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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한테는 관심 없는데요 (145)화 (144/173)

145화


발레리는 소스라치게 놀라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족쇄의 사슬이 요란한 소릴 내며 땅에 부딪혔다. 

“테렌스…? 아니 지금….”

발레리는 사색이 되어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테렌스가 제게 입을 맞출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분명 날 죽일 듯 미워해야 할 텐데….

테렌스의 눈가에도 물기가 가득했다.

“넌 못 죽어. 프리다도 떠난 마당에 너까지 잃을 수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내가 형벌 집행을 최대한 막아볼 거야.”

이미 끝나버린 판결을 이 남자가 번복할 수 있을까. 아니, 아무리 일국의 황태자라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 발레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 안 될걸요. 이미 판결은 떨어졌고, 황제 폐하의 마음은 굳건하세요.”

“아니, 넌 살아야 해.”

“왜 이래요. 난 합당한 벌을 받는 건데.”

“그렇게 미안하면 살아서 참회해. 살아서 괴로워하라고. 내가 보는 앞에서.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그의 눈 속에 파도가 넘실거렸다. 발레리는 얼굴을 가렸다. 속이 아득했다. 그 파도가 가슴에 가득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하윽, 진짜….”

“난 뭐든 할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테렌스는 이 말과 함께 발레리를 뒤로하고 지하 감옥을 나섰다.

그의 창백한 뺨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증오해야 마땅한 여인이다.

감히 신분을 속이고 들어와 내 여동생을 마왕 앞에 갖다 바치려 했다.

감히 멋대로 내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기어이 사랑하게 만들었다.

이름부터 과거까지… 모든 걸 속이고 내 믿음을 저버렸으면서….

미워할 수조차 없게 만든다.

차라리 네가 마왕 앞에 프리다를 갖다 바쳐버렸으면 덮어놓고 증오라도 했을 텐데.

모든 걸 포기하고 자진해서 잡혀 들어온 너.

미수에 그친 혐의를 인정하고 담담하게 죽음만을 기다리는 너.

진심 어린 눈으로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너.

그런 널 잠시라도 보고 싶어서 나는 매일 이 지하 감옥에 찾아왔었다.

넌 죽지 못해.

넌 살아야 한다.

살아서 평생 참회해.

내가 보는 앞에서.

***

저녁이 왔다.

황제는 반쯤 미쳐 있었다.

급기야 말을 타고 나가서 황성 켄트웰 대신전에까지 난입했다.

그는 사제들의 만류에도 끝끝내 셀레스틴의 방을 찾아가 고래고래 윽박을 질렀다.

“프리다가 할 수 있다면서 왜! 마왕을 처단할 운명이라면서! 황실을 속이고도 살아남기를 바라는가!”

황제는 허리춤에 찬 칼을 뽑아 들고 셀레스틴의 목에 들이밀었다.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폐하. 신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시에나 여신은 내게 거짓말을 했소. 난 더 이상 그분을 믿고 싶지 않소.”

신성모독적인 발언에도, 셀레스틴은 딱히 자극받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태평한 얼굴이었다.

“따라오시지요, 폐하. 원하신다면 신탁을 다시 구해보겠습니다.”

셀레스틴은 그를 무감하게 응시하며 제단으로 인도했다.

황제를 데리고 제단 앞에 다다른 셀레스틴은 성호부터 그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광륜이 떠올랐다.

그 상태로 한참을 묵상하던 셀레스틴은 천천히 뒤를 돌아 황제를 바라보았다.

시에나 여신은 윤허했다. 알고 있는 일부 내용을 발설해도 무방하다고.

“폐하, 황녀님은 돌아오실 겁니다.”

“…바, 방법이 있소? 잠자는 상태로 지하세계에 봉인이 됐다던데…. 거기서 깨어날 수 있는 거요?”

황제가 화색을 띠며 물었다.

파르무레하게 죽어 있던 두 눈에 희망의 불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구출하러 가야 합니다.”

“…당장 내가 가겠소. 하아, 애초에 결혼 사절단으로도 내가 직접 가야 했소.”

“아닙니다. 황녀님을 구출해 올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뭐? 그게 따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오? 대체 누구요?”

하지만 여신은 거기까지는 발설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셀레스틴은 확신하고 있었다.

아마 여신의 명을 거역하고 그게 누군지 발설하더라도, 황제는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해서 그녀는 이렇게만 말해두었다.

“…기다리십시오, 폐하. 황녀님께서 돌아오시는 날,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실 겁니다.”

“후우, 이번에도 틀렸다가는 성직을 내려놓게 될 줄 아시오.”

황제는 위협적인 말투로 으름장을 놓은 뒤 신전에서 빠져나갔다. 셀레스틴은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작게 읊조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폐하. 꼬인 일은 제가 바로잡을 겁니다.”

***

테렌스는 새벽 늦은 시간까지 황제의 침실에 머물렀다.

발레리에 대한 형 집행 정지를 설득하기 위해서다.

“아버지, 그 아이를 죽이는 건 프리다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너까지 왜 이러느냐. 네 여동생을 앗아간 마왕놈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자들이야. 난 그 계집과 펠런 두목 모두를 처단할 거다. 두목 놈은 한동안 살려둬야겠지만.”

그사이 피어스도 사형 판결을 받았다. 다만 집행일을 결정하진 않았다.

볼드윈 공작에게 선황의 독살 혐의를 씌우기 위해선 피어스의 증언이 필요했다.

30년 전 그에게 레퀴나스 밭의 존재를 신고했던 인물도 찾는 중이었다.

피어스는 공작의 혐의가 낱낱이 밝혀진 뒤에 죽을 것이다.

“아버지.”

“…더 들을 말 없다. 이만 물러가거라.”

테렌스는 결국 두 무릎을 꿇었다.

황후는 화들짝 놀라 아들을 부축해 세우려 했지만, 아들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테렌스, 왜 이러니. 이미 재판은 끝났고, 되돌릴 수 없어. 나도 그 아이가 죽는 것까지 바라진 않지만, 이미 결정이 난 걸 어떡하니….”

황제는 무릎을 꿇고 있는 테렌스를 보며 흠칫 놀랐다. 그의 무릎 위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있었다.

“허어, 너 지금 우는 게냐?”

“…아버지, 프리다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 계집의 죄가 씻어지는 건 아니다.”

“죄가 없다고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살아서도 얼마든지 죗값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정 목숨만 살려두면 되는 거야? 그럼 사지를 잘라서 몸통만 돼지우리에 던져 주랴? 원한다면 그렇게 하고.”

“아버지….”

테렌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발레리가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는 건 원하지 않았다. 그건 죽느니만도 못했다.

“테렌스, 그 아가씨는 너와 우리를 속였어. 배신감이 들 법도 한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요즘 정무 보느라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눈 붙이렴. 벌써 새벽이 이리도 깊었잖니.”

황후가 테렌스의 어깨를 잡으며 재촉했다.

테렌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다면 제가 직접 막겠습니다.”

“…뭐? 너 아비의 뜻을 거역할 셈이냐?”

“불필요한 죽음을 막으려는 겁니다. 전 절대… 발레리가 죽는 건 못 봅니다.”

테렌스는 날카롭게 쏘아붙인 뒤 황제의 침실에서 빠져나갔다.

“…하, 저놈이 정말….”

황제는 급히 시종장을 불러 명령했다.

내일 오전 아홉 시까지, 테렌스를 황태자궁 침실에 유폐하라고.

황태자궁 수석 마법사인 레이븐을 시켜 사지를 포박해둬도 된다고.

처형이 집행될 동안에는 옴짝달싹도 못 하도록.

***

아침이 밝았다.

죽기 전날인데도 이상하게도 잠이 잘 왔다.

꿈에서 발레리는 황녀를 만났다. 너무 생생해서 현실인 줄로만 알았다.

어두운 지하세계에서 갇혀 지내는 줄 알았건만. 웬걸, 프리다는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꽃밭을 거닐고 있었다.

—황녀… 님…?

—발레리! 언제 왔어요? 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황녀님, 여기가 어디예요?

—어디긴 어디예요. 꿈속이지.

—꿈… 속이라고요?

—헤헤, 나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마왕 죽이는 건 실패했지만…! 턱밑에 크게 상처도 냈거든요. 발레리가 가르쳐 준 그 기습 방법으로. 피도 엄청 많이 났어요.

—황녀님….

—내가 못 돌아왔다고 자책하지 마요.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했어. 내 선택에 후회도 없고요! 나 덕분에 집으로 돌아간 사람이 몇 명인데. 다들 나 영웅으로 추앙해 줬으면 좋겠다.

발레리는 프리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따뜻하고 보송한 뺨이 만져졌다.

진짜 같았다. 직접 다듬어 준 짧은 머리도 그대로였다.

—황녀님…. 제가 곧 갈게요.

—응? 어딜? 여길 온다고요?

—네. 저 거기 곧 갈 거예요. 아마 내일 당장이요. 잠깐밖에 못 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보게 된다면 꼭 웃으면서 맞이해 주세요.

—잠깐만, 발레리.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와요…?

“후우, 얘는 왜 이렇게 잘 자는 거야. 이런 날에….”

간수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형 집행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데, 발레리는 깊은 잠에 빠져 좀체 깨지를 않고 있었다.

결국 간수는 발레리의 몸을 흔들어 깨웠다.

“얘, 일어나 봐라.”

“…황녀님….”

“…음? 황녀님이라고?”

번쩍. 발레리가 눈을 떴다.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 등 뒤에 닿은 게 느껴졌다. 황녀와의 대화가 꿈이라는 걸 증명하듯이.

“아아, 간수님. 오늘 저 죽는 날이죠.”

“…내 살다 살다 죽기 전날에 깨워야 하는 사형수는 처음 본다.”

간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정말 처음이었다. 보통 사형수들은 형 집행 전날에 한잠도 이루지 못한다. 억울해서, 또는 죽음이 두려워서.

발레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시죠, 단두대로.”

이곳은 황궁 동문 인근 후미진 곳에 위치한 처형장.

발레리는 손이 묶인 채 단두대 앞으로 나아갔다.

산책하듯 가벼운 걸음걸이로.

엷게 낀 구름 사이로 맑은 햇살이 내비쳤다.

마구 헝클어진 그녀의 흑발이 산들바람에 나부꼈다.

‘…바깥공기 참 좋다. 봄이네. 4월은 아마 지나갔으려나.’

발레리가 사형수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받고 있는 혐의 자체가 비공개였다. 재판 또한 비공개로 치러진 만큼 형 집행 또한 최대한 조용히 이뤄질 예정이었다.

고로 발레리의 죽음을 지켜볼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재판에서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던 사제 여덟 명, 그리고 그녀의 목을 자를 집행관, 그리고 그의 시체를 처리할 인부들.

사형수가 혹시나 저항할 수 있으니,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파견된 병사들도 있었다. 개중에는 발레리와 함께 입대한 동료도 있었다.

발레리의 머리 위에 흰 천이 씌워졌다. 시야 전체가 하얗게 가려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붉은 수염이 무성한 집행관이 그녀를 형틀 앞에 무릎 꿇렸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눌러 형틀의 아랫부분에 잘 고정했다.

목울대 부분에 확 압력이 느껴졌다.

내가 지금 형틀에 놓여 있구나,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집행관은 발레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젊은 여자애가 요절하는 게 불쌍해서, 고통 없이 한 번에 보내주려고 날을 잘 갈아 놨어.”

배려심도 깊으셔라.

잔말 말고 빨리 처리하기나 하시지.

아마 곧 집행관은 칼을 고정시킨 밧줄을 끊어낼 것이다.

머리를 덮은 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발레리는 그저 속으로 초를 셀 수밖에 없었다.

셋.

둘.

하나.

삐이이이이익.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발레리의 세상은 암흑 속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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