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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51)화 (150/173)

151화


“…용사님, 감사합니다.” 

황제가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발레리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그녀는 황제를 향해 얼른 손을 뻗었다.

이러지 마세요, 라고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황후 또한 그녀 앞에 다가와,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이내 드레스 자락을 들더니, 황후도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우리 딸을 무사히 구출해 주셔서.”

“딸의 아비 된 자로서 어떤 보상이든 해드리겠습니다. 제 딸만 좋다고 한다면, 황실의 부마로 삼겠습니다.”

황제의 말에 발레리는 풋, 숨죽여 웃었다. 아무래도 로브를 쓰고 있고, 키가 크니 남자인 줄 알 터다.

무릎 꿇은 부부의 옆에서, 테렌스는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발레리는 그의 눈길을 의식하며 황제 부부를 내려다봤다.

‘…너무 과분한 감사 인사를 먼저 받아버렸네. 이젠 내가 할 차례지.’

무릎 꿇고 앉아 있는 황제 부부의 앞에서, 발레리 또한 양쪽 무릎을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프리다를 구해 온 용사가 느닷없이 무릎을 꿇자, 황제는 화들짝 놀라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무릎은 저희가 꿇어야 마땅한….”

황제의 말에 아랑곳없이 발레리는 무릎을 완전히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이마가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죄송합니다.”

사과부터 했다. 그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용사님, 저희한테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황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도망쳤으니까요.”

“네?”

휙.

발레리는 후드를 벗고 고개를 들었다.

의연하고 진실한 눈빛으로, 그녀는 황제와 황후의 얼굴을 차례차례 마주했다.

“벌 마저 받으러 왔습니다.”

용사의 정체를 확인한 황제 부부는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테렌스는 재빨리 발레리의 곁에 다가섰다. 황제가 혹시나 허리춤의 검을 뽑을까 우려돼서다.

여전히 부부는 말을 잃은 채 경직돼 있었다. 무릎을 꿇은 그 자세 그대로.

발레리는 황제가 찬 검을 응시하며 말했다.

“여기서 직접 목을 치셔도 됩니다.”

그러면서 발레리는 로브를 잠근 단추를 풀어 맨 목을 훤히 내놓았다.

용서받지 않을 각오가 돼 있었다.

죽는다면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때 발레리의 시야를 누가 대뜸 막아섰다.

프리다였다.

그녀는 황제 부부와 발레리의 사이를 완전히 막고 섰다.

“아니, 발레리! 왜 그래요 정말? 발레리는 날 구출해낸 용사인데 왜 사과를 하냐고!”

“황녀님, 비키세요. 전 형 집행 전에 도망친 사형수예요.”

“발레리, 진짜 이럴 거야? 어머니, 아버지. 발레리는 내 은인이에요. 얘가 없었으면 난 절대로 오벨론 못 죽였을 거라고! 지하세계에서 죽을 때까지 잠만 자고 있었을 거라고요!”

프리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아버지, 어머니. 프리다를 구출해온 자에게 형벌을 내릴 순 없는 일입니다. 형 집행은 재고해 주십시오. 이번엔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테렌스도 얼른 발레리를 비호했다.

황제의 푸른 눈동자는 걷잡을 수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한때 내 딸을 마왕에게 팔아넘기려던 이 계집이.

지금은 딸을 지하세계에서 구출해 온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은 형벌을 받겠다면서 목까지 내놓는다.

딸과 아들은 동시에 이 계집을 두둔하고 있다.

황제는 다시 바닥에 발을 내디디며 일어섰다. 곁에 있던 황후 또한 일으켜 주면서.

테렌스도 발레리의 팔꿈치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무릎 꿇고 있는 모습은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프리다는 황제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프리다, 비켜라.”

“안 돼요, 아버지. 해치실 거잖아요.”

“아니. 해치지 않을 테니 비켜라.”

황제는 허리춤의 검을 땅에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프리다는 그제야 아비에게 길을 터주었다.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발레리에게 확 가까이 다가섰다. 키가 비슷해 여차하면 코끝이 닿을 정도였다. 발레리의 어깨가 물결쳐 흔들렸다.

그는 두 팔을 양쪽으로 번쩍 들었다.

그리고 발레리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

발레리는 힘없는 갈대처럼 황제의 품속에 쓰러졌다.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 힘이 확 빠졌다. 당장 바닥에 풀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감히 내가.”

“…폐하….”

“널 죽이려 했구나.”

신탁은 틀리지 않았다.

딸은 기적처럼 돌아왔다.

셀레스틴의 말대로, 딸을 구출해올 사람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황제는 사형 판결을 내리고 집행하려 했었다.

눈물까지 흘리며 만류하는 아들까지 뿌리치고서.

“…이만하면 됐다. 벌은 더 내리지 않겠다.”

황제는 제 행적을 자조했다.

발레리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프리다를 무사히 구해 돌아온다는 자가 아가씨였군요.”

황후도 신탁 내용을 황제에게서 전해 듣고 있었다.

“내 딸의 은인에게 어찌 벌을 내리겠느냐. 네가 죽었다면 프리다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을.”

황제는 발레리의 등을 토닥, 토닥 두드렸다.

발레리는 두 손으로 황제의 가슴을 슬슬 밀어냈다. 더 이상 그에게 안겨 있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프리다는 당당하게 황제에게 통보했다.

“아버지, 어머니. 발레리를 내 전속 호위기사로 임명할 거예요. 내 목숨을 구해 온 거나 마찬가지니까, 내 이름으로 특별히 채용할 거라고요.”

“…….”

“나한테 잘못한 거, 내가 다 용서했고. 날 속이고 기만한 죄, 날 구출한 걸로 다 갚았어요. 이제 발레리는 우리한테 속이는 거 하나도 없다고요.”

“…네 뜻대로 해라.”

황제는 쉰 목소리로 나긋하게 말했다.

“정말요? 아버지, 진짜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히 못 볼 줄로만 알았던 딸의 주장을 꺾고 싶지는 않았다.

“발레리, 그런데 목에 걸고 있는 그건 뭐지?”

테렌스의 질문이었다. 그는 발레리가 걸고 있는 초커에 보랏빛 프리즘 세 개가 달린 걸 보고 있었다.

“…아, 이거.”

발레리는 손을 뒤로 가져가 목걸이를 풀어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이 목걸이를 차고 있는 줄 자각하지도 못했다.

“비덴티움이에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기록된 거지?”

“…와이어 숲에 들어가기 전부터 걸고 있었어요.”

지금 이 목걸이에는, 그녀가 프리다를 구출하기까지의 과정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을 것이다.

“우리가 봐도 되겠나?”

테렌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네. 가져가세요.”

발레리는 흔쾌히 대답했다. 어차피 비덴티움은 본인의 것도 아니었다.

***

딸과의 재회가 끝난 뒤, 황제는 지하 감옥의 면회실로 찾아갔다.

또 다른 사형수 피어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피어스는 흠칫했다. 황제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나타났기 때문이다.

혹시 이 황제라는 작자는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섬찟한 기분까지 들었다.

황제의 입에서는 뜻밖의 소식이 나왔다.

“자네 부하가 돌아왔어. 내 딸을 구출해서.”

“…예? 발레리가요?” 

“그래도 나는 자네를 참수시킬 생각이야. 내 딸의 납치 의뢰를 받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피어스는 덤덤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딱히 감경을 원하지도 않았다. 이미 죽을 걸 각오하고 신변을 정리한 뒤에 들어왔다.

“네, 폐하. 언제든 목숨을 끊어 주십시오.”

“그럴 거야. 공식적으로는.”

“…예?”

무슨 의미일까. 공식적으로 목숨을 끊는다니. 당연히 형을 집행하는 건 죄인을 공식적으로 죽이는 것일 텐데.

“피어스 밀러라는 사람은 내일부로 죽고 없다.”

“…….”

“넌 죽을 때까지, 황실의 개로 살게 될 거야.”

“폐하, 그게 무슨….”

“시에나 여신 앞에서 피의 맹세를 해라. 넌 나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해. 복종하지 않거나 거짓을 고했다간 곧바로 심장이 멎어 죽게끔 말이다.”

피어스는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대뜸 피의 맹세를 하라니. 황제의 의도를 도통 알 수 없었다.

“내 직속 첩보조직을 만들 생각이다. 너는 그 조직을 이끌게 될 거고. 펠런 두목으로서의 네 경력, 그리고 자네 부하가 해낸 일을 보아서 내린 선택이야.”

“폐하? 중죄인인 제게 너무 과분한 처사가 아닐는지….”

살려준다는 뜻이었다. 살려주다 못해 직속 조직의 수장으로 채용까지 한다는 말이었다.

“과분하다니. 넌 내 한마디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 그리고, 난 널 평생 노예처럼 부려먹을 생각이다.”

“화, 황공하옵니다, 폐하.”

“그리고 네 조직원들이 남아있다면 불러와도 좋다. 물론 그들도 내 밑에서 일하려면 피의 맹세를 해야겠지만.”

피어스는 여러모로 죽이기에 아까운 인물이었다.

물론 프리다를 마왕에게 넘기려 한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피의 맹세를 요구했다. 황실을 배신했다간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춰버리도록.

황제는 피어스가 일하는 방식에 반해 있었다. 펠런은 체계적인 조직이었다. 억울한 누군가의 원성 어린 의뢰서와 단계별 임무 수행 보고서, 각종 증거품 입수 경로 등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뒀다. 황실 정보기관들이 본받아야 할 수준이었다.

공권력으로 구제하지 못하는 이들을, 펠런은 조용히 돕고 있었다. 철저한 음지에서, 귀족들에게 탄압을 당하면서.

“그리고 고맙다.”

“예? 폐하, 무엇을 가지고 그러시는지….”

“내 형님을 독살한 자가 누군지. 네 덕분에 알게 됐으니.”

그다음으로 황제는 황궁 인근 피오르탑으로 이동했다.

귀족 전용 수용소인 이곳에는 켄드릭이 갇혀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통보했다.

자네의 친구라는 자가, 내 딸을 지하세계에서 구출해 왔다고.

“…저, 정말입니까?”

해쓱했던 켄드릭의 얼굴에 반짝 생기가 돌아왔다.

“프리다가 돌아왔으니, 너는 이만 후작령으로 돌아가도 좋다. 잃어버린 형들도 돌아왔는데 회포도 풀어야 할 거 아니냐.”

“폐하, 그럼 발레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라벤더궁 전속 호위기사로 채용될 예정이다. 프리다의 뜻이 워낙 강해서 막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 아이는 정말 누군가에게 악의를 가지고 행동할 위인이 못 됩니다.”

황제는 조용히 수긍했다.

영영 도망쳐도 모자랄 것을. 남은 벌을 받겠다며 제 목을 내놓던 그녀의 기개가 생각났다.

여태 많은 기사들을 봐왔지만 그렇게 강직한 인물은 본 적이 없었다.

“켄드릭 경, 네 기사 작위도 복원해 주겠다. 언제든 제1 기사단으로 복귀해도 좋아.”

“…아닙니다, 폐하.”

“응? 자네, 권력욕이 좀 있는 편 아니었나?”

“제1 기사단 말고, 저도 라벤더궁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켄드릭은 놓치지 않았다.

다시 발레리와 함께 일할 기회를.

잃어버린 형들을 구했다. 이제 승진이나 영달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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