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오벨론은 보검이 턱밑을 급습하자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다소 늦었다. 칼을 빗맞은 턱끝에선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손으로 급히 밑을 받치니 검붉은 액체가 걸쭉하게 묻어 나왔다.
“…하아, 또 실수했군. 인간을 믿다니.”
오벨론은 황금색 눈으로 황녀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프리다는 풍성한 스커트 안에 보검을 숨기고 있었다.
치마를 모두 뜯어내 바지 차림이 된 프리다는 이제 거동이 자유로워졌다. 오벨론의 턱에 생긴 균열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피가 보였다.
턱끝에 상처를 냈다.
한 방에 목을 치진 못했지만.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황녀의 급습이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에 당황했다. 분명 황녀가 오벨론을 처단할 운명이라고, 신탁에 그리 나와 있었는데….
오벨론의 집행관들은 얼른 사절단 전체를 무장해제했다. 이들이 차고 있던 무기들은 모두 땅에 떨어졌다.
프리다는 멀찍이 선 오벨론을 향해 우다다다 달려 다시 맹공을 가했다. 오벨론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모든 공격을 가볍게 피했다.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이렇게 화려한 결혼식이 될 줄은 몰랐는데. 하객을 좀 더 불러 볼까?”
오벨론의 손가락에서 ‘딱’ 소리가 났다.
동시에 모두를 둘러싼 공간이 대규모로 확장됐다.
부스럭부스럭.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웅얼웅얼. 목소리도 들렸다. 한두 명의 소리가 아닌 듯한….
프리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엄청난 인파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들 잠에서 막 깬 듯 멍하고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뭐지…?”
“…여기가 어디지?”
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귀에 흘러들었다.
적게는 수백, 많으면 천은 될 것이다. 이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사절단은 모두가 겁에 질려 있었다. 켄드릭은 그 인파 속에서 저를 닮은 두 남자를 발견했다.
패트릭.
프레데릭.
10여 년 전부터 와이어 숲에서 자취를 감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이곳에 잠들어 있었다.
지금 깨어난 사람들은 숲에 도전했던 수많은 용사들과 제국 기사들, 실종된 민간인들이었다.
켄드릭은 크게 동요했다. 정말 마왕은 숲에서 실종된 자들을 지하세계 아공간에 잠재워두고 있었다.
“어때, 황녀. 하객들이 마음에 드나?”
“…오벨론.”
프리다는 보검을 꽉 쥐었다. 공격을…. 해야 하는데….
다리가 바닥에 뿌리내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오벨론은 굳어 있는 프리다를 보며 냉소했다.
“그대가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아무리 보검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 실력으론 힘들 텐데.”
“너… 원하는 게 뭐야?”
“보검을 내게 넘기고 혼자 이곳에 남아라. 그러면 저들을 모두 지상에 풀어 주지. 숫자는 안 세어 봤는데. 우리 앞마당의 무단침입자들이 꽤 쌓여 있더군. 딱 인질로 삼기 좋게 말이야.”
오벨론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일순 모두가 털썩, 그 자리에 쓰러져 잠들었다. 지하세계에 함께 온 사절단까지 모두 다.
인파는 암흑의 공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절단 또한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다시 좁아진 이 공간에는 프리다와 오벨론.
그리고 집행관 네 명뿐이었다.
프리다의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손안의 보검에서 발산하는 빛이 조금씩 사그라졌다.
오벨론은 조소를 흘리며 그녀의 주위를 천천히 맴돌았다.
“황녀. 그대 하나만 희생하면 저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간다. 알다시피 저들은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딸이자 아들이고, 친구이자 연인이지.”
“…나만 남으면 전부 풀어준다고?”
“원한다면 혼자 돌아가도 좋아. 결과는 알고 있겠지만… 칼레바니아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암흑의 땅으로 돌아가고, 방금 본 침입자들은 다시 영영 잠에 빠진다.”
오벨론은 보검을 든 프리다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설득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네 부모는 황위를 잃겠지. 너 하나 살자고 백성들이 전부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
“궁금한 게 있는데. 네가 황제의 딸이란 이유로, 저들을 모두 합한 목숨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고 믿나?”
오벨론은 자신만만한 어조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난 굉장히 이성적으로 처벌을 관장했다.
죽은 중죄인들의 처벌 체제를 정비하고, 합당한 벌을 내렸지.
나만큼 공명정대한 심판관이자 집행관은 없을 거라고 자신해.
네 아버지의 나라가 잡아내지 못한 악인들의 사후 뒤처리를 내가 도맡고 있다는 말이다.
앞으로 나만 한 집행관이 나오리라곤 장담하기 힘들어.
난 영원히 임기를 유지하며 내 선한 뜻을 이어가려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날 죽일 운명인 널 봉인해 두고, 보검을 용광로에 넣어 없애버려야 해.
봉인이라 해 봐야 별거 없어. 네가 가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조용히 잠만 자면 된다. 나쁘지 않을 거야. 꿈만큼은 원하는 것을 꾸게 해 줄 거니까. 그 속에서 넌 자유로운 바깥세상을 누빌 수 있겠지.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면서.
괜찮은 거래가 아닌가?
싫다면… 지금 여기서 힘 다할 때까지 보검을 휘둘러 봐.
그대가 속력과 체력으로 날 넘을 수 있을지 궁금하니까.
난 며칠이고 그대의 대련 상대가 돼 줄 수 있어. 무기 없이 맨몸으로.
아마 날 이길 순 없을 거야. 널 해치지도 못하는 자에게 패배하는 절망감이 어떤지 맛보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프리다는 눈을 감았다.
마왕을 이길 방법은 없다. 아까도 온 힘을 다해 덤볐지만 그는 상식선을 넘어선 속도로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치가 떨렸다. 오벨론을 한 방에 처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황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대 하나만 희생하면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간다. 네 부모만 잠깐 슬퍼할 뿐이겠지.”
“…정말 아내가 아니라 제물이 필요한 거였구나, 너.”
“그래, 내 아름다운 제물. 어차피 그대는, 황실의 대를 이을 아들도 아니지 않은가? 그대 하나쯤 없어져도 칼레바니아 황실은 문제없이 굴러간다.”
오벨론의 계속된 설득에 프리다는 수긍하고야 말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나 하나만 여기 잠들면 모두가 행복해진다.
켄드릭을 비롯한 실종자의 가족들은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을 찾을 거고.
칼레바니아 땅도, 마력석 광산도, 지금의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겠지.
아버지, 어머니, 오빠는 한동안 슬퍼하겠지만.
발레리도 내 소식 들으면 슬퍼하려나. 자책은 안 했으면 좋겠다. 우리 둘 다 최선을 다했으니까.
스릉.
프리다는 보검을 검집에 꽂았다.
오벨론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다시 손을 튕겼다.
공간이 다시 확장됐다. 잠들었던 이들이 또다시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결혼 사절단도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땅에서 몸을 일으켰다. 본인들이 잠을 자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이제 모두의 중심에 프리다가 놓였다.
숲에서 사라졌었던 모든 이들이 잠에서 깨어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바일론은 보검 상자를 다시 가져와 프리다의 앞에 내밀었다. 뚜껑을 여니 그 안에는 정교하게 제작된 모조품이 담겨 있었다.
오벨론의 손에서 모조품은 한순간에 가루가 돼 버렸다.
“모조품이라니. 깜찍한 속임수를 썼군.”
보검이 담길 상자는 이제 텅 비었다.
“뭐 하지, 황녀. 얼른 집어넣지 않고.”
보검은 집행관들도 만질 수 없었기에 상자에 담긴 상태에서만 운반할 수 있었다.
프리다는 상자 속 푸른 실크 위에 보검을 내려놓았다. 그녀의 손을 떠난 보검은 빛을 잃고, 다시 오래된 유물처럼 색이 바래졌다. 그 위에 눈물 한줄기가 툭, 떨어졌다.
뚜껑이 덮였다.
바일론은 상자를 들고 사라졌다.
결정은 끝났다.
프리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며, 목청을 다해 외쳤다.
“내가 마왕비가 될 테니, 모두 돌아가세요.”
사절단은 화들짝 놀랐다. 이럴 리 없었다. 분명 황녀는 마왕을 처단해야 하는데…. 스스로 보검을 그에게 넘겼다.
“황녀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켄드릭은 망연한 얼굴로 황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프리다는 그를 애써 무시했다.
“내 말 못 들었어요? 나 이 사람 신부 될 거라고. 빨리 사람들 데리고 돌아가요. 황궁으로.”
프리다의 눈에선 굵은 물줄기가 하나둘씩 흘러내렸다. 창백한 두 뺨은 흥건히 젖어들었다.
이렇게 그녀는 마왕비가 되었다.
쪽.
그녀의 이마에 차갑고 낯선 감촉의 살갗이 와 닿았다.
오벨론의 입술이었다.
“후회하지 않을 거야. 나는 임기를 지키고, 넌 모두를 지키는 거니까.”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동시에 지하 공간에 머물던 이들은 전부 옮겨졌다.
벌써 해가 밝아오고 있는 지상의 숲속으로.
프리다는 오벨론이 지어둔 지하궁전의 방으로 인도받았다.
이곳에 그녀는 봉인될 예정이다.
시작된 건 결혼생활이 아니라 또 다른 감금 생활이었다.
‘…내가 오벨론을 처단하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백 번 기회가 오더라도, 그녀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나 하나만 이곳에 편안히 잠든다면 모두를 해방시킬 수 있으니까.
태어났다는 이유로 만 백성의 주목과 사랑을 받고 자랐으니, 이제 그들에게 그 선의를 돌려줘야 했다.
모두의 기억에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그런 욕심도 있었다.
‘…내 존재,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행관 헤슬론의 인도에 따라, 프리다는 궁전 안의 침실로 향했다.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보리색 침대와, 그 위의 하얗고 포근해 보이는 침구가 그녀를 반겼다.
프리다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 위에 정자세로 누웠다.
“저기, 정말 원하는 꿈은 다 꿀 수 있나요?”
“네, 그렇습니다.”
“…얼른 재워주세요.”
헤슬론은 성호를 그은 뒤 프리다의 눈앞에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프리다의 짙푸른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왔다.
눈앞의 빛이 하나둘씩 꺼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새로운 빛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