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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49)화 (148/173)

149화


“…와, 기럭지 좀 봐. 황녀님, 쟤 거인이에요? 왜 저렇게 커요? 마왕이 괜히 마왕이 아니네.” 

“그쵸. 조금만 작았어도 한 번에 목 댕강해버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프리다는 작고 앙증맞은 입술로 잔혹한 소리를 내뱉었다. 조금만 더 높게, 더 빨리 도약했다면 턱 끝이 아니라 목을 깊이 찔렀을 수도 있었으리라.

발레리는 눈을 부릅뜨고 오벨론의 행태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는 웬 거대한 화덕 앞에 서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무언가가 뜻대로 되지 않아 고뇌하는 듯했다.

과연 화덕 안에는 보통의 붉은 화염이 아니라, 거의 순백색에 가까운 기이한 불꽃이 후드득거리고 있었다.

저 화덕이 용광로라면, 그 속에는 아마 보검이 있을 것이다.

저렇게 괴로워하는 건 아마 보검이 녹지 않아서인 것 같았다.

“황녀님. 저 불꽃, 우리한테는 안 뜨겁겠죠?”

발레리는 바로 옆에서 타오르는 불꽃에 손을 들이대며 말했다. 화끈한 느낌이 와닿긴 했지만 다칠 만큼 위협적이진 않았다.

“아마도요? 여기 들어오자마자 타죽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그럼 제가 저 거인 놈 대갈통에…. 이걸 던질 테니까, 주의가 흐트러진 사이에 저 큰 화덕에서 보검 꺼내 보세요.”

발레리의 손에는 아까 두 동강 난 피리의 한쪽 부분이 들려 있었다.

이걸로 집행관 두 명을 가격해서 쓰러뜨렸으니 저놈한테도 먹히겠지.

“흠, 저 하얀 불은 조금 무섭긴 한데. 너무 뜨거우면 어떡하죠?”

“다칠 것 같으면 손대지 마세요. 제가 꺼내드릴 테니까.”

“발레리가 다치면 어떡해요.”

“저 단두대 밑에서 살아 돌아왔어요. 다치는 게 대수예요? 한 번 더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어요.”

“단두대? 단두대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프리다는 까맣게 몰랐다. 발레리가 사형 판결을 받고 단두대 형틀까지 갔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발레리는 프리다에게 얼른 손짓했다. 오벨론이 한창 불꽃의 온도를 높이고 있으니, 그 사이를 틈타 접근해 있으라고.

프리다는 그녀의 지시에 따라 슬금슬금 그의 뒤편으로 다가갔다.

그새 발레리는 피리를 손에 꽉 쥐고 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물건을 던져서 무언가를 맞히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힘껏 차올리며 피리 조각을 든 손에 체중을 실었다. 최대한의 힘을 발휘하기 위한 투구 자세였다. 

휘익.

강속구가 던져졌다.

턱!

오벨론의 뒤통수에서 둔중한 타격음이 났다. 흡사 뜨거운 수프를 담은 뚝배기가 깨지는 소리 같았다.

그는 지체 없이 뒤를 돌아봤다. 통증이 꽤 강했는지 얼굴이 상당히 일그러져 있었다.

발레리는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사내를 향해 당당히 걸어갔다.

‘오, 구면인데?’

낯익은 얼굴이었다. 황녀의 석실 연무장에 걸려 있던, 그 초상화 속 남자.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황금색 고양이 눈을 그대로 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마왕 아저씨.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실물이 더 풍채가 좋으시네요.”

“…넌 뭐지? 여신께서 새로 내려보낸 집행관인가?”

오벨론이 알싸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발레리에게 물었다. 아마 인간은 아닐 것으로 짐작했다. 인간의 물건으로는 그에게 해를 입힐 수 없었다.

“하하, 저 그렇게 대단한 존재는 아닌데. 근데 저 모르세요? 저한테 의뢰 맡기셨잖아요.”

“…의뢰라니.”

옳거니. 용암 동굴에 들어와도 이빨만 잘 털면 살아남을 수 있겠다. 오벨론은 발레리의 말 미끼에 제대로 걸려들고 있었다.

“뭐, 의뢰는 두목이 받았겠지만. 제가 실무자예요. 황궁에 1년 동안 잠입해 있었거든요.”

“…하하, 실패를 보고하러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황녀는 제 발로 걸어 들어와 내게 보검을 바쳤다. 난 너희들에게 더 기대를 걸었는데 말이지. 펠런이라고 했었나. 명성에 비해 무능한 집단이더군.”

“아이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이네요.”

발레리는 하나 마나 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에게 한 발짝씩 다가갔다. 이상한 게 있었다. 마왕의 턱밑에서 검붉은, 보랏빛이 감도는 액체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아저씨, 턱에서 피 나는데요?”

오벨론은 턱밑을 슥 훔쳤다. 잘 보니 그의 가슴께에도 피가 흘러내려 굳은 자국이 선명했다. 아무래도 계속 출혈이 있었던 모양이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였다. 엘로이스의 보검은 영구적인 상처를 내는 속성이 있었다. 테렌스의 오른손이 그러하듯이.

“…무단침입자 주제에 말이 많군.”

그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발레리에게 최면술을 쓰려 했다. 하지만 발레리는 반지 낀 왼손을 휘, 저으며 그 기운을 가볍게 튕겨냈다.

“제가 좋은 장비를 끼고 와서. 그 손바닥 최면술은 저한테 안 통하거든요. 분발하셔야겠어요. 그리고….”

발레리는 자루에 손을 집어넣고 피리의 나머지 반쪽을 꺼내 들었다.

“이거나 드세요.”

따악!

그녀가 들고 있던 피리 조각은 피투성이인 오벨론의 턱 끝을 강타했다. 이번엔 가까이서 던진 터라 충격이 더 강했다.

오벨론은 턱을 감싸 쥐며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우두망찰할 뿐이었다. 눈앞의 인간 여자에게는 최면이 통하지 않는다. 검을 뽑아 공격한다 한들, 살아있는 인간이니 통하지 않을 것이다.

“으흑… 대체 뭘 던진 거야. 인간의 공격이 내게 먹힐 리 없는데….”

오벨론은 제 턱을 맞히고 땅에 떨어진 나무 피리 조각을 노려봤다.

발레리는 프리다 쪽을 보았다. 프리다는 용광로의 흰 불꽃 속에서 보검을 꺼내 드는 데 성공했다.

프리다의 손안에서 보검은 찬란한 빛을 퍼뜨리고 있었다. 발레리는 얼른 그녀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오벨론이 빛을 감지하기 전에 얼른 처단해야 한다.

‘지금이에요.’

‘응!’

오벨론의 등 뒤에 다다른 프리다는 보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동안 발레리와 함께 수도 없이 베어냈던 짚단 인형들을 떠올리며….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 검날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써걱.

“크허억!”

오벨론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그의 입과 목에서 검붉은 액체가 튀어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다만 완전한 참수에는 실패했다. 검날이 관통한 부분은 그의 목에서 딱 반절 정도였다. 오벨론이 초인적인 반사 신경을 발휘한 탓이다.

하, 아직 목숨이 붙어 있다.

그 끈질긴 생명력에 프리다는 오금이 얼어붙었다. 온몸에서 피가 솟구치는데 왜 안 죽는 거지.

죽음의 문턱에 선 오벨론은 뒤를 서서히 돌아봤다. 목에 난 깊은 균열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그에겐 지금 고통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지금 내 목을 내리친 자는 누구인가.

세로로 찢어진 그의 동공이 양옆으로 확장됐다.

피가 뚝뚝 흐르는 보검을, 누군가가 들고 서 있다.

고요히 잠자고 있어야 할 제 아내.

황녀 프리다였다.

오벨론은 경악했다.

“…화, 황녀. 네가 어떻게…!”

오벨론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발레리와 프리다는 한순간에 굳어 버렸다.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가 있지. 왜 아직도 안 죽는 거야. 이렇게 바닥이 피바다가 되도록 출혈을 했으면 죽어야 하는데. 인간이라면 그래야 하는데.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 오벨론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끄윽…. 가, 감히 인간 따위가….”

그는 숨이 꺼져가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솥뚜껑만 한 손을 뻗어 프리다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피할 수 없었다. 프리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마 이대로라면 목이 졸려 죽을 테지만….

아무런 압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끄흑! 끄으윽.”

오벨론이 일순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럽게 부르짖었다.

터억.

그의 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발레리와 프리다는 서로 다급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마왕이 갑자기 왜 이러죠? 방금 내 목 조르려고 했었는데.’

‘그러게요…. 아!’

발레리의 머리 위에 불빛이 탁 켜졌다. 마왕이 저러는 이유가 생각나서다.

피의 맹세.

그는 황녀를 해치지 않겠다고 심장을 걸었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 그것을 망각하고, 프리다의 목을 졸랐다. 본인이 살아 있는 인간을 해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발레리는 얼른 오벨론에게 다가가 목을 짚었다. 맥이 뛰지 않았다.

“죽은 것 같아요.”

“휴우….”

“보검으로 확인사살 하실래요? 목 잘라 가지고 황궁에 가져갈까요?”

“아, 아니. 그건 좀….”

프리다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목표를 이루긴 했지만 눈앞에서 꺼진 생명을 보니 조금은 착잡했다.

물론 동정심은 추호도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마냥 통쾌해할 성정이 아닐 뿐.

“휴우.”

프리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피투성이가 된 보검을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이제야 힘이 풀린 그녀의 어깨 위에, 발레리는 손을 툭 얹었다.

“황녀님. 이제 다 됐어요. 돌아가요. 부모님이랑… 오빠분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응! 얼른 가자!”

프리다는 앞장서서 동굴을 나갔다.

발레리는 그녀를 따라나서려다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피리 조각들을 다시 자루에 주워 담았다.

오벨론의 사체를 뒤로하고, 두 여인은 다시 복도를 지나 성좌가 있는 법정 앞으로 돌아왔다.

그 한가운데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우뚝 서 있었다.

키가 작은 갈색 머리 여인이었다. 어두운 보랏빛 드레스 위에, 여신을 상징하는 눈꽃 문양의 띠를 사선으로 두르고 있었다.

집행관이 설마 하나 더 있었나? 프리다는 혼란에 빠졌다.

프리다는 그 여인을 경계하며 보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발레리 또한 자루 속의 피리 조각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여인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다.”

여인의 입에서는 감사 인사가 나왔다.

“고맙…다뇨?”

프리다는 여전히 검자루를 움켜쥔 채 여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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