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프리다의 결혼 사절단이 와이어 숲 인근에 이르기까지는 꼬박 나흘이 걸렸다.
황궁에서 가장 좋은 말을 선발해 마차를 끌게 했지만, 황녀의 컨디션을 고려해 중간중간 쉬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절단은 숲 남부 광산촌의 한 숙소에서 여독을 잠시 풀었다.
이들은 하늘이 막 보랏빛으로 물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밤이 내리고 달이 뜰 무렵 숲으로 출발했다.
기사들은 흰 연미복을 착용하고, 허리춤에 은검을 찼다.
마법사들은 흰색 로브를 두르고, 긴 지팡이를 들었다. 기사들의 검과 길이를 맞춘, 예도를 설 때 들기 위한 용도의 지팡이였다.
사제들도 대예배를 집전할 때 입는 정갈한 예복을 입고 석장을 들었다.
황제가 비밀리에 선발한 사절단.
이들은 집행관들과 전투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출정을 용단했다.
황녀가 마왕을 물리칠 수 있다는 신탁을 굳게 믿었기에.
지하세계 땅을 한 번쯤은 밟아 보려는 모험심과, 숲속에서 실종된 이들을 구출하는 데 일조하려는 영웅심 또한 작용했다.
사절단은 와이어 숲 앞에 다다랐다.
10년간 아무도 발을 들일 수 없던 이 숲은 기형적으로 성장해 있었다.
와이어 숲의 나무들은 사철 내내 푸른 상록 활엽수로 이뤄져 있었다. 보통 나무들은 이맘때쯤 작은 새순을 달고 있지만, 이곳은 모든 잎사귀가 한여름처럼 무성하기만 했다.
프리다는 고개를 들었다. 이 숲은 거대한 우산, 혹은 버섯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모든 식물이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 빈틈없이 하늘을 막고 있다는 인상을 줬다.
원래 숲의 입구였던 곳은 사람이 한 발짝도 들일 수 없을 만큼 수풀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
이래서 사절단이 따라온 것이었다.
마법사들이 숲의 결계를 해체한 뒤 지팡이 끝으로 빛을 발산해 조명을 비추었다.
그 빛 아래서 기사들은 열심히 길을 만들어냈다. 허리춤에 찬 검으로 풀을 샅샅이 베어 가면서.
실시간으로 닦이는 길을, 프리다는 순백색 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걸었다.
진주가 알알이 박힌 화려한 웨딩드레스였다. 여신 축일 때 입었던 것과 달리 치마를 부풀린 디자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양손에 흰색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긴 치마 아래 드러나지 않는 발에는 흰색 단화를 착용했다.
에스코트는 켄드릭이 담당했다. 프리다의 선택이었다. 기사들 중에 그나마 가장 친밀한 이의 팔짱을 끼고 싶었다.
“…고마워요, 켄드릭.”
“아닙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탑에서 일시 석방된 켄드릭은 한껏 긴장해 있었다. 10여 년 전 잃은 두 형을 다시 볼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드디어 숲의 한가운데다.
여기까지 길을 만드느라 모두가 진을 뺐다.
이곳은 숲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어둡고 캄캄했다.
황궁 성벽만큼이나 높은 무성한 나무들이 촘촘한 가지와 잎으로 모든 빛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어두운 가운데 스산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땅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아공간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프리다가 두 발을 딛고 선 자리, 그 바로 앞에.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서서 바닥의 변화를 지켜봤다.
작은 소용돌이와 함께 불규칙한 모양의 구덩이가 형성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지팡이 끝에 불을 켜고 그 안을 밝혔다.
보랏빛 광택이 미끈하게 흐르는 계단이 보였다.
프리다는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고 그 계단을 한 칸 한 칸 천천히 내려갔다.
이 끝에 가면, 초상화에서 보던 백발의 금안 사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 서늘한 땀이 등줄기를 적셨다.
황녀와 켄드릭을 필두로 모든 사절단이 지하세계로 내려왔다.
모두가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처음 보는 분위기에 압도당해서다. 얼기설기 뒤엉킨 형상의 적갈색 돌벽과 그 위를 보라색 불빛으로 밝히는 검은 촛대.
지상에서는 기괴하다고 여겨질 만한 색 조합이었다.
계단 맨 아래에는 마치 황제의 알현실 같은 거대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다.
단 위에는 다섯 개의 성좌가 놓였다.
가운데 가장 높은 성좌를 중심으로, 양옆에 두 개의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앉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슨 군단을 그렇게 많이 끌고 왔지? 그 화려한 옷은 뭐고.”
목소리가 들린 건 뒤편이었다.
나른하고 권태로운 듯하면서도 위엄이 깔린 목소리.
군인처럼 짧게 깎은 백발. 어두운 가운데서도 광택이 흐르는 갈색 피부. 동공이 세로로 쭉 찢어진 황금색 눈. 2미터에 육박한 키.
초상화에서 본 그 남자.
오벨론.
프리다는 그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그녀는 꽤 놀랐다. 예상보다 거구였다. 이곳에 온 사절단 전체를 통틀어 그만큼 키가 큰 자는 없을 것이다.
아마 그의 목을 베려면 온 힘을 다해 땅에서 튀어 올라야 하겠지.
“시, 신부를 맞이하는데 결혼식도 안 할 생각이었나요? 칼레바니아 황실 전통대로 예도단을 이끌고 왔을 뿐이에요.”
프리다는 긴장감을 숨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가 내뿜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역시 인간이라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건가. 내겐 황녀, 그대 외에는 전부 무단침입자일 뿐이다.”
“무단침입이라니 당치도 않소. 우리는 결혼 사절단으로서 축하를 위해 찾아온 것이오.”
무단침입이라는 말에 켄드릭이 발끈해서 대답했다. 그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형들을 잡아간 원수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그게 축하한다는 사람의 태도인가. 오벨론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사절단을 하나하나 훑었다.
“던컨과의 계약상 무단침입자로 판단된 이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구금하는 게 원칙이다. 흠, 얌전히 있다면 이번만큼은 봐주지. 인간들의 결혼식이라는 게 뭔지 궁금해져서 말이야.”
순간 오벨론의 양옆에 집행관들이 인기척도 없이 등장했다. 남자 둘, 여자 둘이다. 사제복처럼 치렁치렁한, 어두운 보랏빛 예복을 입고 있었다.
“내 수하 집행관들이다.”
집행관 넷은 황녀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모두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그래서 섬뜩했다. 프리다는 침을 꼴깍 넘기며 고개를 까딱였다.
“…네, 그럼 이제 시작하죠.”
프리다의 명령에 사절단의 사제들이 성서를 들고 맨 앞에 서서 성호를 그었다.
“최대한 약식으로 하겠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앞으로 나와주시길 바랍니다.”
프리다는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그들 앞으로 나아갔다. 오벨론은 결혼식에 대해 아예 모르는 건 아닌지, 그녀의 곁에 서서 걸음을 맞췄다.
팔뚝을 잡아 볼까. 프리다는 팔짱을 끼운다는 핑계로 오벨론의 팔 안쪽에 손을 가져갔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오벨론은 흠칫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하…. 무쇠처럼 단단하네. 쉽지 않을 걸 예상하긴 했지만, 엄청 강할 것 같아….’
신랑과 신부는 사제들 앞에 나란히 섰다.
개중에 가장 서열이 높은 사제가 결혼에 관한 성서 내용을 읽었다.
“…시에나 여신의 축복이 둘 사이에 임하여… 사랑과 배려와 온화한 마음씨로 서로를 이해하고….”
의미 없는 미사여구를 한 귀로 흘리며, 프리다는 옆의 남자를 곁눈질했다.
어떻게 끝장낼 수 있을까.
키가 너무 커서 지금 눈높이로는 가슴께밖에 보이지 않았다.
낭독을 마친 사제들이 성서를 덮었다.
프리다는 문득 예식 순서를 일부 변형하기로 했던 것을 떠올렸다.
“…예물 교환은 좀 나중에 하죠.”
“그러든지.”
오벨론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프리다와 오벨론은 뒤를 돌았다.
기사 하나가 바닥에 길쭉한 황금 상자를 내려놓았다. 오벨론은 바로 그쪽을 응시했다.
필시 보검이 든 상자일 것이다.
이렇게 황녀와 보검, 모든 게 수중에 들어왔다.
오벨론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옆의 황녀를 쳐다봤다.
“이제라도 약속을 지켜주니 고맙군, 황녀.”
“별말씀을.”
예도가 시작됐다.
기사들이 좌열, 마법사들이 우열에 자리했다.
그들은 허리춤에 찬 은검과 지팡이를 높이 들어 신랑과 신부가 통과할 길을 만들었다.
다만 우열의 마법사들이 든 지팡이들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벨론과 집행관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마기에 당황한 탓이다.
“이 밑으로 지나가면 되는 건가?”
오벨론이 물었다.
“네.”
둘은 음악 없이 행진했다.
집행관 네 명은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서, 지하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 이질적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프리다는 아직 실감하지 못했다.
곁에 선 이 남자가 마왕이라는 사실이.
프리다는 팔짱을 끼지 않은 손으로 치마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단단한 무언가를 더듬거렸다.
행진이 끝났다.
사제들은 예도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음 순서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예물을 주고받는 순서가 있겠습니다.”
“반지 교환 같은 건 생략하지. 내게 예물로 필요한 건 저 상자뿐이니까.”
오벨론이 보검이 든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검이 그렇게 갖고 싶었어요?”
프리다는 눈앞의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켄드릭보다 훨씬 컸다. 꺾인 목뒤가 뻑적지근해질 정도로.
오벨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명령했다. 휘하 집행관 중 하나에게.
“바일론, 예물 상자를 내 방에 가져다 둬라.”
“왜 확인해 보지도 않죠?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보검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도 않나요?”
프리다는 보검 상자를 들고 이동하는 바일론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무서워서 말이야. 그대가 그걸 집어 들고 날 죽이려 하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오벨론이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프리다도 좁아지려는 미간을 애써 펴면서 눈꼬리를 휘었다. 전혀 겁먹지 않은 태도로 무섭다고 말하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어머,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신부를 너무 못 믿으시네? 난 생각보다 그쪽이 잘생겨서 마음에 드는데.”
프리다가 이죽거리며 대꾸했다. 전혀 진심이 아니었지만.
사제는 둘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긴장감을 느끼며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럼 신랑과 신부의 입맞춤으로 결혼식을 마치겠습니다.”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둘은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프리다는 턱을 높이 치켜들고 오벨론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벨론의 고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간을 구기며 검지를 위로 까딱일 뿐.
“까치발 들어, 황녀. 그렇게 땅에 붙어 있으면 어떻게 입을 맞추라는 거야.”
“흠, 나한테 고개 숙이기 싫다 이거죠? 그럼 어쩔 수 없지. 내가 높이를 맞춰 주는 수밖에.”
—투둑. 투두둑.
프리다는 양손으로 허리에 둘린 치맛자락을 뜯어냈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검 자루가 손에 한가득 잡혔다.
프리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무릎을 굽혔다.
순식간에 보검을 뽑아든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도약했다.
신랑 될 자의 목을 베어내기 위해.
—스윽.
닿았다. 여기서 더 깊이…!