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프리다의 결혼 사절단.
지하세계에 있던 그들은 순식간에 와이어 숲 한복판으로 추방돼 있었다.
지금 벌어진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다.
일단 주변이 아수라장이었다. 대규모의 실종자들이 그들을 둘러싸며 웅성대고 있었고, 황녀는 온데간데없었다.
황녀를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자진해서 마왕비가 됐기 때문이다.
본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대가로.
칼레바니아 땅과 마력석 광산을 지키는 대가로.
사절단의 수장을 맡은 사제 조너선은 고민 끝에 이렇게 결정했다.
“살아 돌아온 실종자들 중 일부를 데리고 황궁에 복귀합시다.”
“…황녀님은 어쩌죠.”
기사 하나가 죄책감에 푹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스스로 결정하신 사안이니 어쩔 수 없지요…. 물론 양 폐하께는 비보이지만…. 나라도 구하고 실종자들도 구하지 않았습니까….”
사절단은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실종자들을 거느리고 황궁으로 복귀했다.
선발대는 말을 타고 가서 비보를 먼저 알렸다.
“황녀 전하께서는…. 스스로가 마왕비가 되길 선택하셨습니다.”
“마왕을 상처 입히는 데는 성공하셨으나 결국 잠들어 있는 실종자들을 보시곤….”
황제와 황후는 그 자리에서 병상에 앓아누웠다.
테렌스 또한 충격 속에 균형을 잃고 벽을 짚었다.
황실은 비탄에 잠겼다.
이런 가운데 나머지 후발대는 실종된 이들을 대거 거느리고 황궁으로 복귀했다.
돌아온 자들은 중앙궁 광장에 모여 황제와 황후를 향해 엎드려 감사 인사를 했다.
딸을 희생해 본인들을 구해준 것에 감읍하며.
황제와 황후는 웃지 않았다.
모두를 얻었으나 딸을 잃었으니 무슨 소용일까.
칼레바니아가 150년 만에 얻은 귀한 황녀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신탁은 틀렸다.
프리다는 끝끝내 마왕을 처단하지 못했다.
***
황제는 일주일을 꼬박 침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동안 식음을 전폐했기 때문이다. 쇠약해진 몸으로 도저히 국정을 돌볼 수 없었다.
결국 황태자인 테렌스가 모든 일을 대신해 처리했다.
그 또한 신체적으로 매우 피로한 상태였으나 어떻게든 정신력을 짜내야 했다. 절망에 빠져 있다고 나랏일을 내팽개쳐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가 몸이 회복되자마자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지하 감옥이었다.
그는 발레리를 면회실로 불러 이렇게 통보했다.
“프리다는 돌아오지 못했다.”
“…네? 그게 무슨….”
발레리는 믿을 수 없었다.
프리다의 소식이 정말 궁금했지만 들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돌아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여기면서.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다니.
마왕을 처단할 운명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었는데.
그날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검술을 배우셨는데.
못 돌아오셨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선 안 된다.
“이제 네게 자비를 베풀 사람은 없다는 뜻이야. 모두를 기만한 죗값을 받아라.”
“…흐윽.”
“프리다가 무사히 돌아오면, 네가 걜 열심히 가르친 걸 생각해서라도 조금은 선처해 주려 했었다. 하지만 못 돌아왔으니, 그럴 이유가 전혀 없구나.”
“…흐흐흑.”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발레리 앞에서, 황제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사형 집행일을 통보했다.
“너의 형은 당장 내일 아침에 집행하겠다.”
황제는 이 말과 함께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떴다. 조금이라도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기 싫다는 듯이.
면회실에서 나온 발레리는 간수의 손에 이끌려 다시 독방으로 돌아왔다.
“간수님.”
“…응?”
“저 내일 죽는대요. 요즘 빵 안 썩은 걸로 골라 챙겨 주셔서 감사했어요.”
“하아, 넌 어린 계집애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아무리 수소문해도 네 혐의를 아는 사람이 없는데. 혹시 뭐 반란군이라도 조직한 거야?”
“하하, 마음껏 상상하세요. 죽을죄 지은 건 맞으니까.”
발레리는 초연하게 웃었다. 간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해맑고 씩씩한 딸뻘의 여자아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찜찜했다.
밤 당번 간수와의 교대 시간이 돌아오자, 그는 밖에서 따뜻한 빵과 소시지, 토마토를 사 와서 발레리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먹어라.”
“오, 간수님! 제가 소시지 먹고 싶어 하는 줄 어떻게 알고.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발레리는 생글생글 웃으며 쇠창살 사이로 음식을 받아들었다.
간수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준 뒤 머뭇거리다 퇴근했다.
발레리는 이렇게 혼자 남았다.
내일이 오면 죽는다. 낮 당번 간수가 퇴근할 시간이면 지금은 오후 일곱 시일 테다. 아마 열두 시간쯤 지나면 내 목은 날아가 있겠지.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죄인이 죽으면 지하세계에 간다고.
황녀님께서 그곳에서 돌아오지 않으셨다면….
아마 그곳에서 황녀님과 재회할 수 있지 않을까.
어렴풋한 희망의 불씨가 가슴속을 뭉근히 데웠다.
발레리는 손에 들린 음식이 식기 전에 입으로 가져갔다.
음, 맛있다.
마지막 만찬치곤 소박하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쫄쫄 굶은 몸으로 죽는 것보단 낫겠지. 저승 구경도 식후경이랬다.
“아, 오셨습니까. 저는 물러나 있겠습니다.”
밤 당번 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레리는 누가 찾아왔는지 직감했다.
언제부턴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이었다. 간수들은 이제 그가 찾아오면 알아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또 왔네, 또 왔어.”
황태자 테렌스.
그가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발레리는 이제 그의 방문이 익숙했다. 매일 와서 쇠창살 너머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가는 사람.
말을 걸어도 대꾸가 없으니, 여태 그녀는 테렌스를 투명인간 취급해왔다. 그러는 게 편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당장 내일 죽는데. 그동안 못 한 말은 다 꺼내놓은 뒤에 죽고 싶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테렌스가 서 있는 창살 쪽으로.
“저기요. 이렇게 매일매일 찾아오는 거, 나 벌주는 거죠?”
“……?”
테렌스의 창백한 얼굴에 의문의 빛이 어렸다.
“당신 얼굴 보면서 괴로워하라고 오는 거잖아요.”
“…괴롭나? 내 얼굴 보는 게.”
와, 드디어 목소리를 들려준다.
하도 말이 없어서 실어증에 걸렸나 싶기도 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이제야 대답해 주네. 그럼 당연히 괴롭지. 내가 황녀님하고 당신한테 한 짓이 몇 개인데. 죄책감에 괴롭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겠나요.”
“…….”
“당신이 매일 찾아와서 그 텅 빈 눈으로 볼 때마다, 무슨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에요. 살아서 숨 쉬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지경이라고요.”
그동안 담담한 척했지만, 애써 그를 투명인간 취급해왔지만, 마음은 달랐다.
테렌스가 찾아올 때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허락도 없이 훔쳐 온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걸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나 내일 죽는 거 알죠?”
끄덕.
테렌스는 알고 찾아왔다. 그녀의 집행일이 결정되었다는 것을.
“알고 왔구나. 마지막 인사하러 왔나 보네요.”
“…….”
“나는 죄인이라 죽으면 소멸 안 하고 지하세계로 갈 텐데. 그럼 잠깐이라도 황녀님 볼 수 있겠죠? 황녀님도 아마 그곳에 계실 테니까….”
“뭐가 그렇게 태연하지?”
“네?”
“내일 날 밝으면 죽을 사람이 뭐가 그렇게 태연하냐고. 두렵지도 않나?”
테렌스는 이상하게 화가 나 있었다. 발레리는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원래 죽음을 앞두고 태연하면 안 되는 건가.
“사람은 다 죽어요.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겠지만. 내가 죽어서 속 시원할 사람 있으면 의미 있는 죽음이겠죠. 죽어야 마땅하고, 또 죽은 뒤에 보고 싶은 사람도 많고….”
남부 아지트에서 살해당한 단원들.
그리고 지하세계에 계실 황녀님.
생생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발레리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아,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리 가까이 와.”
테렌스가 명령했다.
우는 거 들키기 싫은데 왜 오라는 거야. 발레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가야겠지. 그녀는 몸을 일으켜 쇠창살에 가까이 다가갔다. 돌바닥에 족쇄 끌리는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이곳에 갇힌 이후로, 테렌스를 이렇게 코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창살 사이로 테렌스의 왼손이 비집고 들어왔다. 따뜻한 손이 발레리의 젖은 뺨 위에 얹혔다.
내 얼굴을….
왜 만지는 거지.
“발레리.”
이름도 불러준다. 퍽 다정한 말투로.
“네…?”
“나한테 할 말 없나?”
발레리는 픽 웃었다.
죽기 전에 한 마디 남길 기회를 주는 거니.
아마 사과부터 해야겠지.
“죄송합니다. 당신을 속여서.”
“그거 말고.”
“잘못했습니다. 당신한테 거짓말해서.”
“아니, 그거 말고.”
“저번에도 말했었는데. 나 죽으면 이 반지 가져가요. 원래 당신 거였는데 내가 훔쳤거든.”
발레리는 쇠고랑 찬 손을 다시 들어 보이며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여전히 엘로이스의 반지는 왼손에 그대로 있었다.
“…그게 다인가? 나한테 할 말이?”
“아뇨, 더 있긴 한데. 내가 이 말을 뱉을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 없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들으면 후회하실걸요.”
“그냥 해.”
테렌스는 여전히 그녀의 오른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 줄기를 엄지로 세심하게 쓸어 닦으면서.
발레리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테렌스의 연청색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봤다.
무언가를 절절하게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원망했다.
너는 대체 나한테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정말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는데. 왜 그것조차 마음대로 못 하게 하는 거야.
눈물이 쏟아진다. 태연자약했던 얼굴이 산사태를 맞는 것처럼 무너져 내린다. 진짜 이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죽기 전에 정말 나한테 기회를 주는 건가.
‘그래, 내일 죽는 마당에.’
“…많이 좋아했어요. 아니, 사랑했어요. 진심으로. 당신을 대할 때나, 황녀님을 대할 때나. 모든 마음은 진심이었어요. 안 믿어도 좋아요.”
“…했어?”
테렌스는 되물었다. 지금 말하는 감정이 과거형인지.
“염치없지만 지금 이 순간도 그래요. 죽고 나서도 아마 그럴 것 같아요. 나한테 그럴 자격 없는 거 알지만요.”
뺨을 감싸 쥔 테렌스의 손이 그녀의 뒷덜미로 옮겨졌다.
그는 발레리의 뒷덜미를 잡고 제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얼마나 가까이 잡아당겼는지 두 뺨이 쇠창살에 꽉 눌릴 정도였다.
쇠창살 밖으로 살짝 나온 발레리의 입술에, 버석하고 마른 촉감이 닿았다.
테렌스가 입을 맞추고 있었다.
사형수 발레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