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덜커덕.
덜컹덜컹.
바닥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마치 돌길 위를 달리는 마차에 타고 있는 것처럼.
발레리는 혼자 중얼거렸다.
“지하세계로 가는 마차인가…. 겁나 흔들리네….”
이대로 누워있다간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아으으으으…!”
느른한 몸에 기지개를 켜려는데, 오른손이 벽에 퍽, 부딪혔다. 좁은 공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나 목 잘린 채로 관짝 안에서 깨어난 건가.
발레리는 위아래로 꽉 맞물려 있는 눈꺼풀을 힘줘서 떼어냈다.
눈이….
뜨였다.
관짝 안인데 생각보다 밝다.
아니, 관짝이 아닌가?
천장이 너무 가깝다. 일어나면 머리가 닿을 정도로.
발은 바닥에 닿아 있다. 상체는 어딘가에 눕혀져 있는데….
공간의 흔들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진짜로 마차에 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어, 일어났어?”
뭐지? 이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음성이었다.
발레리는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과연 맞은편에 낯익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탁한 카키색 머리칼과 호박색 눈동자.
루카스였다.
이상하다. 루카스는 멀쩡히 살아있어야 할 사람이다. 이 공간에 같이 있을 리가 없는데.
문제는 그 옆에 있는 사람이었다. 낯익은 중년 여성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기름을 발라 단정히 말아 올린 흑발. 칠흑처럼 새카만 눈동자. 하늘거리는 흰색 예복.
“…사제님?”
“잘 잤나요, 아가씨?”
사제가 퍽 따스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셀레스틴. 그래, 셀레스틴이었다.
설마 이 두 사람도 나랑 같이 죽은 건가.
난 아까 죽었는데. 발레리는 지금 이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 꿈인가 보다.
“꿈이 되게 생시 같네요. 어젯밤에도 되게 생생한 꿈 꿨었는데 오늘도 이러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공주님, 지금이 꿈같아?”
루카스는 황당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럼 꿈이 아니고 뭐야. 발레리는 제 볼을 손톱으로 힘껏 꼬집어 봤다.
“아읏, 따가워.”
아프다. 아주 생생한 통증이 느껴진다.
“공주님, 지금이 꿈속이면 내가 애써 구해준 보람이 없잖아.”
“구해? 루카스 네가 누굴 구해? 설마 네가 나를 구했다고? 나 분명히 단두대에 있었는데….”
루카스는 제 등 뒤에 있던 자루를 뒤적거리더니 기다란 물건 하나를 꺼냈다.
세이렌의 피리였다.
“뭐야 그거…? 그 피리잖아. 주인한테 아직 안 돌려줬어?”
“당연히 돌려줬지. 근데 이분이 다시 빌려오셨어. 그 스테판인지 슈테판인지 하는 그 북부 무역상한테서.”
루카스가 옆에 앉은 셀레스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그, 저 죽기 전에 들렸던 그 삐이이익 소리가 그 피리 소리였어요? 칼날 내려오는 소리가 아니라요?”
“네, 아가씨. 제가 메이필드 씨에게 피리를 주며 의뢰했습니다. 아가씨의 처형을 막아 달라고요.”
“하아…. 잠깐만요.”
발레리는 펄떡거리는 가슴에 손을 대고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형이 집행되는 순간, 루카스가 피리를 불어서 처형장에 있던 모두를 잠재웠다는 소리였다.
잠들어 있던 발레리를 밖으로 구출해 냈고.
지금은 어디론가 향하는 마차 안이고.
죄수복도 어디로 갔는지 멀쩡한 옷을 입고 있었다. 신발도 신겨져 있었고.
“그, 그러니까. 사제님. 사형수인 저를 구출시켜서 마차에 태워가지고… 어디 가시는 거예요? 지금쯤이면 황궁이 발칵 뒤집혔을 텐데….”
“왜 그때, 황녀님을 데리고 마왕 앞에 가지 않으셨습니까?”
셀레스틴은 발레리에게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네? 그거야 당연히…. 의뢰인이 마왕이라는 걸 알았고…. 무턱대고 데려가면 황녀님이 지하세계에 갇히시게 되니까….”
“그때 아가씨가 황녀님을 데리고 가셨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죠. 일이 꼬여서 제가 나서게 된 점 이해해 주세요. 지금 저희는 와이어 숲으로 가고 있습니다.”
“네에? 와이어 숲에 가고 있다고요?”
발레리는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봤다. 마차는 분명 남부로 향하고 있었다. 황녀를 데리고 나왔을 때처럼.
***
마차는 그때처럼 케빈과 루카스가 번갈아 몰았다.
이번에는 다리를 건너 에버렛 강 이남까지 계속해서 달렸다.
여정이 워낙 길어 말도 여러 번 교체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정말 와이어 숲 코앞 광산촌 끄트머리였다.
“자, 내리세요.”
케빈이 마차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사제 셀레스틴과 발레리가 차례로 땅에 발을 디뎠다.
마지막으로 루카스가 잠에서 막 깨어나 마차에서 나왔다.
사흘이 넘도록 쭉 달려왔는데도, 발레리는 아직도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설명을 몇 차례씩 요구했으나 셀레스틴이 번번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공주님, 자 이거 받아.”
루카스는 본인의 자루에 담겨 있던 세이렌의 피리를 발레리에게 건넸다.
“아, 이것도.”
그는 한 번 더 자루에 손을 넣더니 목걸이를 꺼냈다. 켄드릭에게서 받았던, 인기척을 감추는 마력석 목걸이였다. 지난번 황녀와 외출했을 때 그에게 맡겨둔 물건이었다.
발레리는 피리와 목걸이를 양손에 받아들고 멀뚱히 서 있었다.
“…뭐야. 어쩌라고 이걸 나한테 주는 거야? 목걸이는 원래 내 거지만, 피리는 왜?”
“몰라. 이 사제님이 너한테 전달하라셨어. 근데 공주님, 고맙다고는 왜 말 안 해? 내가 목숨을 걸고 들어가서 구해 줬는데.”
“아, 고마워. 살려 줘서. 어차피 다시 잡히면 목 잘려 죽겠지만….”
“잡히긴 뭘 잡혀. 우리랑 열심히 도망 다니면서 살자. 루카스 얘도 현상 수배 벽보 붙었거든.”
케빈이 루카스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루카스에게도 최근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지난해 마력석 밀수 제보로 인해 발레리와 연관된 인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현장을 기록한 비덴티움 속에서 피어스를 두목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화근이 됐다.
루카스는 씁쓸히 웃었다. 차마 발레리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두목이 우리 신고로 잡혀 들어갔다는 건 말 안 하는 게 낫겠지. 그 현상금으로 수배된 단원들이 이스티아에 망명한 것도….’
그렇다고 펠런이 완전히 해체한 건 아니었다. 칼레바니아에는 루카스와 케빈을 포함해 일곱 명의 단원이 남아있었다.
루카스는 펠런의 임시 수장으로서 작아진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은밀히 일거리를 찾는 와중에 첫 의뢰가 들어왔다. 그 주인공이 바로 사제 셀레스틴이었다.
셀레스틴은 정말 대뜸 찾아와 세이렌의 피리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발레리라는 아가씨가 곧 사형에 처해집니다. 지금 당장 가면 구하실 수 있습니다.
의뢰를 듣자마자 사색이 된 단원들은 곧바로 구출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발레리를 구해냈다.
“공주님, 우린 이만 갈게. 의뢰는 여기까지라서. 사제님, 사례 넉넉히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뵐 일 있길 바랄게요.”
***
셀레스틴과 발레리.
이제 둘만 남았다.
그들은 와이어 숲 남쪽 입구 앞에 서 있었다.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고 있었다. 지옥의 숨구멍이 열리는, 그 시간이 곧 다가온다는 신호였다.
두 여인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붉은 석양빛을 옆얼굴에 가득 맞으며.
“저, 사제님. 쟤네 갔으니까 이제 말씀해 주실 거죠? 제가 왜 여기 와 있는지.”
“황녀님을 구출하셔야 합니다.”
“…네? 그게 가능한 거예요? 정말요?”
발레리가 만면에 화색을 띠며 셀레스틴에게 바짝 다가섰다. 꺼졌다고 생각한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도 황녀님을 다시 볼 수 있다니.
그리고 정말, 그곳에서 황녀님을 데리고 나올 수 있다는 건가.
셀레스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제,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예요? 일단 들어가서 모시고 나오면 되나요?”
“그건 아가씨의 재량입니다. 필요한 건 다 가지고 계십니다. 세이렌 여신의 피리, 그리고 시에나 여신께서 하사하신 엘로이스의 반지까지.”
아 참, 나 반지 끼우고 있지.
발레리는 잊고 있던 왼손 약지를 내려다봤다.
별 특징 없어 보이는 평범한 반지. 그렇게 가져가라고 했는데도, 테렌스는 이 반지를 빼가지 않았다.
“피리랑 반지, 둘 다 제 물건이 아닌데….”
“피리는 쓰임새를 다 한 뒤 주인에게 돌려주면 됩니다. 근데 그 목걸이는 뭡니까.”
셀레스틴은 발레리의 왼손에 들린 목걸이를 보며 물었다. 켄드릭이 준 마력석 목걸이였다.
“아, 이거 선물 받은 거예요. 인기척을 감춰 주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그렇군요. 잠시 줘 보시겠습니까.”
목걸이를 받아 든 셀레스틴은 마력석 위에 석장 끝을 댔다. 그리고 조용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축성 기도문이었다. 마력석과 석장의 접촉면에서 희뿌연 광채가 발산했다.
“…여신의 축복이 임하길.”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셀레스틴은 사제복 소매 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더니, 목걸이에 하나하나 달아 주기 시작했다.
반투명한 보라색 프리즘이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이나 된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물질이었다.
“사, 사제님… 지금 달아 주시는 거, 비덴티움 아니에요?”
“네, 아가씨의 행적은 모두 이 안에 기록될 겁니다.”
“아니, 이 비싼 걸 사제님이 어떻게…?”
“무사히만 돌아오세요.”
“근데 한 가지 여쭤봐도 돼요, 사제님?”
“그러시죠.”
“아시다시피 전 미천한 도적이고, 중죄를 저지른 사형수인데… 왜 자꾸 아가씨, 아가씨 하면서 높여 주세요? 이렇게 구해 주시고, 챙겨주시고….”
셀레스틴은 그녀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 건국기념관 지하에서 처음 뵈었을 때, 저 진짜 도둑처럼 하고 있었는데. 정말 수상했을 텐데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시고….”
“아가씨.”
“네?”
“저는 신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안전히 다녀오세요.”
셀레스틴은 발레리의 손에 한층 화려해진 목걸이를 쥐여 주었다.
발레리는 그녀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의뭉스러운 사제였다. 궁금한 걸 아무리 캐물어도 답하고 싶은 질문에만 선택적으로 답한다.
아무렴, 그래도 좋은 사람인 건 확실하다.
어쨌든 끊길 뻔했던 수명을 연장해주지 않았는가.
셀레스틴이 석장을 들고 숲 입구의 결계를 일부 허물었다. 발레리는 손을 뒤로 뻗어 목걸이를 채운 뒤 그 속으로 씩씩하게 걸어 들어갔다.
“…기다리세요, 황녀님. 제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