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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50)화 (149/173)

150화


“나는 데일론. 신임 최고 집행관이다. 오벨론이 임기를 176년이나 초과한 덕에…. 그동안 대기발령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이 자가 마왕이 돼야 했으나, 오벨론이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아 하는 일 없이 지냈다는 뜻이었다.

프리다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 네. 그래서요?”

“배웅하러 왔다. 황녀, 살생이 불가한 우리 대신에 오벨론을 처단해 줘서 고맙다.”

“…뭐 고마울 것까지야.”

프리다는 이제야 검 자루에서 손을 놓았다.

그 곁에 서 있던 발레리는 데일론을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 그 새 마왕님.”

“마왕? 인간들은 나를 그렇게 부르는가?”

“어, 음…. 저기…. 얼마 전에 제 동료들이 많이…. 죽었거든요. 그 사람들 살아있을 때…. 다른 사람 물건 훔치고 다녔는데….”

발레리의 목소리가 점점 흐리게 탁해졌다. 눈가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프리다는 갑자기 우는 그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발레리, 왜 그래요?”

“우리 펠런…. 죽은 동료들…. 동료들 오면 벌주지 마세요. 그 사람들 물건 훔치긴 했지만…. 지옥 갈 만큼 나쁜 사람들이 아니에요…. 흐엉….”

데일론은 발레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등을 토닥였다.

“울지 않아도 돼, 인간 아가씨.”

“…흐윽.”

“금품을 훔치는 정도의 범죄로는 이곳 집행관 앞에 끌려오지 않으니까. 남들 모르게 살인이나 성폭행을 저질렀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데일론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 정말이죠?”

“그렇대도.”

프리다는 발레리의 뺨을 옷소매로 닦아 주었다.

그러다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저기, 데일론. 와이어 숲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결계를 계속 쳐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면 되나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원래는 숲을 훼손하지 않는 한 침입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벨론이 숲에서 그렇게 인간들을 잡아댄 건 인질이 필요해서였을 거야. 황녀 네가 태어난 뒤에도 10년이 훌쩍 넘도록 너희 황실은 계약 이행 요구에 응답이 없었거든.”

“…더 이상 무시하지 말라는 경고였군요.”

“그런 셈이지. 아무튼, 숲만큼은 잘 지켜줘. 마력석 광산은 이미 너희 인간들의 터전이 된 지 오래이니 건드리지는 않겠다.”

“네, 명심할게요. 어, 저희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프리다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 숨구멍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훌쩍거리는 발레리를 이끌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숲에는 새벽빛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형 집행을 코앞에 둔 사형수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분명히 형틀에 머리까지 고정해두고 있었다고 했는데.

정말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목격자도 없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잠들어 버렸기에.

프리다가 사라졌을 때의 상황과 판박이였다.

이상했다. 수면초 냄새는 지독한데, 그걸 맡았다는 사람도 없었다.

황제는 발레리의 외모를 기억하는 대로 황실 직속 화가에게 초상화 제작을 의뢰했다.

“현상수배 벽보를 붙여라.”

며칠 내로 황성 시내 곳곳의 게시판에는 발레리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붙었다.

이 정도로 큰 게시물이 붙었다면 필시 중죄인일 텐데, 수배지에는 아무런 혐의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저 얼굴 아래 ‘이 여인을 본 자는 황궁에 고하시오’라고 되어 있을 뿐이었다.

***

발레리와 프리다는 금방 숲을 빠져나왔다.

두 여인은 해가 뜨고 나서야 알았다. 옷이 온통 피투성이라는 걸.

프리다는 마을 쪽으로 걷다 말고, 상의에 붙은 진주를 잡아당겨서 일일이 떼어냈다.

“황녀님, 뭐 하세요?”

“황성까지 가려면 말 빌려야 하잖아요. 이거 진주라도 팔아야지. 그리고 새 옷도 사 입어야죠. 피투성이로 돌아다니긴 좀 그렇잖아.”

“진주 제값 주고 팔려면, 음… 제가 아는 보석상으로 가시죠.”

프리다는 발레리가 시키는 대로 후작령 번화가의 한 보석상에 가서 진주를 팔았다.

황녀의 웨딩드레스에 붙어 있었으니 당연히 최상품이었다. 스물일곱 알을 주고 이천삼백 갈렌을 받았다.

목돈이 생겼다. 프리다는 먼저 발레리에게 후드가 달린 기다란 로브를 사 입혔다.

이러나저러나 발레리는 탈주한 범죄자였다. 최대한 모습을 숨겨야 했다.

두 여인은 옷을 산뜻하게 갈아입은 뒤 말을 하나씩 빌려 타고 황성을 향해 쾌속 질주했다.

“와, 이전에는 승마도 힘들어서 오래 못 했는데. 체력이 좋아지니까 달릴 맛이 나네요!”

말을 타고 달리는 프리다의 짧은 백금발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하하, 말은 황녀님이 저보다 잘 타시는 것 같은데요?”

“헤헤, 나 쫓아와 봐요!”

사흘 뒤.

두 여인은 황궁 정문 앞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무사히 온 건 발레리가 기지를 발휘한 덕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수배령이 떨어졌음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검문을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도 당연히 세워두고 있었다.

“사이좋은 부부인 척하자고요. 저한테 꽉 안겨 계세요.”

두 사람은 검문소를 통과하며 꽤 진득한 스킨십을 했다.

병사들은 그들을 부러운 눈으로 흘깃하며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 그냥 들어가라고.

이제 황궁 문지기를 통과할 차례가 왔다.

여기선 프리다가 나서야 했다.

두 여인이 정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문지기 병사가 다가와 신원 공개를 요구했다.

“어디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가 내 집에 들어가는 건데, 뭐 문제 있나요?”

프리다는 깊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만백성의 연인이었던 황녀의 얼굴을 문지기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혼비백산이 되어 뒤에 있던 동료에게 소리쳤다.

“…야! 클린트 하사님 불러!”

“상관을 왜 불러요. 그냥 문 열어줘. 내가 내 발로 들어갈 거니까.”

“화, 황녀님. 진짜로 프리다 황녀님이 맞습니까?”

“내 얼굴 몰라요? 머리를 너무 짧게 깎아서 인상이 달라졌나….”

결국 문지기는 문을 열었다.

프리다는 그 문을 가볍게 통과했지만, 발레리는 가로막혔다. 후드를 턱 끝까지 꾹 눌러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네는 뭐 하는 사람이지?”

“아이, 참. 왜 나랑 있겠어요. 내 호위니까 그렇지. 얼른 안 비켜요?”

프리다가 역정을 냈다. 문지기는 쩔쩔매며 발레리에게도 길을 열어 주었다.

프리다와 발레리는 천천히 중앙궁으로 향했다.

쨍한 봄 햇살 아래 프리다는 사뿐사뿐 앞장서서 걸었다.

“…황궁이 이렇게 예쁜 줄 몰랐어요. 발레리, 저기 장미 핀 거 보여요?”

“네. 예쁘네요.”

발레리의 대답에는 영혼이 없었다.

그녀는 다소 무거운 걸음으로 프리다를 뒤따랐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엔 진짜로 죽을 차례다.

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도망, 아니 구출 당했으니까.

프리다는 당연히 그녀에게 내려진 형벌이 거둬지리라 확신했지만, 발레리는 고개를 저었다.

발레리는 딱 이 심정으로 황궁에 들어왔다.

‘죽으면 죽으리라.’

황궁에 가지 않고 루카스와 함께 도피 생활을 할까도 생각했다.

그래도 황녀를 가족에게 데려다주는 일만큼은 본인이 직접 하고 싶었다.

이번이야말로 제대로 사죄할 기회였다.

한때나마 제게 믿음을 주었던 황제, 황후, 그리고 테렌스에게.

그 이후에 어떤 형벌이 주어지든 간에 말이다.

그사이 클린트 하사는 근위병들의 보고를 받고 말에 급히 올라탔다.

중앙궁으로 전력 질주했다. 낭보를 가장 먼저 보고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다른 근위병은 그의 명을 받고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테렌스에게도 소식을 보고하기 위해.

황제와 황후는 보고를 받자마자 후다닥 몸을 일으켜 버선발로 중앙궁 정원 앞으로 나왔다.

황태자궁에 있던 테렌스도 백마 캐런을 타고 그들 앞에 이르렀다.

“어머니, 아버지. 프리다가 왔다는 게 사실입니까?”

“어어. 이름 모를 어떤 용사님이랑 같이 왔다고 한다. 하아, 근위대도 참…. 지들은 보고하러 말 타고 오고, 내 딸은 걸어오게 하다니 말이 되나? 걸어오려면 한참일 텐데.”

황후는 벌써부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벅참을 누를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프리다가 오길 기다렸다.

황제는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고 중앙궁 정원 입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저 멀리.

딸이 보인다.

가족들을 발견한 프리다가 손을 흔들며 우다다다 뛰어왔다.

그 뒤에는 망토로 신원을 감춘 한 사람이 느린 걸음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아마 프리다를 구해온 용사일 것이다.

프리다가 돌아왔다.

황제와 황후, 테렌스는 두 팔을 벌린 채 프리다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머니! 아버지! 오빠!”

프리다는 유리구슬처럼 맑은 목소리로 가족들을 호명했다.

황제는 프리다를 번쩍 안아 올렸다. 딸이 예닐곱 살 아이일 때처럼 하늘 높이.

황후와 테렌스도 그 곁에서 프리다를 두 팔로 감쌌다.

감격스러운 재회였다.

찬연스레 비치는 봄 햇살 아래 네 가족은 서로 하나가 되었다.

“프리다. 거기서 어떻게 지냈던 거니?”

“어머니, 정말 거기서는 잠만 자다 왔어요. 그래도 꿈에서나마 가족들 볼 수 있어서,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우리도 네 꿈을 자주 꿨단다. 얼마나 생생하던지. 아침에 일어나면 베갯잇이 다 젖어서는….”

애틋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발레리는 담담한 미소를 띠며 지켜보았다.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종류의 사랑을.

펠런 단원들도 막내인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긴 했지만, 이런 형태의 가족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발레리는 프리다가 몹시 부러웠다.

황제는 이십여 분 동안이나 프리다를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영영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딸이 돌아왔으니, 끊임없는 행복감이 용솟음쳤다.

프리다도 같은 심정이었지만, 이젠 숨이 막혔다.

“아버지, 이만 놓아 주세요. 절 구해 주신 분한테 감사 인사하셔야죠.”

프리다는 뒤를 돌아 정체불명의 용사를 가리켰다.

황제와 황후는 그제야 용사가 서 있는 쪽을 주목했다. 이미 테렌스는 그를 먼저 주시하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네. 은인에게 감사 인사를 한다는 걸.”

황후와 황제는 발레리에게 다가왔다.

처음 알현했을 때 보았던, 그 인자한 미소를 띠고서.

발레리는 이들의 표정이 곧 식어버리리란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끝끝내 황제는 발레리의 발치 앞까지 다가왔다.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정원의 돌바닥 위에….

황제는 차례차례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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