”
테렌스가 발레리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탄식했다. 그녀는 눈에 띄게 체형이 가늘어져 있었다. 지하 감옥에선 먹는 게 부실했던 데다 운동도 따로 하지 못했다. 근육 부피가 줄어드는 건 당연했다.
“음, 그쪽이 더 마른 것 같은데요?”
테렌스의 몸도 상당히 야위어 있었다. 두툼한 가슴과 벌어진 어깨는 여전했지만 생기가 많이 빠졌다. 아마 약을 먹고 일주일 이상 누워 있었으니 몸이 상했을 것이다. 발레리는 죄책감에 쓴 침을 삼켰다.
툭. 그녀의 어깨 위로 테렌스의 고개가 떨어졌다.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어깨선에 닿은 따뜻한 물줄기가 쇄골 위에 조금씩 고였다. 그녀는 말없이 테렌스의 등을 토닥였다.
“…으흑.”
“테렌스, 괜찮아요. 나 아직 건강해.”
“하아, 부서질까 봐 못 안겠다.”
푸핫.
발레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어깨와 팔, 허벅지가 조금 가늘어졌을 뿐 그녀는 아직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겉보기에 안쓰러워 보일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수감 생활이 그리 긴 것도 아니었고.
“내 몸이 그렇게까지 말라 보이는 거면…. 다부진 몸이 취향이었구나?”
그녀의 질문에 테렌스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지금도 예뻐.”
“그럼 가만히 있어 봐요. 안 부서지게 잘 해보려니까.”
발레리는 테렌스의 가슴을 팍 밀쳐 뒤로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